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돌아왔습니다.

 

 

 

바야흐로 선거철이 돌아왔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후보자들은 선거전략에 몰두하고

 

가는 유세장마다 수 많은 청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동원된 사람들은 한 소리로 일사분란하게 활력을 불어 넣고

 

각 진영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모으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저마다 자기들만이 제격이라며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상대방을 비방하고 온갖 재력을 동원하여 사람들에게 호소하기도 한다.

 

 

 

"투표는 탄환보다도 강하다"고 미국의 대통령 링컨은 일찌기 깨달았다.

 

 

 

투표하는 한 사람의 총알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기에 우리에게 투표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투표를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러한 때 필요한 것이 역사적 안목(歷史的 眼目)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나 사회를 볼 때 무엇이 필요하고 불합리한 것인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불의나 부도덕이나 고통은 없었는지

 

개인의 생활과 우리나라의 형편은 어떠한지 제대로 분별해야 한다.

 

 

 

과거 우리의 정권은 선거철만 되면 언론을 방패삼아 선거에 악용하기도 하고

 

지역대결이나 이념을 부추겨 여론을 조성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의 한반도의 문제는 남,북한 모두 국가 안보의 최대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안보를 움켜쥐고 국가는 북한을 자극시켜 정치에 악용해 온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사람중 소크라테스는 "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 고 하였고

 

간디는 " 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는 것 " 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잘 살고 바르게 살기 위해 일군을 뽑는다고 할 때

 

선거란 적임자를 가려내어 자기염원을 담아 그에게 부탁하는 날이다.

 

 

 

이 소중한 날에 나라의 심부름꾼을 뽑는데 나라와 국민들은 어찌되든지 

 

아직도 자기들의 세력에만 얽매여 무분별하게 투표하고 만다면 역사적으로 죄를 짓고 후회하고 말 것이다.

 

 

 

지난 날을 볼 때 선거란 자기가 당한 고통이나 불의한 실정에 대해 심판하고 경고하는 날이기도 하다.

 

그동안 쌓여왔던 울분을 마음껏 토로하는 심정처럼

 

자기도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이 때가 되면 언제나 표를 구걸하는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권모술수(權謀術數)라는 말처럼 후보자들은 표를 의식하여

 

사람들에게 경제를 살리고 나라와 지역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공약하기도 한다.

 

서민들을 찾아가고 이벤트도 해보며 호소하기도 한다.

 

 

 

또 어디선가 북한 얘기도 흘러나오기도 한다.

 

군부들도 동요하고 언론들도 떠들어 댄다.

 

언제부터 저들이 서민들을 생각하고 북한 주민들을 걱정하며 희망을 주었는지...

 

 

 

그 동안에도 자기들의 욕망과 안위만을 위해 지내오던 그들이

 

이제와 선거가 눈 앞으로 닥쳐오니 급하기는 정말 급하였나 보다.

 

 

 

우리 경제를 살리고 우리의 동포들을 살리자는데 어느 누가 싫어하고 반대하랴.

 

그러나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서민들이나 탈북자나 조선족모두 먼 나라 사람들의 취급을 받으며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 또한 싸늘하기만 하다.

 

 

겉으로는 한 민족, 한 동포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저들을 희생시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고 분열을 조장해 온 이들이 아니던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민감힌 이 때에 정치인들이 언론들의 눈치를 살피며

 

북한의 입장들은 도외시 한채 너도나도 이성을 잃고 자꾸만 문제를 만들고 떠드는 방식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실제로 북한의 상황이 몹시도 불안하다는 전제하에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될 것인지 지혜로운 방법은 모색하지는 않고

 

오히려 그들을 비하(卑下)하고 평가절하 하며 순진한 국민들의 감성을 울려 목적을 달성하려고만 하는지...

 

 

 

이러한 고통이 어디로 부터 왔는지...

 

왜 국민이 이러한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지...

 

과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국민들의 표심은 이제 저들을 향해 엄중히 조준하며 묻게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내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 나라, 내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나라, 어느 세계에 있든지 먼저 언행일치가 이루어지고

자기 조직을 발판으로 삼아 선과 덕을 이루어갑니다.

