우리 사회의 현대판 악과 재앙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의 필수적인 정화 대상 가운데 하나는 나쁜 서적과 나쁜 신문들이다.

 

                        인쇄 매체는 해마다 계속 증강되어 지상에서 악과 선의 기준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당신은 무분별한 출판물들이 인간에게 얼마나 재앙을 가져오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가끔씩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는 감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감기의 환자수는 수천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현대판 재앙을 일으키는 출판물들의 범람은 이미 수만을 넘어섰다.

 

                        세상에는 깨끗하고 선하며 인간의 마음을 정화시킬 수있는 고상한 출판물들이 많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 절반 이상은 파괴적이거나 저속한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영혼을 혼탁시키며 죽음으로 내 몰고 가는

                        이상한 실체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에게 거짓된 관념이나 상상력을 오염시키고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책이나

                        선과 악이 혼합되어 이념을 심어주고 폭력적인 신문 등이 바로 대표적이다.

 

                        이 시대에 가장 슬픈 일중 하나는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제본과 화려하고 멋있는 문체로써

                        악을 매력적으로 묘사하는 문학 양상이다.

 

                        악은 무서운 것이다.

                        악은 마치 화려한 커튼 뒤나 궁중의 격조 뒤에서 바라보는 어렴풋한 모습이다.

                        그들은 이러한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가뜩이나 힘든 우리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악은 오늘도 병원 속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생생한 모습으로 그려야 한다.

                        다시는 사람들이 악에 대하여 미화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고발하고 미워해야 한다.

 

                        부정을 보기 좋은 것으로

                        부패를 매력적인 것으로

                        위선을 고상한 품격인 양 묘사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의 저자야!

                        너희들을 팔아먹고 양심도 없는 이 사기꾼아! 신문사들아!

                        비록 너희가 이 세상에서는 숨을 곳이 많더라도 너희가 무너트린 자들의 고통에 둘러싸여

                        그들의 분노로 영원한 고통과 저주가 너희에게 임할 찌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 사회의 두 계층

 

 

             인간 사회는 본질상 두 개의 계층, 즉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층이 구별되는 것은 자연 환경과 인간의 역량, 사회 구조상 불가피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에게 "지금 행복하십니까?"하고 물을 때 사람들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당연히 부자나 가진 자들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여겨지지만

             그것이 정당하고 올바르게 얻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과연 그들의 양심에도 평안하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힘좀 있다고 해서 거만해지고 방탕하며 사람들에게 지탄을 듣고 산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을까요?

             올바르고 정당하게 얻은 것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복이 되고 어떤 때에는 화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없는 자들이 가진 자보다 탐욕스럽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으며 더욱 분수에 맞게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풍부도 지나친 빈곤도 어떤 상황에 따라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살아갑니다.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도 상호 관계속에서 어쩔 수없이 서로 의존하여 살아가도록 이루어졌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복지를 위해 필요한 자들이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자들입니다.

             가진 자들의 부족함은 없는 자들을 통해 위안을 얻고 없는 자들의 부족함은 가진 자들의 여유로 보충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언제나 가진 자보다 없는 자들이 더욱 많은 법입니다.

 

             대개 없는 자들은 가진 자들의 명성이나 부를 일단 부러워하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없는 자들은 가진 자들처럼 부와 지식과 명예를 얻기위해 모든 노력을 다합니다.

             이러한 노력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으로는 노력이 생활의 활력소가 되고 자기의 꿈을 이루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합법적이며 도덕적으로는 깨끗한지 면밀히 따져볼 일입니다.

 

             이와같은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정직하게 땀을 흘리고 노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방법보다도 돈을 벌었느냐 못벌었느냐에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풍조가 나타나게 된 것은 산업시대 이후 "돈이면 무엇이든 다 얻을 수있다"는 황금만능주의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그의 인격이 평가되고 사회적인 지위에 따라 그의 신분이 결정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진 자들은 없는 자들을 힘으로 지배하고 없는 자들은 가진 자들에게 늘 복종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소유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가지면 가질 수록 힘을 얻어 그 힘을 과시해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대개는 그 힘이 선하게 사용되기 보다는 자기의 유익과 불의를 위하여 사용되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명예를 얻고 나면 겸손하지 못하고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관심받고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문제는 없는 자들 스스로가 자신을 너무 비하(卑下)시켜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없는 자들은 가진 자들을 바라볼 때 자기는 아무런 쓸모없는 존재이며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를 무시하고 경멸하며 따라서 자기들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이 빠지기 쉬운 것은 본능적인 쾌락의 욕구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학식이나 권력이나 재물이 없어지면 무엇이든 의지할 곳을 찾기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배우지 못하고 교양이 없는 사람들은 신중하지 못하고 매사에 들떠 있어 타락하기가 쉽상입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은 풍부한 재력(財力)덕택으로 높은 교육과 같은 계층간의 교제를 통해

             더 많은 자유와 오락을 즐기며 자기들의 공허감을 채우고

             저들이 겪기 쉬운 모든 고통과 질병에서도 쉽게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소중함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그들 속에 박혀져있는 열등감을 없애고 밝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있도록 모두가 협력해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약한 가운데서 독립심을, 부족한 가운데서 평화를

             역경가운데서도 만족함을 찾을 수있게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도와주어야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다 아름답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댓글과 이상한 시선들 

 

 

 

 

 

 

 

                 지난 2007년 참여정부가 끝나가고 대선도 막 끝나가던 무렵                  우리 가족은 정들었던 곳을 떠나 머나 먼 이곳까지 이사를 오게 되었다.

