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부끄러움을 알아야지

 

 

 

                       지난 2013년 8월 1일 목요일 저녁, 우연히 TV를 보다가

                       난 너무 놀라 그만 뒤로 자빠졌다.

 

                       미개인(未開人)이나 타락한 사람들이 감행할 만큼 불륜을 통한

                       어떤 남녀들의 혼외정사(婚外情事)가 실제로 한국에서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은 지난 2001년 청와대 만찬에서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은밀한 밀어를 즐기면서 아무도 몰래 미국으로 건너가 자식을 낳고

                       양육을 약속하고 후일을 기약한 채 태연하게 국내로 돌아왔다.

 

                       그로 부터 세월이 많이 흘러 서로는 말이 없고, 돈도 약속도 말이 없다.

 

                       언론은 놀랐고 국민들은 더욱 더 증오하였다.

                       어떻게 대교회의 집안에서 그것도 성직자의 장남으로 음란한 생각을 가졌을까...

                       여자의 수치는 얼마나 알았는지...

 

                       이미 여자에게는 엄연히 남편이 있고 남자에게도 고운 아내가 있었건만

                       누가 보아도 서로는 가진 것이 철철 넘치는데 아직도 필요한 것이 남았을까...

 

                       성(性)일까? 돈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그렇치 않아도 우리 사회는 눈만 뜨면 성범죄로 도덕은 땅에 떨어진 지 이미 오래이다. 

                       청와대 윤창중 대변인은 지난 대통령 방미중에 성범죄로 한국을 세계만방에 알렸으며

                       고려대는 교수나 선배할 것없이 성범죄로 과연 이 학교가 민족 사학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대체 누구인지 우리의 가진 자요, 권력자요, 종교인이 아니던가?

 

                       성경속의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그 아비는 대체 누구시길래

                       저리도 자식의 흉한 몰골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대한단 말인가?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교육인가? 아니면 대교회의 교리인가?

                       왜 보수자들은 자꾸만 성범죄에 눈 흘기며 문제를 감추고 언론을 단속하며

                       국민들에게는 또 무슨 염치로 도덕을 운운하려고 드는가?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국가에게 미치는 지도자의 영향력

 

 

               어느 민족, 어느 시대에든지 국가를 책임지는 지도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어느 분야이든지 국민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이다.

 

               국가의 지도자가 되면 먼저 국민들을 잘 살 수있게 하기위해 보다 많은 국가 정책들을 내 놓는다.

               경제나 복지, 교육이나 기술등 나라의 안정에도 결코 소홀히 할 수없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가 나라의 평화와 발전보다는 자기 욕망이나 사치와 낭비, 무모한 권력투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고 만다면 국민들로 부터 신뢰를 받기는 매우 힘들다.

 

               정치와 경제의 필요성은 많은 사람들의 생과 사,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이기에

               같은 국민이라면 어서 빨리 나라가 안정되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랄 것이다.

               비록 임시적이고 제한적이지만 규제와 사회적연합은 삶의 조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상징이 된다.

 

               우리 역사를 볼 때 전쟁과 파괴, 갈등과 분열은 결국 인간의 욕심에서 기인된다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새삼스럽게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래를 생각할 때 이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한 바탕 꿈인데 과욕을 너무 부리지 말고

               정의가 깃들인 먼 곳을 내다보며 천천히 아름답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가치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지각있는 사람들의 의식이다.

               이런 사람만이 고귀한 것과 숭고한 것을 창조할 수있다. 이와는 달리 국가는 사상이나 감정에 있어서는 전혀 둔하다.

 

               한국사회를 보더라도 집단은 있어도 개인이 없는 그래서 창조와 자유와 사랑이 결핍된 사회로 나가고 있다.

               특히나 우리 사회의 정치,경제,문화,사회,종교는 "성장 신화"에 가로막혀 아직도 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자기 이익에만 눈 어두워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권력과 스스럼없이 타협하고

               불의인줄 알면서도 온갖 나쁜 악습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다.

 

               사회는 사회대로 대립하고, 언론은 언론대로 눈 어둡고, 종교는 종교대로 갈등이 팽배하다.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를 바라보듯이 기독교는 예수만 바라보며 그 삶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교는 부처만 바라보고 자기를 살피는 것이며 언론은 정직한 눈빛으로 사회를 밝혀주며

               국가는 국민들에게 힘과 희망이 되어주어야 한다.

