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보다는     

       먼저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태어나 같은 나라, 같은 사회를 꿈꾸며 살아가는 같은 민족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세 차례 우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한번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 방울이 피가 되도록 눈물로 기도하신 것이고

       두번째는 죽은 나사로를 바라보시고 슬퍼하시며 우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감람산위에 올라가 장차 멸망당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조국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이 땅에 살아가는 한 민족,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 나라 그 민족을 먼저 사랑하며 염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애국이란 무엇일까요?

       애국이란 (愛國) 자기 나라를 사랑한다는 맹목적인 충성심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애국이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애국과는 좀 거리가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애국과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애국들이

       아무런 차이가 없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애국사상은 아닙니다.

 

       한국과 일본을 한번 생각하여 보십시요.

       동해(東海)를 옆에 두고 저쪽 일본 사람들이 추앙하는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기틀을 만든 일본이 자랑하는 위대한 애국자이지만

       이쪽 한국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우리나라를 강탈해간 원흉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우리나라에서는 애국자로 존경을 받지만

       저쪽 일본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영웅을 죽인 원수일 뿐입니다.

 

       만일 이런 것들이 애국이요 애족이라면 이것은 결코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할 애국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애국 사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조건 자기나라, 자기민족을 사랑하는 마지막 종착지로 생각합니다.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이 가장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기적인 마음의 총 결집체가 애국주의자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다른 나라 다른 민족들은 안중에 없이 무턱대고 자기 나라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는 애국이며

       부르짖으면 부르짖을 수록 나라와 나라 사이의 갈등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언제나 애국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이 자랑스러워서 다른나라 다른 민족을 존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애국인으로서의 모습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12제자를 훈련시키시며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고 당부 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스라엘안에서 자기 민족을 찾아가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자기 나라, 자기 민족을 종착역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하신 배려일 것입니다.

 

       또한 예수께서 마지막 이 땅을 떠나실 때에는  "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고 하시며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 줄 것" 을 원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자기 나라와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온 세계를 가슴에 품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진리안에서 화평과 평안을 누리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으로 나셔서 유대인으로 사시고 유대인으로 이 땅을 떠나셨지만

       그분은 유대인인 동시에 온 인류를 가슴에 품었던 진정한 세계인이었습니다.

       바로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온 인류가 그의 것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신 분입니다.         과거 우리나라는 늘 강대국의 그늘 아래서 생존자체가 거의 불가능 할만큼 냉대 받고 한많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어 민족주의란 자기 생존을 지키려는 비장한 생존 본능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존중하되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초대교회의 거장인 사도바울은 예수를 알기 전까지는 분명히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자기 민족의 관습과 자신들의 이념에 사로잡혀 누구든지 자기의 맘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색출하여 처형할 정도로 철저한 국수주의자(國粹主義者)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나고 변화받고난 뒤로는 자기 민족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을 사랑하는 그 뜨거운 사랑으로 그는 세계 모든 이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 던졌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애국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어디를 가든지 그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평화의 복음이 뿌리내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이란 말처럼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진정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남을 사랑할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지역이나 학연, 지연등 "우리"라는 뿌리의식이 강한 민족입니다.       이러한 "우리 의식 문화"가 한번 잘못 사용되어질 경우 사회안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옵니다.

 

       한국 사회의 내부를 가만히 살펴보면 다인종, 다문화속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에게 비쳐지는 한국인은       여전히 "우리 나라, 우리 민족"뿐이라는 이기심이 강한나라입니다.

 

       그것은 어느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집단화되어 마치도 자신들만이 제일인냥      "우리가 남이가~, 우리 교회, 우리 OO당, 우리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는" 등등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자기들 맘대로 사랑의 공동체를 갈라놓고 집단문화를 결성화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같은 종교, 같은 형제, 같은 하나님이라 부르는 교회에서도 예외일 순없습니다.       어느 교인이 다른 교회를 찾았을 때 듣게 되는 말이 "우리 교회는 요"하며 전혀 다른 사람의 취급을 받습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가난과의 씨름을 해야 합니다.

       주변의 어려움을 보고도 모른체하며 외면하고 만다면 강도만난 제사장과 레위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가난 자체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오늘날의 한국과 북한등, 우리의 어려운 이웃과 형제들이 모두다 "우리" 라고 생각된다면

       그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피하지 아니하고 정면으로 맞서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남북이 분단된지 벌써 6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끝없는 이념과 정치논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다른 국민, 다른 종교, 다른 종파들은 다 그 길을 갈지라도 그리스도인은 그 길을 동행해서는 안됩니다.