 

                 지난 동네에서는 가족들이 살기에는 너무도 불편했고 자식들도 이미 다 커버려서

 

                 아내는 생각이 날 때마다 더 넓은 집을 달라며 날마다 노래를 불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내를 따돌리며 이따금씩 인터넷을 하면서 아이디어를 구상했다.

 

                       어떤 날은 나만을 위한 홈피방을 만들어 글을 올리며 활동하기도 하였었고

                 어떤 날은 인터넷의 장기를 두면서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쌓여진 원치않던 취미들...

                 장기 9단, 바둑 2단, 한게임, 넷마블, 싸이월드 홈피등...

 

                 이러한 싸이트는 내게 단순한 홈피 기능만이 아니라 하나의 놀이터가 되었고

                 도피처였으며 창고지기 역할도 해 주었다.

 

                 종종 스팸문자나 낯 뜨거운 성광고가 올라올때면 잠시 인터넷을 중단하고

                 지우고 무시하고를 반복하며 인터넷에만 몰두하면 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대선이 가까와 오자 인터넷에서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이상한 문자들이

                 계속 올라오기 시작했다.

 

               " 정동영은 홍어바다에, 이명박은 청와대로 "하면서 밤에도 낮에도 그칠줄을 몰랐다.

 

                 이미 선거관리 위원회가 분명히 댓글선거는 불법이라고 선언을 하였지만

                 그들의 이러한 불법적인 행동은 전혀 그칠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이미 게임을 중단하고 아이디를 향해 질책하고 경고도 주며 신고도  해보지만

                 그들의 아이디는 어디에서 자꾸 나오는지 사람들을 무시했다.

 

                 이러한 광고들은 다음 해에도 계속되었다.

 

                 당시에 MB정부가 막 출범을 하였을 때  KBS사장을 교체한 적이 있었다.

 

                 MB정부는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임기가 아직 많이 남은 KBS사장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이병순 전 사장을 앉힌바가 있었다.

 

                 그 날에도 나는 머리가 복잡하여 인터넷을 하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었는데 모든 인터넷 댓글마다에는

 

                      "정연주 사장은 해외를 방문할 때마다 수시로 여성들을 데리고 그들과 자주 성관계를 갖았다"며

                 그를 조롱하고 있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아무런 감정도 없었지만 댓글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도 충격을 받아

                 잠시 손을 내려놓고 캡처하여 방송국과 고객센터로 보냈지만 그때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법원은 2012년 10월 12일 그에게 최종 무죄확정판결을 내렸지만

                KBS는 이에 대한 어떠한 입장이나 변명도 하지 않고 있다.

 

                얼마 후에 정부시책에 따라 모든 싸이트들이 홈피기능을 삭제했고

                나의 글 또한 그 속에서 영원히 잠자고 말았다.

 

                댓글이란 무엇일까? 감정표현같은 것이 아닐까...

                사람이 처음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다른 사람이 그 글에다 감정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옛말에 '글 속에 글있고 말 속에 말있다"는 말이 있다.

                말은 말과 글의 뜻은 끝이 없고 한이 없다는 것으로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니며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라서 잘가려서 써야 한다는 뜻이다.

 

                항상 우리가 남에게 잘해 줄 수는 없어도 항상 좋게 말해 줄 수는 있다.

                런가 하면 모든 분쟁의 원인은 항상 잘못된 말에서 비롯된다.

 

 

 

                말이 소리이고 의사전달이라면 글은 사상이라고 할 수있다.

 

                글은 여러 말이 모여서 하나의 문장으로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흉기는 가까운 사람을 죽이지만 잘못된 말은 천리밖의 사람도 죽일 수 있고

                무분별한 댓글은 살인보다도 위험하다.

                살인은 한 사람밖에 죽이지 않지만 중상 모략은 반드시 그 이상을 죽이기 때문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지금도 남의 비웃음이나 조롱으로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의 뛰어난 재치와 기지들로 상대방을 맞받아 공격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사람을 죽음으로 내 몰고 사회를 마비시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것이 설사 작은 장난이라도 나쁜 댓글은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쩌면 그들의 행동은 다른 어떤 행동보다도  그 책임이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만일에 그가 바른 사람이라면 지난 대선에서 다른 사람의 명예나 인격을 결코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그런 하챦은 댓글이 무엇이길래 선거에 영향을 주겠느냐며 묻는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어느 사람이 한가하게 그런 댓글이나 보겠느냐며 불법을 감추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지 다른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생각이 바른 사람들이 많고 젊은 세대들에게 댓글과 트위터는

                하나의 중요한 정보이다.

 

                불법댓글은 어떤 갯수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행위의 문제이다.

                아무리 적은 댓글이라도 그것이 분명히 불법이라고 한다면 무심코 던진 돌하나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것처럼

                사람도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가 있다.

 

                우리 국민들은 지난 대선당시 어느 한 50대 여인이 모가수가 박근혜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허위 글을 올렸다가 지난 5월 17일에 구속당한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도 검찰은 아직까지도 계속 수사를 지켜보라며 시간만 질질 끌고있고

                정치인들의 눈치만 계속 살피고 있다.