 

               성장신화란 막연히 억지로 내가 세운다고 세워지는 것이 아니다.

               자기 본분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 성장, 그 기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더욱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과도한 군비증강은 마치도 사람에게 강도가 불안하여 무기를 소지하라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있는 것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면서 자꾸 교체하고 만들고 자꾸 소비하는 것은 결국은 파멸뿐이다.

               길 가에 자동차가 많아지고 자주 팔린다는 것은 그 만큼 도로를 많이 만들고 사고도 많이 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농지가 사라지고 아름다운 경관이 파괴되며 환경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시대의 환경문제는 이해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느냐 죽느냐하는 중대한 사활(死活)의 문제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라면 더 이상 자기 일이나 국가의 이익보다는 당장은 정치적, 경제적 손실이 따른다 할지라도

               먼저 인류와 우리 후손들을 내다보며 행복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평화란 단순히 힘이 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대국의 힘은 강대국 스스로가 그 힘을 자제할 때 세계는 자연히 평화가 이루어 질 수있다.

 

               미국의 군비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막강하다.

               연방정부가 사용하는 예산중에 43%가 국방비로 쓰여질 정도이다.

 

               미국의 군비는 해마다 증강되어 핵무기가 2만5천기, 병력이 200만명, 거대함선이 500척, 군용기가 1만기

               국내기지 400여개, 군사기업 2만여개 지금도 그 숫자는 계속해서 증강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세계경찰을 자임하며 유럽에 10만명, 중동에 2만5천명, 한국에 3만7천명, 일본에 2만명등

               전 세계 600여 기지에 20만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경제가 과거보다는 많이 침체되고 어렵다는 것은 세계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미국인들은 이같은 군사비를 쓰면서도 거의 신경을 쓰지 않도록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세계 공황당시 루즈벨트가 방대한 군사투자를 통해 불황의 늪에서 미국경제를 복구했던 사실을 잘 기억하고 있다

               그 이후 미국인은 전쟁이 나면 정부가 무기증강을 하여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는 신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 것이다.

 

               현대 전을 대비하려는 어떠한 무기라도 그것이 실전에 배치되면 또 다시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신속하게 무기교체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상에서 군사무기보다 낭비가 심하고 가격이 터무니없이 한심스러운 것도 또 있을까...

               근대 무기는 아무리 거액을 투입해도 곧 폐물이 될 숙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항상 진리는 정치적인 진리와 상응(相應)하기 마련이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는 우선권을 놓고 국민이 먼저냐, 정부가 먼저냐하는 싸움을 오랫동안 지속해 왔다.

 

               그리하여 나라에 어떤 지도자가 나오고 어떤 정당이 집권하며 어떤 정책이 채택되느냐에 따라

               국민의 자유와 삶도 차이가 나며 최대 관심이 되고 말았다.

 

               정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논리나 국민들은 그저 정부만을 믿고 아무소리 말고 조용히 따라오라는 소리나

               무엇이 옳은 말인지 권력자의 말 한마디에 그 입장이 달라질 수도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고통과 질병에 직면했을 때에야 비로서 목숨이 천하보다도 귀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인간이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세상을 살아갈 때 세상의 고통과 질병들은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인간은 세상의 어떤 값진 보물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간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말을 할 뿐 가슴속 깊이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인간의 제도들은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고 도와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국가의 지도자는 국가보다는 국민을 더욱 잘살 수있게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안재자와도 같은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범죄자를 자꾸 양산하지 말라.

 

 

 

                우리는 가끔씩 책이나 TV를 통해서 범죄추리같은 소설이야기들을 대할 때가 많다.

                그럴 경우 소설은 매우 흥미롭고 감동을 주기에도 충분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우리는 소설을 읽듯이 범죄자를 마치 동물원의 야수와 비교하며 미리 낙인을 찍어 놓는다.

                그리하여 그의 죄가 입증되어 사실로 알려질 때면 사람들은 열을 올리며 그에게 돌을 던지기도 하고

                그에게 어떤 자비나 동정을 가져서도 안될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는 어느 새 그에게 짐승이라고 표현하며 행적을 들춰내고 비난 전에 가세한다.