 

       길 잃은 한마리의 양과 같이 그 옛날1200만을 자랑하던 그 교인들은 다 어디로 갔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교회에서 버림받고 상처받았으며 어떤이는 노숙자로 어떤이는 핍박자로 지금도 어디선가 끝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소외시키며 죄인만들고 무관심한 한국교회들은

       역사와 하나님앞에 분명히 그 죄과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묻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역과 이념을 초월하여 생명을 살리는 종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전 중동을 포함한 북한주민들을 사랑으로 품으십시요.

       북한, 중동을 외면하고서는 당신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종교의 힘은 믿음과 행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종교가 본분을 다하고 이웃들과 함께한다면 사람들이 몰려오고 희망이 있지 않겠습니까?       가진 것이 없으면 없는 만큼 힘으로 봉사하고 협력하며 가진 것이 많다면 많은 만큼 구제에도 열심히 해야합니다.

 

       당신이여!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것입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사는 우리가 사회나 이웃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지는 그 날에 가보면 알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문화와 민족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 나라의 법과 질서에도 순응해야 합니다. 불의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우리의 대상이 이 나라, 이 민족만을 위해서 멈춰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세계인류의 평화를 깨트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고

       그 화는 결국 고스란히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고 말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 사회의 차가운 시선들

 

 

 

오래 전, 내가 아내와 만나 한창 연애를 즐기던 무렵

나는 주위의 시선을 피해 아내와 떨어져서 영등포에서 면목동으로 목양지를 옮겨야만 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해서 몸둥이 한 개뿐,

심야가 있을 때면 아내는 어김없이 내게 달려와 택시를 태워주고 나는 연희동에, 자신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내가 오지 않는 날이면 걸어서 연희동까지 날이 밝아서야 겨우 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아내가 그립고 보고 싶을 때면 언제라도 아내를 불러내어 데이트를 즐겼다.


그 때에 내게 언제나 발이 되어주던 시내버스...

빨간색 그 번호는 면목동에서 청량리를 지나 신촌, 영등포까지 아내가 사는 동네까지 변치않고 무사히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그 날따라 그 버스가 고장이 나 하필이면 청량리 588에서 멈춰버린 것이다.

운전기사는 무엇이 불만인지 투덜거리며 승객들에게 "버스가 고장났으니 다음 버스로 갈아타라"고 계속 종용했다.

 

약속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타야할 버스는 오지않고 시간만 계속 흘러갔다.

하는 수없이 정거장앞 가게안으로 들어가 빵과 우유를 사고 있는데 마침 한 여자가 가게안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젊은 아가씨로 짧은 치마에 짙은 화장을 하며 속살은 다 드러나서 냄새는 코를 자극했다.

그때에 또 한 사람의 남자가 가게로 들어왔는데 그녀와 마주쳤다.


"여기 왜 또 왔어? 에이~ 더러운 X" 하면서 담배를 사서들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것이 무슨 소린가, 무엇이 더럽다는 말인가...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가게 주인에게 넌짓이 물어보았다.

"왜 그래요 저 사람들?" ......... "몰라서 물으세요? 요 앞에서 몸파는 여자쟎아요"


가게 주인도 마치 그녀가 불결하다는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며

"살 것있으면 빨리 사가기나 하지 뭐하고 있느냐"며 재촉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 주인의 말은 나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만들었다.


손님이 나가자 나는 그 주인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도 손님이쟎아요"하였더니 그 주인왈 "손님은 무슨 손님..."

제발 못팔아도 좋으니까 저런 손님은 안왔으면 좋겠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화가 나서 "그래도 우리는 그 여자들을 비난할 권리는 없어요. 만일 사람들이 성을 신성하게 여기고

요구하지만 않는다면 저런 사람들도 자연히 없을테니까요"하며 밖으로 나와 버렸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좋은 점들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좋게 만들고 부드럽게 할 수있는 친절일 것이다.

무자비하고 엄격한 태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억누르게 하고 차가운 경멸의 눈초리는 말하는 그 사람까지도 더욱 차갑게 만든다.

따스하고 연민에 찬 몇 마디의 말은 타락하는 이들의 마음까지도 돌릴 수있게 하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데는 사람들의 따스한 관심만큼이나 좋은 것도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자기와 사상과 이념이 다르다고 하여 사람까지도 원수처럼 대할 필요까지는 없다.

도대체 같은 나라, 같은 사회에서 보안법은 무엇이고 내란죄는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지금이 어떤 세상인가?