 

선악간 앞 뒤를 분별하지 못한채

맹목적인 행동과 순종은 그 조직마져 의심들게 만들고

그 이미지는 땅 밑으로 떨어지기 쉽상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애국(愛國)이라 말할때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애국은

세계인들이 추구하는 진정한 애국은 아닙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기 나라, 자기 조직, 자기 지역이 가장 잘 되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이기적인 마음의 총 결집체가 애국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다른 나라, 다른 조직, 다른 지역은 안중에도 없이

무턱대고 자기 나라, 자기 조직만을 사랑하는 애국사상이며

외치면 외칠수록 나라와 조직 사이의 갈등은 더 커지게 마련입니다.

 
 

 

 

진정한 애국이란 자기 나라, 자기 조직, 자기 지역이 자랑스러워

다른 것도 존중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평화로운 삶을 추구합니다.

 

과거 우리는 늘 강대국의 그늘 아래서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리만큼 냉대 받고 서러움 많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서 민족주의란

자기 생존을 지키려는 비장한 생존 본능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지역이나 학연, 지연등 "우리"라는 뿌리의식이 강한 민족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의식 문화"가 한번 잘못 사용되어질 경우 사회안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옵니다.

어떤이들은 의리를 강조하고 또 어떤이들은 생사를 결의하기도 합니다.

 

조직의 목적은 필요이지 조건은 아닙니다.

사람이 정의를 외면하고 부정을 감춰두면 그 조직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권력과 손을 잡고 권력이 부패하면 그 조직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만이 제일이고 남들을 무시하고 억압하고 죽이려는 조직은 강도들이지 진정한 조직의 본질은 아닙니다.

 

한국 사회의 내부를 깊숙히 들여다 보면

다인종, 다 문화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내 외국인들에게 비쳐지는 한국인들의 모습은

여전히 "우리가 남이가~,우리 나라, 우리 조직들"뿐이라는 이기주의가 많은 민족일 뿐입니다.

 

그것은 어느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집단화되어 마치도 자신들만이 제일인냥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남들을 무시하며 사랑의 공동체를 갈라놓았습니다.

 

민족주의, 파벌(派閥)주의란 당파를 갈라 주장하는 사람으로 기초교육이 전혀 되어 있지 않거나

주위 사람들로 부터 영향을 받아 자기들만이 옳고 다른 조직이나 사람들은 모두 틀렸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나라의 국민이라면 가난과의 씨름을 해야 합니다.

 

주변의 어려움을 보고도 모른체하며 외면하여 간다면

관광나온 외국인들과는 무엇이 다르다고 할 것입니까?

 

가난 자체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심을 갖고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와 북한사회, 그리고 우리의 어려운 이웃과 서민들이 모두다 "우리들"이라고 생각된다면

 

그들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피하지 아니하고 정면으로 맞서 그들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남북이 분단되어 60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끝없는 이념과 정치논쟁으로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다른 국민, 다른 종파, 다른 정당, 다른 소속인들은 다 그 길을 갈지라도

진정한 사람들은 결코 그 길을 동행해서는 안됩니다.

 

서민들과 북한을 포함한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하고서는 당신은 진정한 국민은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한 사람이라면 참된 세계인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문화와 민족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 나라의 법과 질서에도 순응하고

불의와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코 제 나라와 제 조직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소속의 얽매임에 시간과 부끄러움도 초월하고

그 선한 일을 위해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원수까지도 포용하며

더 큰 미래의 아름다운 꿈과 세계를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합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무섭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도 정당하게 쓸때만이 가치가 있고

힘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힘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힘을 정당하게 사용하면 정의가 되지만 힘을 부당하게 사용하면 불의가 됩니다.

 

오늘날과 같은 경쟁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는 힘의 논리입니다.

힘이란 무소불위(無所不爲)와도 같아서 절대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힘을 얻기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운동을 하는가하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쫒아 날마다 고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모두가 경쟁하고 이기려하다보니 사회가 자연 문란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쟁사회란 너무도 냉엄하여 거기에서는 승자만이 살아남고 패자는 몰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기에서도 진팀의 감독은 여지없이 방출되고 부진한 선수는 가차없이 교체해 버립니다.