                아마도 지금 저들은 시간을 벌려놓고 더욱 정치적으로 각종 시나리오를 짜는 것에 여념이 없을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인간의 장수(長壽)와 행복(幸福)

 

 

          아직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어 갈수록 세월이 더 빨리지나가는 것처럼

          느낄때가 많다.

 

          나이들어 지난 날을 돌이켜 볼 때 많은 날들이 한꺼번에 따라오기 때문에

          노인들은 몇십년의 시간은 그냥 없어지고 모든 일들이 한 순간의 일처럼 느껴지게 마련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생은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세계인들은 다 인정하고 있다.

          어차피 우리 인생의 날은 정해져 있어서 우리가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주어진 날들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가치가 있고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좀 더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행복한 시간들을 꿈꾸며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욕망을 따라 자연히 의학이 발전하여 왔다.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것은 질병때문이라고 보고 질병을 치료해 주면 수명은 훨씬 더 연장될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수명을 훨씬 더 연장시켜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수명 연장은 단순하게 의학의 발달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삶의 환경이 개선되고 그 질이 향상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며 경제가 많이 향상되면서 전반적으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되었다.

          인류의 평균수명은 1900년 당시 47.3세에서 2000년에는 77세로 100년사이에 30년 가량이나 늘었다고 한다.

 

          2012년 세계인구 현황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현재 남한의 평균 수명이 여성은 84.0세 남성은 77.3세이고

          북한은 여성이 72.1세 남성은 65.9세로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고 경제가 나아진다 하더라도 인간의 수명은 120세가 그 한계라고 말한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는 노인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고 치매를 비롯한 각종 질병과 노인들의 시달림으로

          가정에는 무거운 짐이 되고 있다.

          장수가 우리에게 더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장수는 현대인들에게 무거운 짐만 되고 있다.

 

          인간의 수명을 아무리 연장해 보아도 인간은 그 한계를 극복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연장해 보려고 자식을 통해서라도 끝까지 희생하며 기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효(孝)를 중시하여 왔다.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때 그것은 그가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비결이라고 가르쳐왔다.

          동양에서도 특히 자식들은 자기 생명을 연장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어왔다.

          사람들은 아들을 귀하게 여겼으며 아들을 낳지 못할 경우 양자를 들여서라도 자기의 대를 이으려고 하였고

          대가 끊어지면 큰 불행으로 여기고 소실(小室)을 들여서라도 아들을 낳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상들은 옛날만이 아니라 오늘날에는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은 자기의 대를 이어가고 있다.

          재벌들은 오늘날에도 자기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기 위하여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다.

          가진 자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국세청을 따 돌리며 상속세를 적게 내고 그 부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정치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하게 일자리문제만을 놓고 보더라도 정치인들은 자기 자식을 위하여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모든 인맥등을 다 동원하여 자기 자식을 좋은 자리에 앉히고 수명 연장을 계속해 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종교계등은 더욱 비난 받아야 하고 개혁되어야 할 신의 영역과도 같은 곳이다.

          그런데 종교계들은 이런 신의 영역을 제멋대로 침범하여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자기가 자리에 있을때는

          자식들에게 매달 예산에서 꼬박꼬박 유학비를 보내주고 자리를 보장해주며

          자신의 은퇴후에는 자기의 자리까지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래도 가장 정직하고 존경받아야 할 종교계가 가장 거룩한 척 종교를 빙자한 사기행각이나 도박,

          교리를 앞세워서 배척하거나 신을 앞세워서 사리사욕을 챙기는 부정한 행위들은

          영원히 종교계에서는 추방시켜야 할 올바른 정의이다.

 

          이런 노력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잘못된 것인가를 역사는 우리에게 잘 깨우쳐주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자식들은 매일같이 자기부모의 잔소리와 잘못을 보고 염증을 느끼며 싫다면서 대들기가 일쑤이다.

 

          당신은 종교인의 집안에서 자식들이 불량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자식을 통한 자기의 실현이란 것은 한낱 우리의 소망일 뿐이다.

          자기의 삶이 따로 있고 자식의 삶이 따로 있어서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각각 자기의 삶을 바르게 하여

          따스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이슈와 진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사회의 두 계층  (0) 2013.10.29
댓글과 이상한 시선들  (0) 2013.10.28
인격(人格)과 명예(名譽)  (0) 2013.10.21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겠습니까?  (0) 2013.10.15
사회가 불안해 질때는  (0) 2013.10.11

 

 

 

 

                  인격(人格)과 명예(名譽)

 

 

 

 

              우리 인간에게는 귀중한 것이 둘 있는데 그것은 인격과 명예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명과 자유와 재산이 소중한 것처럼 인격또한 매우 중요하다.


              그리하여 사람이 인격에 손상을 입는 것은 권리를 침해당하는 것이며 나아가 사회적인 범죄를 당하는 것이다.

              인격이란 한 인간이 처해진 지적, 사회적, 도덕적 상황에서의 모든 됨됨이를 말하는 것이다.

 

              인격은 그 사람의 부()와도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인격은 현재와 장래의 삶에도 가장 중요한 재산이 된다.


              사람은 금을 주고도 인격을 살 수가 없다.

              인격은 모든 자연의 법에 순응하고 하늘이 그에게 내려주는 천상적인 능력과도 같은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은 그의 인격을 파괴시키려는 외부의 어떤 공격을 방치하였기 때문이다.