지금 세상이 군사시대도 아니고 전방에는 사병들이 든든하게 서 있고 동네마다에는 CCTV가 활발하게 돌아가며,

미국에서 해마다 들여온 무기가 얼마나 비싸고 위협적이던가

그것을 북한이 모를까봐 또 과거의 수법처럼 저들이 쳐들어 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국정원의 NLL논란과 대선개입으로 수세에 몰렸었던 저들이 왜 갑자기 한 사람을 지목하여

국민들과 싸우려고 하는지 냉정하게 따져볼 일이다.

 

남의 흠을 잡고 야비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삼는 것은 정말 비열한 짓이다.

아마도 그것은 저들이 만만해 보이거나 자신들에게 있어 위협적인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리라...

 

그렇지 않아도 지금 우리는 매일같이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대통령의 사과문제로

저들이 주관하는 촛불집회가 밤새도록 그칠 줄을 모르고 국정은 마비되어 위급한 상황까지 왔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이유로 정쟁을 삼을 것이 확실시되고 그 죄인과 동료들을 같은 무리로 몰아

무책임한 궤변들을 늘어 놓을 것이 뻔하다. 그리고는 느긋하게 선거때가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나쁜 부정들이 우리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추문이 무슨 탈출구라도 되는 마냥 다른 사람의 추문도 계속 흘려놓고 자기들의 문제를 덮으려고 한다.

그들의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하나같이 흥미진진하다.

 

양심이 진정으로 결백한 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결코 보복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양심이 깨끗하지 못하기에 다른 사람의 잘못들을 계속 물고 늘어지며 더욱 분개하는 것이 아니던가.


위선자여. 당신들이 그 동안에 얼마나 많은 불법들을 행해왔는지 한번 냉정하게 돌아보고

국민들앞에 얼마나 신뢰를 얻고 있는지도 한번 살펴보라.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대한민국이 정말 부끄러워진다.

 

 

           세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국인처럼 부끄러운 나라가 또 있을까...

           남북이 두개로 나뉘어 진것도 서글픈 일인데, 동족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고 있는 것은 더욱 서글픈 일이다.

 

           마치도 한 가정의 부모들이 자식들앞에 싸우고 있는 모습들은 먼저 정신상태가 어떤지부터 의심스럽게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국제행사를 치룰 때마다 은근히 화합을 들먹이며 북한을 또다시 앞세워서 이용을 하는 것은 아닌가

 

           지난 수 십년 동안 우리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족간의 총칼을 들이대고 마주보며 싸워왔다.

           북한에서는 매일같이 주체사상과 반동으로 안심할 날이없고 남한에서는 아직까지 빨갱이와 종북타령으로 바람잘 날이없다.

 

           해방때 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모든 위정자들의 잘못은 공무원들에게로 공무원들의 잘못은 국민들에게로 전가만 시켜왔다.

           많은 경제인이나 언론도 누구하나 내탓이려니하는 자성하는 이가 없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멋대로 이익만을 챙겨왔던 것이다.

 

           때때로 사람들은 당시에는 모르다가 시간이 많이흘러 그것이 새삼 잘못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한 없이 자책하고 부끄러워진다.

           대체 사람들이 누구관대 그런 일들을 저질렀고 무슨 생각을 가졌길래 저렇게도 불안해하지 않는 것일까.

 

           나라를 곤경에 빠트리고, 국민을 살육하며, 거짓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저렇게 태연할 수있을까...

           아마도 그 마음에 양심이 무디어져서 이미 화인(火印)맞아 마비된 것이리라...

 

           나의 어린 시절 연희동에서 동네형들을 따라 산에서 뱀을 잡아 먹으려다가 크게 산불이 난 적이 있었다.

           산 아래 구덩이속으로 바람이 불어 순식간에 불길이 일어나고 산 주변으로 크게 번져나갔다.

           위에서는 산림계가 호루라기를 삑삑불며 달려내려오고 아래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도구를 들고 올라왔다.

 

           그 때에 우리들은 간이 콩알만해져서 산을 넘고 도망을 갔지만

           그 때의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내 기억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양심이란 무엇일까? 양심은 빛이 들어오게 하는 창문같은 것이 아닐까

           사람이 죄를 지을 때면 창문은 점점 더러워져서 빛을 차단하고 그래서 마음이 굳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오늘날 사람들이 죄를 너무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들이 죄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만 혼자 있을때는 그렇게도 무서워 벌벌 떠는 사람들도 자기의 편이 모아지고 감싸주게 되면

           끝까지 죄를 감추면서 거짓말로 합리화시켜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짓고서도 끝까지 잠못 이루는 법이 없다.

           저들은 일찌기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민간인들을 사찰하고 댓글로 나라를 어지럽혔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란 전혀 없다.