이러한 경쟁사회는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가 아니라

힘 있고 능력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사회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시제도와 취업경쟁이 바로 이러한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경쟁사회의 힘이란 서로 균형이 맞아야 합니다.

힘이 어느 한쪽으로만 쏠리다보면 상대적인 약자는 언제나 손해보기 마련입니다.

양보와 배려, 타협이 없는 이상 대립과 갈등은 멈출줄 모르고

약자들은 언제나 낙오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의 국회 예산안 날치기 통과나 난장판 사태들을 지켜보면서

저들이 국민들을 위해 일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들의 정당과 목적만을 위해 힘을 쓰는 것을 바라보면서

마치도 기회를 엿보며 사람들의 소중한 재물을 빼앗아가는 강도와 같이

정치가들이 국민들의 눈치를 살피고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키며 국회를 난장판으로 몰고가

급기야는 사회불안을 야기하고 위협하는 모습들이 강도와 다를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방법이란 힘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쉽게 얻어진 것은 쉽게 없어지기 마련입니다.

급할 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듯이 중대한 문제일수록 더욱 자중하고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야지

국민들의 힘을 그런 곳에 허비하라고 준 것이 아니지 않쟎습니까.

 

오늘날과 같이 남북이 대치되고 국가의 경제가 몹시도 어려운 이 마당에

언제까지 그렇게 서로가 당리당략만을 위해서 치고 받으며 일하실 의향이십니까?

권력자의 힘은 정치가들에게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요?

 

역사적 충고/

"충신은 도끼를 맞더라도 임금의 잘못을 지적해야하고 솥에 넣어 삶아 죽이려해도 옳은 말은 해야한다."

                                                                                                             중국 진나라 갈홍 "포박자"

"위대한 작가는 군자와 같이 사회의 부정을 고발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

 

 

학생들의 등록금과 일자리 문제 !!

 

 

 

 

 

 

요즘 우리 사회의 고민이 심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자리문제와 학생들의 등록금 문제에 이르기까지 퍽이나 다양합니다.

 

교육을 백년지대개라고 말하면서도 우리의 교육은 백년은 커녕 당장 눈 앞의 실리를 위해서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배워야 할 자녀들에게 무상교육은 못 시켜줄 망정 비싼등록금 잔뜩 올려놓고 이제와 선심쓰듯 돈을 빌려주며

이자를 챙겼으며 사회로 나가 속히 갚으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것이 옳은 것인지 무감각하기 그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돈이 없으면 배울 수가 없고 배우지를 못하면 취직할 수가없고

취직을 못하면 돈을 벌 수도 없는 악순환 현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모순은 그대로 현실과 맞물리면서 학생들이 좀 더 깊은 학문을 통해 진로를 모색할 것도 같지만

현실은 돈이 되지 않는 학문, 전문교육의 인기는 사라지고 오직 돈이 되는 학문만이 인기가 있어서

대체로 기능인간으로서의 역할로 살아갑니다.

 

학생들의 취업문제는 더욱 더 심각합니다.

과거에는 대학을 나와야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직장이 오늘날은 오히려 학생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한 해에도 수십만명의 학생들이 졸업하여 일자리가 필요한 지금

결국에는 수 많은 젊은이들을 실업자로 내 몰아야 할 형편입니다.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배워 온 분야가 다르고 적성에 맞지않는 직장에 취업하기란 거의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저들이 눈이 높아 일부러 취업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하는 우리 현실문제가 더 큽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저들이 탈피하는 길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거의가 불가능하고

돈을 쉽게 벌기 위해서는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가 알바를 하고

단순노동이나 성(性)을 팔아서라도 돈을 벌어야만 하는 그들의 심정이 안타깝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시위를 하지 않을 수없는 저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며

결국 우리 사회를 향한 하나의 경고 소리는 무시되고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밤낮 시위만 하느냐"고 무심히 지나쳐 버린다면

그들은 과연 어느 나라 사람이고 올바른 대책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없습니다.