              인격이 그 사람이 지닌 내적인 능력이라면 명예는 그의 외적인 능력일 것이다.

 

              명예는 그 사람의 인격인 살아온 깊이, 넓이, 됨됨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일반적인 명예는 여론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만일에 명예가 좋고 옳은 것이라면 그 명예는 자신에게 부와 존경과 행복의 근원이 된다.

 

              인간은 누구나가 성공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역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존경을 받아야만 한다.

              기술자가 기술에 능수 능란하고 어떤 일에든지 재주가 뛰어나면 그는 어디에서나 인정을 받는 것처럼

              사람이 명예를 얻게되면 경제적인 부도 자연히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남의 명예를 헐뜯는 것은 그 사람의 재물을 갈취해 가는 강도와도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닌 명예는 과연 어느 만큼이나 남아 있을까...

              친구나 모든 이웃에게도 과연 존경을 받고 있을까...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터 이 갈망을 원하였고 자라면서 부터는 칭찬받기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오늘도 이 명예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들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더럽힌다면

              그는 사회적으로도 온갖 비난과 지탄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는 그의 앞 길을 가로막는 비겁한 일이며 그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잔인한 사람이고

              그의 명성을 깎아 내리려는 불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예훼손이라고 해서 다같이 나쁜 것은 아니다.

              정의와 질서회복을 위해서 잘못을 들춰내는 것은 명예훼손이 아니다.

              오히려 죄를 덮어주고 들춰내지 않는 것은 그들도 그 죄에 가담하여 공범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정당방위로서 다른 사람의 죄를 고발하는 것도 명예훼손이 아니다.

              이는 가해자가 바뀌어 부당하게 죄 없는 사람이 고발당하고 죄 있는 사람은 오히려 의심하지도 않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는 얼마든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을 할 때에는 신중하게 어떤 증오심이나 이익만을 따라서 공개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신은 우리 주변에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국회 싸움이나 언론의 자유들을 한번 살펴보라

              얼마나 남용이 되고 있는지, 오로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만 방영되고 있지는 않는가

 

              단 한 가지의 행동만으로는 그 사람의 전체인격을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금한 선한 일을 가지고 성급하게 그 사람을 띄워 일약 스타로 인정할 수없는 것처럼

              단 한번의 실수만으로는 그의 인격을 무시할 수가 없다.

 

              인간을 바라볼 때는 평가자의 마음 자세에 따라 모든 편견을 버리고 정직하게 먼저 양심이 따라야 할 것이다.

              반쪽 진실이란 처음부터가 없는 모순된 말이다.

              사실을 제시할 때는 어느 한 쪽에만 치우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오직 진실을 규명하는데만 마음을 쏟아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 사회에 과연 올바른 눈, 올바른 비판이 있는가?

 

              사실의 정확한 문맥과 정황은 보지않고 제대로 된 눈이나 평가또한 보이지 않으며서

              무조건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여론만 살피면서 할 수없이 수사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여당은 여당대로, 언론은 언론대로, 검찰은 검찰대로, 군부는 군부대로, 모두가 정부와 뜻을 같이하고

              야당과 시민 단체들은 행여나 자기도 다칠까봐 몸을 사리고 

              부정을 바로 잡아야 할 사람들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관망만 하고있다.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

 

              사람의 성격은 각양각색이어서 어떤 사람은 이해하기가 매우 쉽지만

              어떤 사람은 그의 심중을 도저히 헤아리기가 어려운 경우도 많다.

              사람들은 너무도 간사해서 주장하기를 무엇이 이루어지면 자기들의 업적이라고 계속해서 늘어놓고

              무엇이 실패하고 나면 그 모든 책임을 남들에게만 떠맡기기 일쑤이다.

 

              말이란 항상 그에 상응하는 대응효과를 수반하고 남의 험담과 욕은 다시 험담자에게로 화살이 돌아온다.

              불의에는 좀더 엄한 훈계와 선행에는 마땅한 칭찬과 격려로써 사람을 대하면서

              이 세상을 보다 공정하고 바르게 이끌어간다면 이 세상은 모두가 잘사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있을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얼마나 더 가져야 만족하겠습니까?

 

 

 

          톨스토이의 동화 가운데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바흠이라는 농부는 항상 비옥한 넓은 땅을 갖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따라 간 어느 고장에서 그는 드디어 넓은 땅을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 고장에서는 땅을 하루치에 1천 루불리로 팔고 있었습니다.

          하루치란 사람이 하루 종일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농부는 흥분했습니다. 그는 밤잠도 설친 채 아침해가 돋자 바로 출발을 서둘렀습니다.

          단지 조건은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되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욕심껏 걸었습니다. 간밤에 잠을 설친 데다가 뜨거운 땡볕 아래 피곤하여 좀 쉬어야 하겠지만,

          한치라도 더 갖고 싶은 욕심에 계속 걷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장차 얻을 땅을 생각하며 기진 맥진하며 쉴 사이 없이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는 해질 무렵이 되어 자신이 출발하였던 지점까지 돌아오기는 하였으나 그만 거기에 엎드러져 피를 쏟고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하인이 그곳에 여섯 자의 땅을 파서 그의 시체를 묻어 주었습니다.

 

         "사람에게는 어느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정답은 바로 여섯자 땅이었습니다.