           오히려 자기들의 잘못을 덮으려고 또 다른 거짓을 꾸며내고 자꾸만 사람들의 눈 길을 피해가고 있다.

 

           이들의 양심이 죽었다는 것은 나라에 사회적 이슈가 있을 때에 잘 드러난다.

           만일에 우리에게 어떤 주제가 있을 때에 그들은 벌써 마음에 작정들을 하고나와 논쟁하기를 즐긴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자꾸만 합리화시키려고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것은 우리 언론의 모습에서 쉽게 엿볼 수가 있다.

           TV의 인기프로그램인 100분 토론이나 추적60분등 시사프로그램을 보더라도 상식과 이성있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이들을 잡아 주어야 할 사회자도 어느 덧 중심을 잃어버리고 막무가내식 억지주장만이 난무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언론들이 우리의 궁금한 것을 풀어주고 제대로 삶을 인도해 줄 수있을까

 

           지난 과거에 우리 사회안에 온갖 불의로 가득찼을 때 언론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권력자들의 눈치만을 살피며 온갖 시녀 노릇을 다해 오지는 않았던가

 

           정치도, 권력도, 언론도 다 이러할 진대 과연 한국은 세계에서 어떤 나라일까?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2013년도 현재 세계 14개 지표에서 제일 꼴찌수준이다.

           사회참여도, 부패인식,생활만족도,자살,이산화탄소 배출량,실업자,고용보호,공공사회지출등 모든 분야에서 꼴찌이다.

 

           한국에서는 집이나 소득, 직업보다도 인간관계는 가히 땅속 끝이다.

           내가 말한 것이 아니라 OECD가 직접 발표한 것이다.

 

           모두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모두가 그렇게 자기 집안에서 서로 물어뜯고 할퀴고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좀 더 우리 사회가 통일을 앞당기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실업자들이 일을 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우리 사회가 나은 생활을 할 수있을까를 생각할 때이다.

 

 

           매일 눈만뜨고 밥만 먹으면 싸울 궁리나 하는 정치권들과 언론들과 정부 여당들은 과연 누구를위해 싸우고 있는지

           우리 국민들의 아픔을  진심으로 헤아리며 자성하고 있는지를 심히 묻고만 싶어진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국가적 범죄를 경계하라

 

 

 

 

 

       우리가 국가적 범죄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항상 국민의 대다수,

       혹은 국가를 대신하여 행동할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 똑같이 범죄에 가담하고 동조했을 경우를 말한다.

 

       사람들은 대개 범죄는 일개 개인만의 문제로 취급하여 쉽게 넘겨버리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국가의 범죄는 비록 그 행동의 단결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인간들의 단합된 행동의 결과로서 간주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흔히 정당화될 수 없는 일들도 단체로 행동할 때는

       어쩔 수없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지난 대선에서 있었던 모든 과정들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대선을 돌이켜 볼 때 최대의 관심은 먼저 과연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냐하는 것과

       정말로 서민을 대변하고 나라를 잘 통치할 수 있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 것이냐하는 문제였다.


       대선기간 내내 한쪽에서는 너무 북한과 고노무현 대통령간의 NLL 대화문제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다른 한쪽에서는 줄곧 후보측의 역사인식과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집권당의 잘못에 대한 심판문제로

       선거열기는 매우 뜨거웠었다.


       서로가 팽팽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모든 여론조사를 깨고

       결과는 우리나라에서 여성대통령이 최초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사회 곳곳에서는 이미 대선무효를 외치는 크고작은 국민들의 동요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뒤 늦게 드러난 사실이지만 지난 정권말기 국가 정보원의 조직적인 댓글범죄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정원은 지난 선거에서 자기 당의 정권 재창출을 목표로 수개월 전부터 팀을 가동하고

       극비리에 모여서 모의 훈련을 실시하여 왔다.


       이들은 그 동안 모아온 자료들을 가지고 인터넷을 검열하고 댓글을 달고 부지런히 대북심리전을 펼쳐나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선 후보자들을 겨냥하여 집중 상대측 후보에게는 비난을,

       자기 당 후보에게는 각각 칭찬을 늘어놓으면서 여론전을 이어 나갔다.


       밝혀진 사실만도 수두룩하다.

       정체모를 아이디와 수백만의 댓글들... 그리고 들통이 나자 이를 지우다 만 각종 증거와 흔적들...

       이에 국민들은 더욱 분노하였고 야당들은 사과하라고 난리였다.