                그리고는 소설책을 덮듯이 또 다시 흥미거리가 생길 때까지 단조로운 일상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자세이며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 모든 범죄자들은 어느 정도 그가 살아온 환경에서 낳은 산물이다.

                마치도 가정과 공장에서 버린 폐수가 하천을 오염시키는 것처럼

                사회의 어떤 현상들은 반드시 범죄의 발생을 유도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처한 환경때문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가며 받게 되는 환경의 지배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범죄의 늪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쁜 환경을 자꾸 만들어 내는 사람은 누구이며 나는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자기들이 저질러 놓은 잘못으로 이 사회의 범죄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범죄는 반대로 자기가 들이마시는 공기처럼 자기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모든 범죄는 인간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지 왜 발생하는 지를 제대로 가르쳐준다.

 

                만일에 누군가가 범죄로 시련을 겪는다면 그것은 우리들 또한 그와 함께 시련을 당해야 한다.

                만일에 가난한 자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보다 많은 결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환경이 우리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들 또한 깊이 반성하고 뉘우쳐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 더 이상 가혹하거나 함부로 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은 만인앞에 공평해야 한다.

                강자보다는 약자에게, 가진 자보다는 소외된 자들에게 법은 더욱  절실한 것이어야 한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란 말과 같이 자신에게는 그토록 인정을 말하면서 남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힘 있는 권력자들앞에서 힘 없는 범죄자들은 늘 불만을 토로할 뿐이다.

 

                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서 다른 사람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겸손함도 가져야 한다.

 

                학교와 소년원, 방송국에도 부지런히 찾아가 캠페인을 펼치고

                범죄자들의 교화를 위해 입법에도 대거 참여하고 제도를 만들며

                이 사회가 더욱 더 아름답고 따스한 사회가 되기 위하여 모든 책임을 다하여야만 한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의 민주주의여! 영원하라.

 

 

 

 

 

              새들 가운데 비둘기라는 새가 있다.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있는 새로 비둘기는 평화와 순박함을 의미하며

              담즙이 없어도 쓴 맛을 낼 수있고 거친 부리와 발톱이 없어도 격렬하고 대담해 질 수있다.

 

              비둘기는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암수가 한집에서 새끼들을 기른다.

              자신들의 둥지 안에서 본능에 의해 집단을 이루고 생활하며

              부드러운 부리를 가까이 대고 입맞춤하는 모습들은

              비둘기가 평화를 추구하고 사랑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정신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합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도 형통할 수 없다.

              그것은 크건 작건 모든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분열된 가족은 얼마나 삶이 피폐하며 얼마나 메마른 삶을 살아갈까

              반대자들로 정국이 혼란스럽고 국민들의 소리는 전혀 무시되는 갈등 속에서

              우리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민주주의의 국가에서 국민의 힘보다 더 큰 힘은 없으며

              나라에서 민의가 사라질 때 결국은 정의가 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불화(不和)가운데에 있을 때 누가 이 나라를 장악하겠는가?

              대적이 주인을 괴롭히고 국민의 삶을 불안하게 만들며 갈등을 조장시키고 있는데

              과연 이 나라가 평화로울 수 있을까

 

              지구상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이 국민이 거하신 곳이라면 반드시 사랑과 평화도 깃들여야 한다.

              만일에 국민들의 마음이 전쟁과 갈등으로 뒤 숭숭해 있다 할 지라도

              나라는 유일하게 그들의 안전한 둥지가 되어야만 한다.

 

              대적아! 비바람아! 아무리 나라를 거세게 한번 내리쳐 보라.

              민주주의 안에서 나라는 그래도 국민들의 희망찬 함성으로 널리 울려 퍼질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 사회의 경제의식 구조와 갱신

 

 

 

 

 

          인간은 누구나 삶을 위한 의식주를 필요로 합니다.

          의식주로 삶을 유지하고 정신이 새로워지며 의식주를 생산,교환,소비하는 활동을 경제활동이라 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위한 활동은 한정되어 있어서

          주어진 여건속에서 최소의 부담으로 최대의 만족을 얻을 수있도록 경제원칙을 준수해 나가야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가지면 가질 수록 만족할 수없는 것이 인간의 본능일 것입니다.