          이 동화는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으며, 그 결과는 얼마나 비참한가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탐욕으로 끝없이 치닫고있는 오늘의 문명에 대해 경고를 하고있는 동화입니다.

 

          인간의 절제할 줄 모르는 끝없는 욕망으로 죄가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절제는 다른말로 Self-control 즉 자제(自制)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기를 통제(統制)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많은 욕망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첫번째가 식욕은 아닐까요?

          식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 가운데 하나입니다.

 

          보릿고개 시절 우리는 실컷 배불리 먹어 보는 것이 우리의 큰 소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너무 많이 먹어서 탈입니다.

         가는 음식점들마다 무한리필을 선언해야 사람들이 몰려올 지경입니다.

          해마다 버려지는 음식 쓰레기가 일반 쓰레기의 30%를 차지하고 있고, 이것을 돈으로 환산하면 8조원이나 된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양의 과잉 섭취는 노화를 촉진시킨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정상적인 유전인자가 암인자(癌因子)로 변질되기가 쉽다고 하였습니다.

          동물들은 대체로 먹을 만큼 먹으면 더 이상 먹지를 않는데, 인간만은 그렇지를 못하여 마구 먹으며 소비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먹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면서도 그것이 지나치면 사람은 병들고, 사회적으로도 먹지 못하는 자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지금도 북한의 동포들은 굶주리고 있는데, 저 아프리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한국은 경제성장을 과시라도 하는 냥 음식을 마구 버리고 있는 것은 큰 죄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적게 먹으며 건강을 유지하고, 남은 것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도 골고루 나누어 준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일까요?

 

          다음으로 문제되고 있는 것은 소유욕입니다.

          무엇이든지 가지려고 하는 욕망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큰 집을 갖고, 땅을 사며

          고급 승용차에 비싼 가구를 들이며 밍크 코트를 입고 다니면서 자기를 과시하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그냥 놓아두면 한라산처럼 설악산처럼 모두가 다 누릴 수있는 아름다운 명산으로 남아있기도 하겠지만

          사람들은 어찌하여 자기가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왜 그렇게 싸워야만 할까요?

 

          공동체 생활에서 어느 한 사람이 많이 갖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의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고

          그것은 결국 그 공동체의 와해(瓦解)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인간의 정욕과 명예욕과 권력욕은 우리 사회의 질서를 심각하게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려는 것은 단순히 과소비를 줄이고, 우리 경제를 살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 사회의 도덕성과 사회 정의를 바로잡고 모두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사회가 불안해 질때는

 

 

 

      오늘날의 21세기는 두 차례의 대전과 온갖 전쟁으로 20세기와는 다르게 좀 더 평화롭고 밝은 미래가 오기를 희망했는데

      우리의 바람과는 다르게 테러와 전쟁으로 얼룩져 우리의 미래를 더욱 더 어둡게 하고 있다.

 

      21세기는 어쩌면 20세기 보다 더 불안한 세계가 될 지도 모른다.

      동서 냉전의 시대에는 모두가 소련만 무너지면 세계가 평화를 누리게 될 줄만 알았는데

      그 시대의 선이었던 미국이 지금은 완전히 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제 기분대로 오늘의 세계를 더욱 더 불안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난 9·11 테러 이후 미국 사람들이 교회를 많이 찾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어쩌면 그들도 이 땅의 삶이 행복한 것만이 아니구나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일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는 매우 불안하다. 어떤 사태가 또 우리 앞에 닥쳐 올는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모든 나타난 징조들만 보아도 결코 희망적이지 못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가장 불안한 지역에 살고 있다.

      남북간의 대치가 어떻게 풀려 나갈는지 아무도 알 수없고 경제 문제, 일자리 문제등은 가뜩이나 어려운 가정살림에

      국민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현 정권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수많은 대선 공약들이 줄줄이 수정되는가 하면

      국민들을 위하여 부름받았던 많은 인사들은 하나같이 정치싸움에만 여념이 없다.

 

      지난 정권말기 온갖 부정과 불의로 위태로웠던 수구세력들이 집권하며 간신히 살아나자 더욱 더 기세가 올라

      자기들의 기반을 강화시키고 이념대결을 부추기고 있다.

      현 정부는 정부대로 집권당은 집권당대로 기싸움에만 매몰되어 국민들과는 소통이 전혀 이루어 지지않고 있다.

 

      우리는 지금 엄동 설한에 살 얼음판을 걷고 있는 사람처럼 모두가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굳게 딛고 나갈 땅이 없다.

      우리의 삶을 세워 나갈 든든한 기초가 필요하고 믿고 의지할 수있는 대상이 절실하다.

      이 든든한 삶의 기초, 믿고 의지할 수있는 대상을 발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으며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욕심을 따라 점점 무관심해져 가는데 있다.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싸우든지 말든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다.

      행여나 자기도 다칠까봐 멀리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 할 것없이 누구 한 사람 뜯어 말리는 사람이 없다.

      선생이라고 다 같은 선생일까... 의식이라야 공부하는 것들 밖에는 모르는 것을...

 

      지금 우리의 사회가 몹시도 불안하여 사람들은 편히 마음놓고 잠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의를 보면서도 말로만 외쳐댈 뿐 누구 한 사람 나서려고도 들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두려운 적은 바로 스트레스이다.