 

       나라 안팎에서는 매일같이 대선무효를 외치는 국민들의 함성이 여기 저기에서 터져나왔고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의식인들은 의식인대로, 대학교수,대학가,심지어는 고등학생들까지도 성명이 이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국정조사가 열렸지만 그것은 형식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이유로, 또 어떤 증인들은 이런 이유로 조사받기를 두려워 하였으며 선서도 거부하였다.


       어떤 증인은 과감히 일어나서 국정원의 댓글참여는 명백히 대선개입이라고 주장까지 하였다.

       한쪽에서는 너무 이들을 감싸주었고 한쪽에서는 너무 조사가 부족했다.

 

       짧은 국정조사도 끝났지만 아직도 국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오히려 더 큰 의혹만을 남긴채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만 있다.


       국민들은 지금도 국정조사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날마나 광장으로 모여서 밤마다 촛불시위를 하고있다.

 

       지금의 상황에서 박대통령은 그동안 침묵으로만 일관하다 여론상황이 나빠지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자신은 국정원으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도움도 받지 않았으며 선거에 활용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바로 그것이다.

       박대통령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자신이 국정원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지 받지 않았던지

       결과적으로는 국가가 이 일에 관여(국정원) 하였으며 동조(댓글팀, 새누리당)하였고, 지원(경찰)한 셈이다.


       엄연히 경찰조사나 국정조사에서 불법 댓글임이 확인되었고

       급기야는 이것이 빠르게 확산되어 자신의 선거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된 것만은 사실이다.


       더욱이 여당들은 어디에서 입수해 왔는지 괴이한 문서들을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만일 국가가 불법을 알면서도 이를 막지 못하고 묵인하고 방조하고 만다면 이 나라의 정의는 어떻게 될까?

       정의는 사라지고 권력과 불법만이 판을 치는 독재같은 세상이 오고말 것이다.

 

       한 나라의 권위는 그 국가의 도덕성에 따라 존폐여부가 크게 달라질 수도 있다.

       분명한 원칙과 신뢰에 따라 국가가 잘못이 있을 경우 가슴을 치고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국민들앞에 사죄한다면 어느 국민이 그 국가를 따르지 않겠는가?


       세계의 그 어떤 나라들도 함부로 우리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정직과 진실과 신용이다.

       이 덕목의 소유자만이 자신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갈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국가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어야 국가의 사업들이 원할이 이루어질 수 있다.

 

       만일에 국가에서 신뢰가 무너지고 불신이 확산되고 만다면 그 국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남들에게는 그토록 신뢰를 말하면서 자기는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국가의 위신들은 또 어떻게 되겠는가

 

       어느 국가이든지 권력이 불법을 저지르면 그 국가는 반드시 쇠퇴하게 된다는 것이 역사가 가르쳐준 교훈이다.


       권력들은 언제나 그 경제력을 자꾸만 한 곳으로 투자하며 결국은 서민들을 가난뱅이로 만들고

       불의는 언제나 권력을 움켜쥐고 국민을 더욱 괴롭히며 국가의 순기능까지 마비시킬 수가 있다.

 

       지난 날 우리 역사는 일본의 갖은 압제와 전쟁으로 말할 수없이 많은 고난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우리를 통찰시키고 위대한 민족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이 고난을 통하여 증오심만을 키웠지 대통령을 비롯해서 정치가들이 성찰하지 못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정부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두가 베옷을 입고 잘못을 뉘우치고 그 자리에서 물러났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만일에 5.16과 유신, 군사독재가 없었더라면 우리 역사는 지금보다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세력들이 그 때의 연장전에 서서 과거의 습성들을 버리지 못하고 온갖 불의를 자행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에 또 다시 과거로 회귀하느냐 아니면 민주주의로 가느냐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지금 우리의 국가가 하는 일은 더 이상 정의로운 모습은 아니다.

       힘만 높이려고 하지 힘 없는 국민들의 문제야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진정한 힘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민주야! 정의야! 국가적 범죄를 경계하라.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무엇이 우리사이를 가로막고 있는가?

 

 

 

                 지난 2008년 6월 우리 사회는 미국산 쇠고기 촛불집회로 한바탕 큰 홍역을 치룬 적이 있었다.

                 그 때에 나라의 대통령은 TV앞에 나아와 국민들께 죄송하다며 발표하기를

               " 이 나라에 미국산 수입쇠고기가 들어와도 결코 한우고기로 둔갑되는 일만은 없게 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가 있다.

 

                 그 때에 많은 국민들이 분명히 그 말을 믿었으며 축산농가들도 믿었다.

                 TV에서는 날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하며 농산물들을 자랑하고 높이 세워 주었다.

 

                 그런데 몇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보라.