          욕망이 행복을 위한 만족이라면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판단이 따릅니다.

 

          과연 인간이 재물이 풍족할 때 진정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인간이 아무리 재물과 명예와 권력을 가졌어도 그들 중에는 여전히 많은 불행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복과 만족은 재물보다 더 가치있는 일과 보람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재물을 추구하는 개인의 경제활동은 한 나라의 경제질서를 만들어 갑니다.

          일한 만큼 얻는 소득을 경제 정의라고 한다면 일하지 않고 얻는 소득을 경제 불의라고 볼 수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제 정의의 기준은 공헌도, 평등도, 필요도에 의해 결정됩니다.

          공헌은 개인의 활동에서 나타난 실적이고, 평등은 전체실적에 대한 나눔이며, 필요는 각자 생활에 요구된 소득입니다.

          이것을 고려한 공정한 분배가 실현될 때 진정한 경제 공의(公義)가 이루어 질 수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과거와 같이 의식주가 부족해서 나타난 빈곤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하지 않고 갑자기 갑부가 된 사람에게 느끼는 상대적 허탈감의 문제입니다.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소득이 불로소득이며 사람과 사람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해 왔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 사회에 나타난 부동산 투기, 뇌물, 청탁, 돈 놀이등은

          땀 흘려 일하여 만든 공헌도보다 더 많은 것을 빼앗아간 불의의 소득입니다.

 

          지금과 같이 가진 자가 돈과 명예와 권력을 차지하는 제도에서는 경제 공의가 더 이상 실현될 수없습니다.

          정치와 사회, 윤리와 도덕이 무너진 나라일 수록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비리는 한 마디로 개인이 모든 것을 차지하려는데 있습니다.

          한 가지 자기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로써 힘과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얻으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가 전문화될 수록 이러한 공의로운 배분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일본이 그렇습니다. 대체로 재물을 가진 자는 명예와 권력이 없고 명예가 있는 자는 돈과 권력이 부족하며

          권력을 잡은 자는 돈과 명예가 없어서 그 사회에는 상대적 불만이 적습니다.

 

          우리의 경우 지도층의 재산은 그 사회적 짧은 기간에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축적된 재산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출세를 위해 온갖 로비와 도움의 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시할 수없는 세 가지 연이 있습니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입니다.

          이러한 연 때문에 파벌이 조성되고 사회가 분열되기도 합니다.

          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연을 이용해서 무엇인가 목적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이 사회를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한 때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리울만큼 예의와 염치를 아는 분별있는 민족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혼란은 이런 과거의 질서가 깨어져 버린 무분별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전쟁을 치루고 70년대 산업화를 이루면서 무엇이든 빨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모든 생활이 비상이 걸린 듯 빠르게 돌아갔습니다.

          국토를 개간하여 도로와 다리를 놓고 공장을 짓고 자원을 남용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생존을 위한 문명에서 쾌락을 위한 문명으로 점점 더 변모해 갔습니다.

 

          이러한 기질이 세계에서 보기드문 빠른 경제성장을 가져왔고

          이러한 과정 속에 여러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에 여유가 없어졌으며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남을 생각하는 정신이 희미해져 버렸습니다.

          하루가 멀다 않게 보수공사가 시작되고 이기주의는 팽배해지고 분열과 갈등이 증폭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양심보다는 돈과 명예와 힘이 더 중요해 졌으며

          남 보다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정신이 메마른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주의가 만연된 사회에서

          인간성 상실, 과소비문화,빈부격차,사회적갈등 등은 우리의 올바른 경제흐름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유시장의 원칙에 따라 누구나 돈을 더 벌 수도 있고 덜 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땀 흘린만큼 돈을 더 버는 사회가 아니라 수단이나 방법에 의해 돈을 벌 수있는 경제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인맥이나 힘을 이용하여 돈을 쉽게 벌기도 하고

          돈과 명예와 권력앞에 어떠한 수단도 정당화되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불합리한 경제구조 속에서 힘 없는 자들은 언제나 불평스럽기 마련입니다.

 

          자본이 너무 한 쪽으로 치우치다보면 가진자들은 더욱 힘을 얻는가하면 약한 자들은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건전한 경제원칙이 사라지고 올바른 경제의식이 무너질 때 살기좋은 세상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재물은 쉽게 모을 수록 낭비하지만 땀 흘려 모은 재물은 소중하게 쓰기 마련입니다.