 

일자리의 문제는 결코 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가정의 형편으로 일찍부터 진학을 포기해야 하는 고등학생들...

나라의 부름으로 군에 갈 수밖에 없었던 청년들...   과연 그들의 장래는 누가 책임져 줄 것입니까?

 

그들을 양육해야 할 부모들의 심정 또한 안타깝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들이 젊은이들에게 밀려나 직장을 잃고 일자리가 없어 방황해야 할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임시직이나 막노동판에 머물면서

도박이나 복권을 사서라도 인생역전을 꿈꾸려는 사람들이 늘어만가고 있습니다.

 

결국 사람이 돈이 없으면 배울 수도 없고 배우지를 못하면 취업할 수도 없는 현실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지

국가와 경제, 문화,종교계의 범 사회적인 문제로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끝 없는 일자리 늪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불안하고 경제가 어려울수록 범죄가 늘어가고 자살이 늘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가진 자들이 좀 더 양보하고 배려하지 않는 이상 이 사회의 일자리는 없습니다.

아무리 수십만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진다해도 결국 그 자리의 주인은 가진 자들에 의해 채워집니다.

 

서민들의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일자리 운동 "과 같은 의무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이상

이 사회는 살기 힘들고 고통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지금은 우리 사회의 가진 자들만이 주장 할 때가 아닙니다.

절제하고 겸손하며 서민들을 먼저 배려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사회에 힘 없는 자들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을 위해 충성을 다하지만

힘 있는 자들은 힘 없는 자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여왔을까요?

 

힘 없는 자들이 언제나 기를 펴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제는 모두가 협력하여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세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공정한 사회 속의 조화로

 

 

 

 

 

인간의 몸은 여러지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느 지체는 보이고 어느 지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는 지체는 없습니다.

 

다양한 지체들이 서로 나뉘어 자기의 중요한 역활을 다할 때

인간의 몸은 비로소 모든 일을 할 수있게 됩니다.

 

우리의 정치,사회,문화,종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다양한 기관들이 제 위치에서 자기의 사명을 다할 때 사회는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무는 토양으로 부터 양분을 취하고 토양은 태양으로 부터 필요한 것을 받습니다.

 

스포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팀웍을 중시하는 경기일수록

모든 선수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제 기능을 다할 때 성공적인 경기를 치룰 수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하나의 유기적관계를 통해 통일성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른 지체가 실족하면 또 다른 지체역시 고통을 받기 마련입니다.

 

상부상조(相扶相助) 란 말도 있듯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서는 서로에게 의존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언제나 기득권자들의 계보(系譜)이며 승자들의 계보를 따라 이루어집니다.

기득권자들은 그 기득권을 지키기위해 언제나 안간힘을 씁니다.

 

보이는 것이라고 칭찬하고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외면하지 마십시요.

 

전통적으로 겉만을 중시하는 사회일수록

성패는 지체와 무관하게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지할 수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단지 나타난 것만이 제일이고 감추어진 재능은 하챦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약하게 보이는 지체일수록 오히려 더욱 더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눈썹이 있어 눈을 보호하고 발톱이 있어 발을 보호할 수있는 것처럼

사회의 질서와 환경, 정리에 이르기까지 아무나 감당할 수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사회는 하챦은 자들을 무시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성공의 영광뒤에는 기득권자들이 차지 합니다.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존중을 갈구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누구나 쉽고 좋은 자리에서 일하려고 하지 어렵고 손해가 되는 일들은 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모두가 화려하고 안정된 자리만을 고집한다면 누가 이 일을 성사시킬 수있습니까?

 

공정한 사회에서 기득권자들은 더 많이 양보를 해야 공정이 이루어집니다.

공정한 사회의 원칙은 조직에 속한 것으로 만족하지말고 동료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일입니다.

 

동료를 실족케하고 전체를 분란케하는 모습은 결코 바른 것이 아닙니다.

 

경기하는 자가 자기 義를 드러낼 때 결국 다른 사람들까지 이용하는...

자기 욕망을 채우려는 비열한 사람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것입니까.

 

세상은 두 부류의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행동하는 사람과 실력있는 사람입니다.