                 무엇이 수입이고 무엇이 우리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주머니속 사정은 이미 가벼운데 고기값은 자꾸만 뛰어 오르고

                 축산농가는 농가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더 이상은 못살겠다며 울상이다.

 

 

                 만일에 우리가 빚진 상태로 친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그 빚을 다 갚아 주겠다며

                 자리에서 즉시로 실행에 옮긴다면 우리는 결코 그 친구에게 "나는 자네를 믿을 수가 없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에 우리 친구가 진실하다는 사실을 한 때 알았더라면 결코 그에게 무례하다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느 날은 우리동 아파트에 불이나서 사람들이 난리치며 호들갑을 떨던무렵 

                 나는 아이들을 한 사람씩 대피시키는데 그 아이들은 나를 완전히 믿고 잘 따라 주었다.

 

                 그런데 한 아이가 멀리서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그에게 "자 이리오렴, 나와 함께 좋은 곳으로 가자"하고 말했더니

                 그 아이왈 "나는 아저씨를 잘 몰라요"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다! 바로 그것이다. 그 아이는 나를 잘 모르는 것이었다.

                 이 험한 세상에 그 아이는 나를 전혀 신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권은희 수사과장의 용기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냅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선생님께 귀가 따갑도록 자주듣던 말씀이다.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오늘날과 같이 불의가 만연된 세상에서 공직자가 자기본분을 망각하고

                   자기 조직과 출세를 위하여 오직 의리를 내 세우는 이 마당에

                   여기 외로이 불의한 세력들과 싸우는 당당한 한 여성이 있다.

 

                   이름은 권은희

                   직함은 서울 송파경찰서 수사과장!

 

                   앞에는 서슬퍼런 국가지도자들이 뺑둘러 앉아 있고

                   옆에는 같은 동료, 상사 부하직원들이 지켜보고 서있다.

 

                   움켜쥔 두 주먹위로 반짝이는 눈동자, 오똑한 코

 

                  "이번 사건은 분명히 대한민국 국가정보원 여론조작사건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그렇치 않아도 우리 사회는 정치인이나 종교인이나 언론인에게도

                   표리부동하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예면 예이고 아니면 아니오라고 분명히 대답하는 이가 없고

                   예도 아니고 노우도 아닌 그저 눈치만 보고있는 사람도 많다.

 

                   그 옛날 광주비극의 주인공이었던 전두환을 기억하고 있는가?

                   누가 죽였는가? 스스로 죽었는가? 아니면 누가 죽였는가?

 

                   비록 국정조사는 끝나고 그녀는 돌아갔지만

                   아직도 내 맘속에는 왜 자꾸만 그녀모습이 떠 오르는 것일까

 

                   열 아들 잘 생긴 남자경찰들보다 잘 키운 경찰 딸하나가 더 낫다.

                   국민들이 정말로 다 눈이 있고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경찰에게 잘했다며 격려는 해주질 못할 망정 결코 비난은 하지마라.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어느 편에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언제나 선(善)과 악(惡),

              정의(正義)와 불의(不義)와의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하며 살지 않을 수없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중간지대란 없습니다.

 

 

              정의란 이상이요, 불의는 현실이기에 선택이란 그렇게 쉬운 것만이 아닙니다.

              이상(理想)과 현실(現實)사이에서 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선택하기 마련입니다.

 

              당장의 보기에는 죽음의 위험은 감추어져 있고

              현실은 희망으로 보이기에 사람들이 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주장앞에서 이상은 항상 무력하기 마련입니다.

 

              국가 안보는 현실이요,               

              민주주의는 이상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국가안보를 위해 유신체제를 받아들였고

              남한과 북한의 현실은 우리에게서 많은 이상을 빼앗아 갔습니다.

 

              빼앗긴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이상을 버렸고 현실문제 앞에서 주저앉아 버렸던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앞에서 "당신은 어느 편에 있는가?"물을 때 우리는 한참 머뭇거리지 않을 수없습니다.

              누구나 정의의 편에 선다고 주장은 하지만 막상 자기가 선택한 그 길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감히 꺼낼 수없는 진실을 그들은 집요하게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정직한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우리에게 비난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 비난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또 우리에게 진실을 말해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으로 대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그의 말을 무시하고 화를 내며 외면할 지도 모릅니다.

              만일에 당신이 정의에 속하였다면 더 이상 불의를 보며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시대를 따라 변신(變身)하는 자들을 경계하십시요.

              일제 시대 때 일제에 협력하고 해방이 되자 가장 애국자인 척 시대에 따라 변절하는 이들을 살피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자에게 아부하는 자들을 경계하십시요.