      날마다 찾아오는 이 스트레스로 우리의 심신은 날로 피로하고 자신도 모르게 큰 병에 걸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스트레스를 없애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 시간이 되어 한강에 나가보면 사람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의 행렬이 멈출 줄도 모르고 

      서서 가는 사람들은 살을 빼느라 헉헉대며 달려가고 있다.

 

      왜 이렇게 우리 사회가 불안과 염려로 호들갑을 떨게 되었을까?

      우리의 불안과 근심의 대부분은 자기만을 생각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남들보다는 자기가 더 잘되어야 한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불안과 욕망을 바꿀 수있는 비결은 다른 생각으로 그 근심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마치도 문제가 터질 때마다 다른 사건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고 있는 정치권의 모습과도 같은 것이다.

 

      지난 번 국정원의 대선 불법개입으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드디어 수사에 착수를 하자

      그 동안 감춰져 있던 국정원의 범죄가 조직적으로 가담되었다는 사실이 하나 둘씩 드러났고

      왜 갑자기 그가 자리에서 그만 물러나게 되었는지를 국민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NLL 대화록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은 NLL 대화록등을 가지고 여기 저기 다니며 단물, 쓴물 다 빼먹으며 실컷 이용해 먹고서는

      지금에 와서는 국정원장조차도 지난 정부의 일이지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NLL 대화록을 가지고 이제는 그 원본을 놓고서 서로가 사초니, 삭제니를 가지고 몇날을 계속하여 물고 늘어질 태세다.

 

      사회가 불안하면 할 수록 우리들은 자기 일에 더욱 충실하며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때이다.

      마음이 불안하고 염려를 하는 사람들에게 사랑만한 관심이 또 있을까?

 

      사랑이란 말은 바로 자기를 희생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모두가 받으려고만 하지 자기 몫을 챙기기에 여념이없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욕망으로 가득찬 마음에 사랑이 자리잡고 있으면 결국 모든 사물을 새롭게 볼 것이며

      사람들은 과거와는 다르게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기독인들의 올바른 천국이해

 

 

 

 

 

 

어느 날 아내와의 약속으로 서울 명동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신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명동의 한 중앙에 서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며

"예수 믿으세요, 예수믿고 천당가세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말이 없는데 그 일행들은 전혀 신경 쓰지않고 더욱 더 소리를 높여가며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그의 발 밑에서는 몇 개의 병이 놓여져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의 온 몸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성경의 공관복음에 보면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는(마태복음37회,마가복음14회,누가복음32회) 각각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교훈이 막1:15에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는 것이고

마4:17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임을 뜻하며 예수님의 교훈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잘못 생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당(天堂)이라 부르면서 궁궐같은 집을 연상하며 천국은 마치 죽어서 가는 좋은 곳이라고 믿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에는 동양의 유토피아인 무릉도원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極樂世界)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이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서 세운 일종의 지상낙원이라고 믿고

또 어떤 이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인간의 응답과 복종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것들과는 관계없이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에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종말론에 빠지는 것은 처음부터 복음의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고난과 십자가의 부활이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구원관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절대 신뢰보다는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이 끼어들 틈을 만들고 신앙결핍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면서도 그대로 되리라고 믿지는 않고 (막11:24 ),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일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자기주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과거 교회의 복음은 '예수믿으면 천당간다"는 신비주의에 가까왔습니다.

예수 믿으면 무엇이나 잘 되고 복 받는다는 말로 확대되어

가난과 고난에 찌들린 사람들에게 이 소리는 매력적이고 기쁜 소식이 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예수만 믿으면 천당간다니 이렇게도 쉽고 좋은 종교는 세상에 다시 없는 종교일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사로잡혀 영혼도 구원받고 사업이 잘되며 건강도 지킬 수 있다는 희망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모든 주류가 되어 교인들로 하여금 받을 생각만하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약화시켜 놓았습니다.

 

마6:31-33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은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 나라에 두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그것을 실천해 나갈 때

영혼의 만족과 평안과 인간의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이 곳에 임하여서 내가 그 일을 하여야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자기가 죽어서 이 다음에 천국 갈 궁리만 하고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이 교회들로 하여금 현실을 외면하고 세상을 비추어야 할 사명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숫자가 전체인구의 20%가 넘으면서도 왜 우리사회가 혼란스럽고 무질서가 팽배하며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바로 교회가 현실을 기피하고 사후에 갈 천당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요?

성경에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었을 때 그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처음듣는 생소한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구약시대때 부터 전해져 온 천국이란 개념은 어떤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것,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주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천국은 지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임하여 오실 때에 완전하게 실현된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에서 메시야 사상이 나타났고 이 메시야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맡겨짐으로 그가 임하시면 천국은 실현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신 후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셨다고 하신 것은 구약에서 예언된 하나님의 나라가 구체화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모든 생애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며

그 분이 행하신 이적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온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눅17:20-21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찾아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을 때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의 징조로서 볼 수있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대인 묵시 문학가들은 말세의 징조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이 특색입니다.

그들은 제 멋대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메시야의 저주"등을 운운하며 세상의 질서와 세계파멸을 떠 올렸습니다.