행동하는 사람은 조직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뛰어드는 사람이고

실력있는 사람은 누구나 인정할 수있고 목적을 위해 최고의 전문가라야 합니다.

 

어느 것만이 앞서가도 안되고 어느 것만이 부족해도 안됩니다.

진정한 실력자란 자신의 할 일을 다해놓고 부족한 것 뿐이라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아름다운 조력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자살(自殺)! 꼭 해야만 합니까?

 

 

 

 

 

요즘 우리 주변의 자살(自殺)문제가 사회적으로 적쟎은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 10월 7일 밤 대중들에게 인기강사로 유명한 최윤희씨가

오랜병마로 시달리다 견디지 못하고 남편과 함께 동반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번 그의 자살이 큰 충격을 주는것은 그가 단지 유명인이라서가 아니라

행복을 전달하는 행복전도사요, 공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명인은 곧 공인(公人)이라 할 수있습니다.

 

공인이란 넓은 의미에서 사회의 구성원은 누구라도 그 재능과 영향력을 인정하여

국가나 사회가 그들에게 공적인 일을 부여하여 동경과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 자살을 두고 과거와 마찬가지로 자기신변의 두려움이나 고통에 따른 괴로움의 표출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있을까요?

 

죽음은 단지 자신과의 마침이지 자신을 둘러싼 기대열망에 자살만이 능사인가라는 가치판단이 따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자신을 사랑하고 보호하려는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자기자신만이 아니라 사회전체에 해를 끼치는 것과도 같습니다

 

벨기에의 극작가 메테를링크가 지은 "파랑새"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오누이는 파랑새를 찾아 기억의 나라로 행복의 나라로 미래의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찾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돌아와보니 그들이 찾던 파랑새는 집안에 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행복이란

무지개너머 높은 산과 깊은 물을 지나서 찾을 수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비하하며 공연히 자신의 처지를 한탄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강 가옆에 사는 사람이 어찌 물의 귀중함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이란 사막의 오하시스요, 한 줄기 생명수입니다.

 

인간은 항상 소유하고 있지 못한 것들에 대한 헛된 욕망과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싫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실제로 인간은 어려울때보다도 부요할 때가 더욱 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좋은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를 얻고 나면 좀 더 가지고 싶고, 좀 더 먹고 싶고, 좀 더 누리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차라리 어렵고 궁핍할 때에는 그러려니하며 모든 것을 체념할 수 있지만

자기가 여유로울 때에는 언제나 유혹에 넘어가기가 쉬운 법입니다.

 

마음이 여유로울 때에는 교만해지거나 유지하려고 하는 고민이 따르고

자기가 어려울 때에는 자신의 신념마져 흔들릴 수있는 못된 유혹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보람된 일에는 기뻐하지만 고통과 어려움앞에서는 괴로워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행복도 모르면서 어찌 타인의 처지를 알겠습니까?

 

우리 사회에서 남에게 인정받는 길이란 일상생활에서 더욱 더 義를 드러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과연 義의 것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그것이 義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인간의 고상한 능력을 신봉하여 스스로 만족을 얻으려는

타인을 향한 진정한 義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義의 뜻이 아닌 선행이란 자기만의 영달이지 그의 고통또한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공인이란 한마디로 義의 뜻을 전하려하는 자들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그들의 업적을 인정하고 격려하여 그들에게 붙여주는 호칭이 그것입니다.

행복을 더 많이 알리라는 의미에서 행복전도사요, 기부를 더 많이 알리라는 의미에서 기부전도사로 붙여줍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하며 동정을 보내기도 하고 그래도 자살만은 안된다고 타일러 보지만

과거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받아온 사랑에 견주어 보면 그같은 고통과 비천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행복이란 고통을 초월할 때 그 진가는 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남에게 인정받으려하거든 먼저 어떠한 형편에든지 스스로 자족하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이 세상가운데에는 그보다 더 많은 고통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 동안 당신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당신을 기대하는 많은 열망에 더 이상 의지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왜 자살이 어리석은 것일까요?

열심히 살지못한 순간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열심히 사십시요. 그것도 인간의 사명(使命)입니다.