 

              과거 유신 체제아래 사회적 불의가 판을 치게 되었을 때

              정의의 편에 선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핍박을 받았으며 숨어 다녀야만 했습니다.

 

              종교인들도 외면했고 언론들도 등을 돌리고 말았습니다.

              오직 국가안보를 위해 많은 국민들이 자기의 자유와 인권과 양심까지도 빼앗기며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수와 잘못을 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런 실수와 허물이 없는 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인간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않고 문제를 자꾸 남의 탓으로만 돌리려고 합니다.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기업과 노동자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 범죄자가 사회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의 생존을 지키려는 양쪽간의 싸움에 억측과 폭력이 난무하고

              비방과 시비가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든 문제의 원인은 책임을 전가하는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냉정한 비판만이 부정의 재발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허물의 껍질을, 잘못의 누더기를 과감히 벗기십시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식의 인정을 보여서는 안됩니다.

              혼란이 두려워 적당히 그 문제를 덮는다면 그 부정, 그 잘못은 끝없이 반복되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정의를 택한다는 것은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아니하며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불의는 체면이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밀어부치고 잔인합니다.

              폭력과 사기와 거짓, 부당한 압력과 착취, 그리고 권모술수를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두르지만

 

              불의와 정의가 싸우면 언제나 정의가 손해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두들겨 맞고 고난을 당할수록 빛나는 것은 정의요, 때리면 때릴수록 힘이 빠지는 것은 불의입니다.

 

              사람들은 정의를 생각할 때 적당히 눈치를 살피다가 동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아예 무시하고 있다가 여론이 조성되면 그제서야 슬그머니 나타나  정의를 따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강한 것은 언제나 조용하고 겸손합니다.

              그것은 품위가 있고 쉽게 넘어지지도 않습니다.

 

              저 깊은 강물을 보십시요!

              흐름이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조용히 그 밑에서 정의는 흐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진정한 변화는 인간의 마음에서 부터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대중적이고도 분위기에 취약한 자신들을 살펴보십시요.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서 사회는 항상 묻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있습니까?"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이 말은 언제 어느 때에 쓰여져야 합당할까?

 

                        우리는 언제나 모든 일에 비유로 설명할 때

                        자기는 쏙 빼놓은 채로 남의 문제만을 가지고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자기가 할 때는 로맨스, 남이 할 때는 불륜"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지난 과거 우리는 일본이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만큼이나

                        우리나라의 군사독재하에서 군사들의 군화발에 짓밟혀

                        우리의 국민들이 얼마나 희생당했는지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들은 탱크와 총으로 무장하고 협박하여 정권을 빼앗아 

                        자기들의 말에 따르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가차없이 처단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에게 아부를 하는 자는 5.16 민족상을 받았고

                        그들에게 대드는 자는 빨갱이나 불순한 자로 낙인찍혀 초상을 받았다.

 

                        종교인들도 가담했고 언론인이나 지식인들도 모두 독재자들의 편이었다.

                        선거는 자신들의 뜻대로 얼마든지 조작했고

                        겁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두려워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적절한 표현방식 http://blog.daum.net/91386/16751806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앞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라

 

 

 

                      오늘날 우리 민족은 이념 때문에 남북으로 나뉘었습니다.

                      이념은 변하지 않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그 시대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이념을 고집할 때 우리는 영원히 하나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한에서는 군사정권이 오랫동안 집권하면서 생각 없이 전통을 파괴하는 무모함을 저질렀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심 때문에 지역 갈등의 골을 깊게 만들었으며

                      표피적인 문화를 보급하여 대중을 우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군사 문화가 오늘 이 사회의 갈등을 깊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 나라의 교육은 오로지 지식 위주의 교육으로 무한 경쟁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았으며

                      그것은 남을 짓밟고서라도 출세하여야 한다는 전투적인 인간들만을 양산해 낸 것입니다.

 

                      다양성을 잃어버린 획일적인 교육은 바로 군사문화의 산물입니다.

 

                      다양성을 잃어버릴 때 진정한 문화가 형성될 수 없고 함께 나눌 문화를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들이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TV에 나와 자주 말을하지만

                      그것도 모두 하나의 쇼로 보일 뿐 모든 일은 일방 통행일 뿐입니다.

                      지금 우리 정부는 국민을 하나로 엮을 사상이나 신념을 제대로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껏 내세운 것이 "하면 된다" "할 수있다"는 박정희 시대의 옛 구호를 재탕하고 있는 정도입니다.