그 까닭은 현세는 악의 세력이 통치하여 메시야 통치가 시작되려면 이런 파괴와 혼란이 있어야 된다고 믿으며

그들은 시대의 징조에 관심을 가지고 천국이 볼 수있게 오는 것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과거에는 이 말이 신비적으로 해석되어 많은 논란을 가져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너희"란 복수형이며 "안"이란 "속"이 아니라 "사이에"(in your midst), "가운데"(among)란 뜻으로

사람들 가운데에 서 계신 예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역사속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임재(臨在)는 권세와 영광으로 올 것을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런 예수를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징조와 뚜렷한 권세들로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이런 기대를 가진 사람들에게 천국의 설명으로 겨자씨를 비유하였습니다.

겨자씨는 땅에 심기울 때는 모든 씨보다 작지만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무보다 커지며 새들도 날아와서 깃들인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잘 보이지도 않는 지극히 작은 겨자씨의 형태로 임하여 온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나라이 임하옵시며"(마6:10,눅11:2)란 뜻은 미래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장차 아름답고 화려하게 임하여 올 미래의 나라는 고난을 헤치고 성장해 간 결과이며

요한계시록이 보여준 새 하늘과 새 땅은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들의 피로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의 표현입니다.

오늘의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미래의 영광된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더 이상 아무 변화도 없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생명력이 있고 역동적(力動的)으로 변화하는 나라입니다.

이 생명이 자라는데 방해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떤 방해세력도 이 나라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늘날 이 역사속에서 계속 뿌리내려가며 자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 땅위에 임하였고 이미 시작되었으며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으로 초대된 가족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생명력을 받았음을 뜻하며 그에게 할 일이 많고 그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생명력이 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고난에도 굴하지 않으며 더욱 강인(强靭)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확립되고 이 사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있도록

책임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선포해야 할 책임이있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기독인들의 올바른 사회참여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집니다.

              낙엽이 져야 그 이듬해에 새 잎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잎이 떨어진다고 말을 합니다.

              그것은 떨어지는 잎을 중심으로 생각한 것일 뿐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표현도 가능해집니다.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무는 때가 되면 미련없이 버리고 포기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그 다음해에 더 생명력있는 에너지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고

             (요21:1-5)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 그들을 도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였을 때

              많은 고기가 잡혔다는 말이 있습니다.(6)

 

              고기잡는 사건은 곧 사람을 낚는 선교의 사명임을 암시하며

              선교의 수행은 언제나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해주는 내용입니다.

             (눅5:1-11)(요21:1-14)

 

              하나님의 사역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경험, 그 수단과 방법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간이 잘한다는 일들이 결국은 모두가 어리석고 실패투성이며 이 세계를 파괴시키는 꼴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정치는 하는 일마다 국민을 우롱하고 실망케하며 우매한 처사들만 계속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치하는 사람이나 종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오직 사람에게만 충성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그의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결코 전도(傳道)에만 국한되는 일이 아닙니다.


              선교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저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이끄는데 있습니다.

              작게는 개개인에게 전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일이요,

              크게는 이 사회전체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선포하여

              그 뜻에 합당한 정치,경제,문화가 올바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나서는 일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사명은 개개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데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 전체를 향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데 있었습니다.

              예언자의 사명은 그 당시 사회의 종교적인데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 사회전반의 정치,경제,문화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될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교회의 예언자적인 사명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혼란스럽고 갈등과 분열이 나타나며 안정되지 않는 까닭은

              이 사회가 모두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판단과는 그 성격이 매우 다릅니다.(요6:40)

              그것이 비록 정당한 일 같이 보이지만 예수께서 보실 때는 하나님의 참 뜻을 거스리는 불행을 초래합니다.

 

              마16:22에서 예수께서는 그의 수난을 앞두시고 하나님의 뜻을 저 버린 베드로를 가리켜 "사단"이라 칭하시며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책망하셨고

              마 26:51에서도 무리들이 예수를 잡으려 할때 베드로가 검으로 "말고'의 귀를 자르자

              예수께서는 귀를 도로 붙여주시며 "검은 다 검으로 망한다"는 진리의 원칙을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이 볼 때에는 베드로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고 칭찬 받기에 충분할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뜻이 아닌 행동은 만용에 불과하며 이러한 행동은 영웅적인 방종만 초래할 뿐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이외의 행동은 항상 그 열정에 망신으로 끝남을 명심하라"고 지적한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리고 그것을 거스리는 모든 세력은 마치 적그리스도와 같은 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사명은 바로 이러한 적그리스도와 맞서 진리를 선포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는데 있습니다.

 

              위에서 "한 마리도 고기를 잡지 못하였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며 선교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선교의 명령이며

              선교는 어떻게 기적이 일어나고 선교의 사명은 무엇인지 잘 가르쳐주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국민들 속에 스며든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뜻을 따를때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권고하시는 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항상 알려진 모습 그대로 오시지는 않습니다.


              전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사명을 깨닫게 하시는 분입니다.

              엠마오상의 그 두제자 처럼, 갈릴리 해변의 그 때처럼

              예수는 낯선사람으로 다가와 마음을 뜨겁게 하고 경이(驚異)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4)

              비록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순종할때 기적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도 낯선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에게 "그물을 던지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명령을 따를 때에 많은 갈등과 고민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동안 우리가 아무리 그물을 던져도 헛수고뿐이었지만 한번 더 그 뜻에 순복할 때 기적은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던져야 될 그물은 무엇입니까?


              한 사람, 한 생명도 중요합니다. 가난한 이웃들과 지역사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만연된 불의를 몰아내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루는 일 역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사명입니다.