          만일 가난한 자가 굶어 죽는다면 그것은 그가 못 먹어서가 아니라 사회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공정한 분배가 주어지고 일한 만큼의 수고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잘못된 구조는 속히 바꾸어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다수는 공정하고 투명할 때 인정된다

 

어느 날 한 학급에서 학생들이 모여 반장선거를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상외로 전혀 엉뚱한 학생이 나와 뽑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바로 학생들은 자기보다도 나은 아이가 반장으로 뽑히는 것을 원치않았던 것이다.

결국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온 꼴이 되고 말았다.

 

지난 나의 대학원 시절에도 누군가 내게 찾아와 임원 한 자리를 맡아 달라며 내게 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아직은 나보다도 어린 나이로 배운 것도 많았고 의욕또한 충만했다.

"나는 아직은 그럴 위치가 있지 못하다"며 가볍게 사양을 하자 그는 못내 아쉬운 듯 다른 사람을 찾아 돌아섰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당당하게 임원회장에 선출되어 내게 또 다시 나타났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원망과 조소(嘲笑)가 함께 섞여 나를 무시하는 듯 "한번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고생도 끝나 졸업시즌이 돌아오자 교내에는 그 간에 불거진 교수문제와 학생임원들의 지나친 권력화가 논란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청문회에 서게 되었고 학생들의 무서운 비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수라는 것은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된지 오래이다.

 

다수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반역자이며

소수들이 겪기 쉬운 어떠한 불리함도 다수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공평의 법칙이 있다.

다수 의견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보다 합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도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들이 원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불 가능한 일까지 이 법에다 적용할 수는 없다.

 

이를 테면 합법화의 논리로 인간을 속이거나 약점을 이용하여 광고나 불법대출, 대리모 출산, 사행성 산업, 성 합법화,

성차별, 장시간 노동이나 부당한 대우, 불공정한 경쟁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가게에서 품질이나 중량을 속여 강매를 하였다면 이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정될 수없는 무가치한 일이다.

또한 공무원들이 직권남용이나 뇌물을 받아 부당한 이득이나 노동조합의 부정개입, 공정보도를 하는 언론이 사주(使嗾)를 받아

날조된 사실을 왜곡보도 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도 파괴행위이며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무가치한 일이다.

 

다수를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과대 평가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것은 다수들 속에는 언제나 앞뒤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나서는 이들이 많고

소신도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동화되어간 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겁한 침묵은 만족스러운 동의의 표시이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흉내내는 것은 그도 그 사람을 추종한다는 의미이다.

 

선,악이란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과악은 추종자가 많건 적건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확실히 하라.

 

사회가 발전하고 단체가 많아지며 조직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책임또한 많아지는 법이다.

만일에 조직이 어떠한 사건을 저질렀을때 문제를 가볍게 보고 넘겨서는 안된다.

 

악이란 병균과도 같아서 어느 곳에 병이 생겼을때 그곳만 아픈 것이 아니라

그 곳을 둘러싼 모든 부분들이 고통받고 급기야는 더 큰 병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반성하지는 못할망정 이를 옹호하고 자기 전체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며

오히려 상대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은 조직으로서의 가져야할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냉정한 비판만이 잘못된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자기를 냉철하게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과 그 실수는 더 큰 습관으로 굳어지고 말 것이다.

 

잘못이라는 책임은 어쩌면 소수보다도 다수에게 더 엄격해야하고 모든 책임의 원인들도 지도자에게는 더 무겁게 물어야 할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옛말처럼 자기 사람이라고 감싸주고 불법이 묵인되고 인정이 고착화되면

영원히 이 나라의 정의는 실현할 수 없다.

 

그것은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없는 자신들만이 풀어야 할 과업과도 같은 것이다.

먼저 자기 안의 부정과 부패부터 뿌리 뽑고 정의를 외치며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조직이 활력을 잃으면 그 조직은 존재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남들을 무시하고 자기 조직만이 제일이라는 집단 이기주의는 깡패의 소굴과도 같은 곳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조직들은 나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침체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이들은 나라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자부심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자체가 활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국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보다는 자신들의 안위와 경쟁에만 혈안이 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에 가입되어 자랑스럽게 국위를 떨치고 세계 여러나라를 누비며 다양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살률과 폭력과 시위와 범죄가 끊이지 아니하고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가?