자살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대신에 살아야 할 공포가 존재합니다

 

죽음에 맞서 그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용기있는 행동일 것같지만

그러나 죽음보다 살아갈 일이 더욱 더 무섭고 두려워질 때

어떻게든지 살아서 대처해 가는 것이 더욱 더 용기있는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生命)은 생물이 기본적으로 가지는 속성이지만

인간의 생명은 살아가라는 하늘의 명령이고 자살의 반대는 살자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공정(公正)과 정의(正義)

 


 

요즘 우리 사회의 공정과 정의를 두고 화두가 뜨겁습니다.

공정에 대한 개념조차 세우지도 못하였고 알 수도 없다는 사람들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말은 많지만 따지고 보면 실상은 자기의 스팩트럼에 따라 주장할 뿐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공정을 모른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들이 기득권자로써 엄연히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전에 공정(公正)이란 공평하고 올바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공명정대"라는 표현이 더 설득력있습니다.

공명정대(公明正大)란 말은 마음이 공평하고 조금도 사사로움이 없이 바르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을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결론 내릴때 주로 쓰여지는 말입니다.

 

공정이란 의미는 누군가의 판단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할 때 그 공정은 "의(義)" 를 가리키는 것으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는 어떤 계약에 의하여 의롭게 형성되는 표준이 됩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단어를 가져오고 어휘만을 바라본다면

개념의 혼돈을 가져올 수있습니다.

 

이 관계가 먼저 이루어진 다음에야 공평과 공의가 드러나고 이러한 의라야 그 공동체를 보전해 갈 수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계를 설정해 놓아도 여전히 사람은 그 관계를 깨닫지 못하고 인정하려고도 들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가 정의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정의란 무엇일까요?  정의란 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물은 흘러 시내를 만들고 시내는 흘러 흘러 강을 이루어 마침내는 바다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자연적 원리가 공정의 법칙이며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과 욕망으로 이러한 질서를 파괴하고 환경을 오염시키고 말았습니다.

물이란 마치도 변덕쟁이와 같아서 길따라 마음따라 자유롭게 권모술수를 부립니다.

사회또한 변화무쌍하여 사람의 생각따라 이리저리 달라지기도 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라는 표현대로 흘러가기에 따라 흙탕물이 되고 깨끗한 1급수도 됩니다.

위에서 마구 취하고 마구 먹고 마구 쓰고 마구 짓밟는 까닭에

아래는 늘 불만과 고통이 쌓여가고 도덕도 염치도 사라지며 강자만이 살아남는 세상이 되고 만 것입니다.

 

물이란 인간에게 있어서의 생존수단이요, 생사와도 직결이 됩니다.

정의는 생존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무엇이 옳으냐 말할 때에 정당한 목적이 아니라면 정의가 될 수없습니다.

 

만일 기업이 물건을 판다고 할 때에 기업은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합니다.

수단이 잘못된 장사는 진정한 정의가 될 수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정의라면 기업들은 목적을 위해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서슴치 않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권이 무시되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무시당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물질적인 빈곤은 어느 정도 참을 수가 있지만

학력이나 신분, 외모에 따른 인간의 차별이나 불공정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공정한 사회의 기준이란 무엇입니까?

사회가 추구하는 공정한 게임의 룰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려내면 됩니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안의 운동경기에는 게임이라는 룰의 원칙이 있습니다. 

종목을 택하여 편을 나누고 룰을 정하여 규칙과 방법에 따라 게임을 하는 것입니다.

 

게임을 하다보면 종종 시시비비가 있게 마련입니다. 누가 그 시시비비를 가려주어야 옳을까요?

판정의 기준에는 과거의 방식이나 새롭게 바꾸어진 기준이 판정이 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누구나 굴복할 수있는 기준이라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되는 불공정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가진 자는 자기들의 조직과 도구를 이용하여 가지지 못한 자를 힘으로 억누르고 제압합니다.

 

우리가 흔히 게임이 공정해야 된다고 말할 때 공정은 힘의 균형이 서로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힘이 너무 한쪽으로만 쏠리다보면 상대적인 불만이 터지게 마련입니다.