 

              우리는 밤새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정치문제에 관여하느냐고 말들을 합니다. 정치가 부패하면 사회전반이 영향을 받습니다.

              거짓과 불의가 만연된 이상 이 사회에 영향을 주고 교회가 그것을 방관만 한다면

              도저히 이 땅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는 그 정치속에 깃들인 거짓과 불의와의 싸움이지 정치에 속해서는 안됩니다.

              큰 교회들을 너무 부러워하지 마십시요. 교회가 큰 만큼 그 책임또한 무거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들이 오늘의 상황에서 무엇을 하였느냐고 예수께서 물어보신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이라고 대답 할까요?

 

              과거에는 단순히 교세확장과 기싸움으로 성경의 왜곡이나 교리등을 가지고 모두 이단이라고 했다면
              현대에는 자기가 교주가 되거나 멋대로 성경을 적용하는 자들입니다.

 

              엘리 제사장의 두아들처럼 어떻게 부모가 살아왔길래 자식들이 그렇게 되었을까요.

              교인들은 어떠한 눈빛으로 자신의 지도자들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교회는 이 사회에서 깨어 일어나 다시 일해야만 합니다.

              이제 깨닫지 않으면 이 나라는 더 이상 구제받기 어려운 위기속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분을 알아뵙지는 못하여도 어딘가에서 우리를 지켜보시며 "그물을 던지라" 격려하시고

              많은 기적과 위로로 이 나라를 분명히 지켜 주실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기다림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보다는 내일을 기다리며 더 나은 미래를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몇 차례의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중동전쟁을 목격하면서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더욱 희망을 갖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언제나 실망만 가득할 뿐 한번도 우리에게 만족을 주어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세계를 더 살기 좋게 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오히려 환경 파괴라는

                 더 무서운 재앙을 낳아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새로운 과학을 꿈꾸면서

                 장차 정보시대가  열리면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오늘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정한 목표와 이상이 궁극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에

                 언제나 그곳에 도달하였을 때 큰 실망을 맛보게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시대가 바뀔 때마다 오히려 더 큰 혼란과 가치관의 변화로 고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처음부터 민주주의에 의한 정의로운 사회를 갈망하고 있기에

                 이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새로운 정부가 탄생된다 하더라도

                 그 가치관과 윤리를 마음대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처음부터 살기 좋은 정의로운 사회 건설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지식을 배우며 과학의 발전에 기여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처음부터

                 과학을 통한 낙원의 건설이 아니라 그 과학 속에 있는 정의를 실현해 나아가려는 것이었습니다.

 

                 과학의 발전 자체가 나쁜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화되지 않으면 발전된 과학은 무서운 무기가 되어 사람들을 살육하고 자연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과학뿐만이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종교등 모든 삶속에서 정의가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진정한 사랑은 그가 태어났을 때나 그가 장성하였을 때에 한결같아야만 합니다.

                 어렸을 때 사랑이 다르고 자랐을 때 사랑이 다르다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 자식이 자라면서 많은 변화를 이루지만 그 변화와 관계없이 부모마음은 한결같은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궁극적인 것입니다.

 

                 막연한 소망, 불확실한 기다림만으로는 삶이 바르게 세워질 수가 없습니다.

                 언론이나 지도자들이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우리는 잘 할 수 있다"고 막연한 희망을 보내지만

                 잘 할 수있다는 그 근거가 모두 확신할 수 없는 내용들뿐입니다.

 

                 확실한 소망, 분명한 기다림만이 어느 때나 흔들리지 않고 바르게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소망이란 단지 오늘을 포기하고 내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란 오늘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며 정의를 위해 한결같이 살아가겠다는 삶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잘못된 종교나 이념에 빠져드는 것은 처음부터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치도 종교인들의 종말론처럼 처음부터 복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전혀 엉뚱하게 행동하기가 쉽습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 서로를 잘 알고 사랑하게 되면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겨납니다.

                 그리할 때 아무리 서로가 멀리 오래 떨어져 있어도 그 사랑이 변하지 아니하며 그 신뢰도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설픈 감정에 의한 사랑은 곧 오해가 생기고 신뢰도 깨어지게 마련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맘대로 상상하고 기다리게 되면

                 언제나 그 기다림은 실망으로 이어져 마침내 사랑의 관계는 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날의 정치와 경제, 과학들은 우리에게 헛된 기대만을 잔뜩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른 대안들이 없기에 또 다시 속을 줄을 알면서도

                 정치에 기대를 걸고 경제에 희망을 걸고 과학의 발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난 국정원의 대선 불법수사가 이루어진 지 수개월이 지났건만

                 아직까지도 우리 정치권들은 저들의 눈치만을 살펴보며 계속 기다려보자고 말들만 하고 있습니다.

 

                 사회안에는 끝없는 이념 논쟁과 수사 갈등으로 종북타령과 개인 흠집 내기에만 열을 올리고

                 말로는 경제가 어렵다, 살기가 힘들다고 하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미국에게 천문학적인 돈을 갖다 바치며

                 첨단무기를 들여오고 있는 이 나라가 지금 제 정신이나 있는지...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 아이들은 당장에 급식문제와 무상보육으로 그만 중단되게 생겼는데

                무엇이 더 우선 순위이어야 하는지 국가는 진정 알고나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슨 꿍꿍이들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공연히 낙심만 할 것이 아니라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문제를 바로잡으며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