 

그것은 아직도 저들이 사회에 눈을 감고 제대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언론과 종교계, 그 가운데 교회는 세상의 양심으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입맛따라 입장들이 바뀌고

정권의 눈치나 살피면서 언론과 종교인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기에 사회가 병들고 있는 것이다.

언론에 비쳐지는 수 많은 사건을 보더라도 언제나 주범들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 주역들이 바로 지도자들이다.

 

정의가 죽으면 불의가 살아나고 온갖 거짓 꾼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며 모든 조직들이 정의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경쟁에만 혈안이지 사회정의에는 외면을 해왔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거리를 나오고 노동자들이 시위하며 대학생들이 소리높여 부르짖는 것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정의를 부르짖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무척 어려운 법이다.

거리로 나가 행동하지는 못할망정 밤낮 집안에 앉아 부르짖기만을 계속한다면 나라의 정의는 어디에서 찾겠는가?

 

우리가 악들을 감시하고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을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곧잘 짜증을 부리기 일쑤이고

좀 더 한가롭고 조용한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다.

 

우리는 흔히 좋은 제도나 조직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좋은 사회를 이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나 조직도 사람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좋은 방법도 악용될 수가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들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다.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그 어떠한 것보다도 존귀함이 분명하다.

사람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죽이려는 조직은 어떤 의미에서 정의로운 조직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아끼며 사람이 살기좋은 세상이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미국에게서 나타난 우리 국가의 자화상

 

 

 

 

                          미국이 하는 일에

                          우리의 국민보다는

                          동맹이 더욱 필요한 국가

 

                          동맹이 하는 일에

                          우리의 국익보다는

                          그들의 안전이 중요한 국가

 

                          그들이 저지른 만행보다도

                          그들이 보복이 더욱 두려우며

 

                          정의보다는 힘을

                          자유보다는 경제를

                          이성보다는 논리를

                          진실보다는 이유를

 

                          자기의 신념도 없고 주관도 없이

                          그들의 사정이야기로

                          밤낮을 헤매고 있는 우리 국가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자연은 경고한다.

 


 

           

               자연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항상 어머니와 아내를 대하듯 사랑함과 경건함으로 정성껏 대할 일이다.

 

            자연 속에는 엄연한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만고의 법칙이 잘 숨겨져 있다.

            지난 2003년 9월에 우리나라에서는 사상 유례없는 대폭풍 매미가 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남기며

            한반도를 휘젓고 지나갔다.

 

            아무리 나이많은 어른들도 그 같은 태풍만은 처음본다며 내심 두려워 했다.

            정말 그것은 무섭고도 무자비한 바람이었다.


            그런데 1년전인 2002년에는 루사라는 태풍이 한반도를 거치며 거의 비슷한 재해를 입혔는데

            또 다시 찾아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오래 전 한 신문에서는 "한반도가 아열대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라는 특집기사를 마련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함께 실은 적이 있었다.

 

            아열대 기후는 습하며 비가 자주오고 가을에는 "루사"와 "매미"등과 같이

            9월에 큰 피해를 입히는 강력한 태풍등을 소개했고

            결론적으로는 한반도의 기후가 크게 변해가고 있다는데 의견을 모으기도 했다.

 

            21세기에 들어 한국의 연평균 기온은 약 1.5℃상승했다고 한다.

            일일 최저 기온과 최고 기온은 서울은 100년 사이에 7℃나 높아졌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름은 길어지고 겨울은 눈에 띄게 짧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생태계에서도 아열대 기후가 포착되어 한반도에 사는 우리로서는 매우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같은 모습을 바라보며 어느 누가 잠자코 기다리며 손만 놓고 있을까...

            이에 대한 국가의 철저한 대비책과 함께 미리 미리 서둘러 준비를 해야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날씨에 관해 직접 목격한 사건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저 오늘에 충실하며 집이나 사무실, 아이들과 교육현장,

            때로는 종교 시설에만 머물다 보니 더욱 더 그러했으리라...