 

                      시름에 젖던 이 때에 김연아가 우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그 옛날 박세리가 맨발로 물 속으로 들어가 골프공을 처내어 마침내 우승을 한 것처럼

                      김연아도 외국으로 넘어가 피겨스케이트로 우리에게 커다란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던 것입니다.

 

                      얼마나 궁했으면 한 여자 골퍼우승이나 스케이트의 우승을 이 나라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여자들도 더 이상 외부의 바람에는 맥을 추지 못하고 그의 신드롬도 별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시적인 것, 잠깐 지나가는 것들을 우리의 정신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행동일까요?

                      아무리 경제 문제가 급하고 남북문제가 시급해도 우리를 하나로 묶어줄 전통문화를 되살리고

                      정신문화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기울여가지 못한다면

                      지금 정권도 결국은 무능한 정권으로 낙인 찍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고 말 것입니다.

 

                      대화가 끊어진 원인을 찾아서 그 원인을 제거하여 다시 이 사회의 활발한 대화가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유대교가 아니라 기독교입니다.

                      유대교는 이방인을 차별하고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폐쇄적인 신앙을 고집하였지만

                      기독교는 이런 유대교의 폐쇄성을 깨뜨리고 이방의 세계로 나가 복음을 전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라는 기독교 정신을 한국사회에 깊이 뿌리내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한국 교회가 다시 유대교처럼 독선적인 신앙에 몰입한다면

                      결국은 그 기독교도 쓸모 없는 교회로 이 사회에서 버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사회 속에 과거의 전도운동만으로는 사람들이 몰려오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 속에 만연된 종교의 또 다른 언행일치앞에 사회는 지탄을 던질 뿐입니다.

 

                      한국 교회는 좀더 열린 자세로 국민들과 소통하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트며

                      사회 곳곳에 신뢰가 일어나 대화의 물꼬가 열리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기보다는 낮추고, 섬기며, 나 자신을 내어 줄 때 대화가 이루어지며

                      거기에 화해와 아름다운 새역사가 시작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좋은 정부란 어떤 정부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부형태가 어떻든지 그저 통치만 잘하면 좋은 정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부의 좋고 나쁜 것은 오직 그 정부를 어떻게 통치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판단은 통치와 정부를 잘못 이해한 어떤 정부가 좋은 정부인지는 알 리가 없다.

 

                좋은 정부란 그 정부를 어떻게 통치하느냐가 아니라

                인간 본성이 부패하는 것을 억제하는 최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모든 것은 사람이 일을 하지만 그를 움직일 수있는 힘은 그의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그 나라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모두 골칫거리이며

                한 나라의 좋은 사례는 다른 나라에도 좋은 모델이 된다.

                그리하여 어느 나라 정부이든지 나라의 체제나 조직을 만들때는 반드시 인간 본성에 기초를 두어야만 한다.

 

                특히 나라의 중요한 헌법은 시계와 같이 정확해야 한다.

                좋은 시계는 아무리 그냥 내 버려두어도 멈추지 않고 규칙적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시계가 자주 중단되고 고치고 손을 본다는 것은 이미 그 기능이 고장났다는 신호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법은 외부의 간섭이나 통제없이 스스로를 지탱해 나갈 수있는 강한 힘이다.

                툭하면 강제로 끼워맞추고 돌리는 법을 어느 누가 신뢰할 수 있을까?

                 

                어떤 국가라도 정부가 일을 하다보면 정부에 대해 많은 불만과 반대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능력이나 재능, 지식의 수준도 다양하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기에

                같은 내용이라도 정부와 크게 차이가 날 수도 있다.

 

                또한 행정부의 사람들이 공무를 잘못 수행하여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한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차라리 자기가 통치하면 그 보다는 훨씬 잘 할 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정부란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의 불만에 귀를 열고 이를 무시만 할 것이 아니라

                저들을 충분히 납득시키고 국정에 좋은 지표로 삼아야만 한다.

 

                좋은 정부는 우리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가치있고 귀중한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있도록 도와준다.

                좋은 정부는 국민들을 외부로 부터 안전하게 지켜 주고 국민들의 재산이나 권익을 보호해 주며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있는 자유나 권리등을 충분히 보장해 준다.

 

                국민이 자기의 정부와 정치에 무관심할 수록 항상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당연히 기존의 구조와 질서 속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고

                이들이 그토록 변화를 원치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 것이다.

 

                올바른 눈, 올바른 의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올바른 역사위에 서게 만드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국민들은 더 이상 정부를 바라보며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고 정부가 일을 열심히 할 수있도록

                감시하며 관심을 더욱 가져야 할 것이다.

                관심은 참여를 끌어내고 참여는 변화를 가져와 보다 나은 우리의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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