 

            아주 오래 전, 내가 청소년들을 인솔하여 강원도 어느 분교로 캠프를 나갔을 때

            뜻하지 않던 태풍이 불어닥쳐 불어난 계곡물에 주변 농지들을 휩쓸어가고

            주민들의 많은 희생으로 자연의 엄청난 위대함을 직접 체험하며 새삼 다시 돌아보는 소중한 교육이 되었다.



            또 한번은 내가 어릴 적, 연희동에서 아버지는 중동에 나가시고 어머니와 가족들이 단잠에 빠져 있던

            어느 날 한밤중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폭우가 내려 여기저기서 고함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때에 사람들은 속옷차림으로 겨우 몸뚱이를 감추고서 우리집으로 피신나왔다.

           일부 사람들은 삼삼오오로 나뉘어져 한 곳은 연희국민학교로 대피하였고

           원수같은 영철네는 가족들과 함께 우리집으로 피난 나왔다.

           우리집의 모든 방들에는 피난을 와 싸가지고 온 보따리들로 가득찼다.

 

           바로 산꼭대기 군부대 밑 커다란 암자들은 모두가 바위밑에 깔려 자취를 감추었고

           그것들은 계속해서 수 많은 가옥들을 넘어뜨리고 맨 아래 넓은 도로까지 밀고 내려갔다.

           마치도 커다란 바위들은 임무를 끝마친 듯 온 몸에 흙덩이를 하고서 벌판에서 휴식을 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잠잠하던 태풍은 또 다시 우리 집을 향해 비와 바람으로 2차공격을 하였다.

           우리집의 지붕은 거의 다 뜯겨 날라갔고 겨우남은 뼈대는 간신히 매달려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어머니는 밖으로 뛰쳐 나와 물탱크를 끌고와 밧줄로 묶고 가족들도 나와서 밤새도록 버텼다.

           이러한 태풍과의 씨름은 사흘밤낮이나 계속 되었다.



           근래에 접어들면서 신종 사스나 돼지 독감, 조류 독감같은 것들도 우리를 당혹케 할 때가 많다.

           가축과 인체에 떼 죽음을 초래케하고 농민이나 경제에도 막대한 피해를 안겨주고 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는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하신

           성경구절이 나온다.


           지구를 이대로 내버려두고 계속 파괴하고 자원을 낭비하면

           인류에게 곧 종말이 다가올 것을 미리 경고하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는 매일 생활에 쫒기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정신을 빼앗겨서 더 크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잊을 때가 많다.

           그저 오늘에 만족하며 마구 낭비하며 살기가 일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환경문제는 우리뿐만이 아니라 오고 오는 우리 후손들에게

           운명과 행복이 달린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나라의 이상한 국가 보안법

 

 

 

         나의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놀러 갈때면 가끔씩 눈에 띄던 것이 삐라들이었다.

         내가 발길을 돌릴 때마다 삐라들은 풀 숲에서 여기저기 널려 있었고

         작고도 신기한 종이 쪽지들은 빨간 글씨로 우스꽝스럽게 많은 호기심을 불러들였다.

 

         혹시나 누가 볼세라 얼른 주머니에 넣고 놀이도 잊은 채 단숨에 파출소로 달려나가 내 보이면

         내게로 어느 날은 수첩, 어느 날은 연필, 어느 날은 공책으로 바꿔주기도 했다.

         그러한 재미에 푹 빠져 나는 졸업하는 그날까지 따로 그것들을 사야할 일은 별로 없었다.

 

         오늘날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누구의 간섭없이도 자유롭게 전 세계를 왕래하며 다닐 수가 있다.

         이민을 갈 수도 있고, 여행을 할 수도 있고, 선교를 할 수도 있으며 돈을 보내줄 수도 있다.

 

         그러나 단 한 곳, 북한지역만은 예외이다.

         북한만은 아직 누구든지 가서도 안되고, 보내서도 안되며, 만나서도 안된다.

 

         오직 법무부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것을 어긴 자는 누구나 가차없이 국가 보안법에 따라 형벌에 처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아직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들도 있다.

         북한을 대상으로 마음껏 삐라를 살포하는 대북단체들이다.

         그 내용이야 어떻든 저들은 국가에서도 지원해주고 눈도 감아준다.

 

         그리하여 이들은 국가에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삐라를 만들어 임진각으로 달려가고

         북한에게 마음대로 풍선을 날려보내기도 한다.

 

         커다란 풍선속에는 무슨 중요한 소식들이 그렇게도 많은지 삐라에는 자기들의 주문과 호소를 가득 실고

         삐라뒤에는 1달러씩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며 풍선에 담아 더욱높이 북한으로 띄워보낸다.

 

         이들은 북한이 아무리 거부하고 사람들이 말려도 눈이 오고 바람이 불어와도 요지부동(搖之不動)이다.

 

         국민들도 이렇게 자유롭게 삐라로 날려 보낼 수가 있을까?

         누구나 자유롭게 삐라로 돈을 보내주어도 괜챦을까?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사실(事實)과 진실(眞實)사이에서

 

 

 


 

        사람들은 대개 눈에 보이는 어떤 사실적 현상을 보고 단지 표면에 드러난 그 것만으로 진실인냥 착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진실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단순하게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眞實)과 사실(事實)사이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상상으로 전개되는 문학과 창작같은 경우 그것은 허구(虛構)라는 이름 아래 쓰여지는 것으로

      분명 사실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그러한 창작의 경우, 허구에 의해 세상에 나올 법한 삶의 실제들을 어느 정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정확한 통계나 논리로 이루어진 수학이나 과학, 논문같은 것들은

      우리는 그 논문 내용을 어떤 단순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참고만 할뿐

      그 속에서 누구나 가질 수있는 공통의 진실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진실이 아닌 단순한 사실은 한 개인이나 소수에 대해서는 진리가 될 수도 있지만

      진실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그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서도 다 적용될 수 있어야만 한다.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어떤 현상, 경험을 토대로 한 주관적에 가깝고

      진실은 언제나 거짓이 없고 바르고 참된 절대적이다.

 

      지금의 상황에서 남북이 가로막히고 서로가 호전적(好戰的)인 가운데에

      또 바닷가에서 요새만을 바라본 우리의 경우 단순히 북한에 대해 외형적인 사실만을 바라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 그림자가 크게 보인다고 해서 그 실체가 반드시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사실과도 같다.

 

      또한 남북정상들이 모여서 의혹만 크고 의미만 주고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뒷날 어떻게 되리라는 사실조차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을 간파한 상대들은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남이야 어떻든 선거에 유리하게 이용하는가 하면

      이왕 이렇게 된 것 다시한번 자기를 내던지며 대화록까지 공개한것이 아니던가?

      이것이 이성있는 사람들의 행동인가?

 

      이와 똑같은 일들이 우리 주위에서도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정부와 언론들은 국민들에게 남북에 대한 잘못된 정보만을 전달해주고 있다.

 

      대다수 국민들은 북한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은 반면에

      정부와 언론들은 진실을 차단하고 자기식 입맛대로 사실만을 편집하여 매일 방송에 흘려 보내고 있다.

 

      가끔씩 우리는 TV를 볼 때마다 사회적으로 캠페인을 펼치고

      가난한 이웃나라들을 소개하며 그들을 돕자고 후원금과 봉사자들을 찾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 국민들은 이렇게 성숙하여

      누구의 간섭없이도 세계를 여행하며 의욕이 넘치고 자발적이며 사랑이 넘치는 민족이다.

 

      국민들은 지금이라도 북한에게 다가가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주고

      도와줄 수만 있다면 우리의 남북통일은 한층 더 빨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 채 자꾸만 저들의 안좋은 실상만을 비춰주며

      진실을 왜곡하여 국민들에게는 성급하게 "굴종이다,이용당한다"는 잘못된 의식만을 전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제 외부적인 것, 겉으로 드러난 것,

      인간의 산술적인 숫자로 나타나는 가시적(可視的)인 것에 의해 진실을 논해서는 안된다.

      그 보다는 왜 역사가 우리들을 이곳까지 오게 했는가를 바로 알아야만 한다.

 

      북한 사람들도 분명히 우리와 같은 한국인임이 맞다면 아무도, 그 어떤 힘도, 국민을 막아서는 안된다.

      남북은 한 민족으로써 역사가 지켜준다는 진실하나만을 믿고 끝까지 돌봐주며 사랑해야 한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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