 

권력자나 공직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의 편에서서 경기를 운영할 때 게임은 공정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직장의 대표들이 노동자들을 생각하고

경제가 서민들의 편에서서 집행 된다면 사회는 한층 더 밝아질 것입니다.

 

게임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은 가진 자는 가지지 못한 자와의 형평에 맞도록 팀을 제 정비하고

나누고 포기하고 내려놓을 때 게임이 공정해지는 것입니다.

 

자연의 질서는 스스로 정화하고 조절하는데 왜 인간만은 할 수가 없습니까?

 

과거 우리는 국가안보와 사회안정이라는 명분하에 자유와 인권이 유린되고 양심이 파괴되었으며

경제발전이라는 이유로 착취와 억압을 당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이르기까지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들을 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며 도덕적인 사회라고 말들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두 정의를 그토록 원하면서도 왜 이 땅에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먼저 사람들이 정의를 바라보는 기준이 다르고 부정을 옹호하고 은폐할 수있는 여지가 많다는 것이고

기득권자들은 본능적으로 자기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이기심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직자일 수록 보다 높은 도덕성과 청렴이 있어야할 것은 보지 못하고

능력만 갖추면 모든 것이 다 용서가 되는 현실이라면 공정이란 약자에게는 늘 손해가 되기 마련입니다.

 

사회악에는 크게 자연악과 도덕적인 악으로 나뉘어 볼 수있습니다.

자연악(自然惡)은 홍수나 질병같은 자연재해등으로 인간밖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고

도덕적인 악은 도덕적으로 옳지못한 인간이 다른사람과 사회에 대해 해를 끼치는 사회악을 뜻합니다.

이러한 악은 서로 깊은 상호연관이 있습니다.

 

불량식품을 만들어 팔면 그것을 섭취하는 사람에게 질병을 유발하듯이

인간이 오염시킨 물은 이 땅위에 영향을 주고 자연의 질서를 파괴시키고 맙니다.

 

이러한 사회악은 또 다른 측면에서 구조악이라고 볼 수있습니다.

 

각종 부정과 비리, 뇌물, 정치사찰, 경제부조리등과 같은 이러한 구조속에서

인간은 어려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양심선언등으로 불만을 토로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 구조악을 없앤다는 말이요. 사회를 변혁시킨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아무리 정의를 부르짖어도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정의란 진정한 정의는 아닙니다.

억압하고 짓누루고 죽이려는 정의는 절대로 정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일찌기 라인홀드 니이버는 정의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떤 정의이든지 그것이 정의일 뿐일때는 얼마 안가서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전락되고 

정의는 정의 이상의 그 어떤 것에 의하여 구출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구조만으로는 공정한 사회는 실현될 수없습니다.

 

이 땅의 모든 제도와 불완전한 모습이 사라지고 사랑과 정의로운 시선으로 문제를 해결하여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 질 때만이 정의로운 사회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월드컵으로 본 이 시대의 주인공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공화국"이란 글에서

                      국가나 사회를 하나의 올림픽 경기장으로 비유했습니다.

 

                      올림픽 경기장에 가면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과 선수들, 관중들이 모인다고 했습니다.

 

                      상업을 위해 찾아 온 사람들은 운동시합에 돈을 걸거나 물건을 파는 사람, 광고주들이고

                      경기를 위해 찾아 온 선수들은 어떤 의미에서 명예나 인기를 누리려는 목적이 있는 사람들이며

 

                      관중들은 경기를 통해 울고 웃는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하나의 국가안에도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도박사들과 같이 사업을 위해 돈을 벌려는 사람, 재벌들이 있는가 하면

                      경기장의 선수와 같이 인기나 명예를 얻으려는 정치인, 기관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사를 바라볼 때 올바른 눈이 있습니까?

                      우리의 사회, 국가안에서 역사의 주인공들은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대체로 겉으로 나타난 것만이 진실이며 감추어진 세상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난 2002년, 2010년의 월드컵 축구 경기가

                      한국의 자랑스런 4강, 16강 달성이라는 업적을 남긴채 막을 내렸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뛰어준 홍명보, 유상철, 안정환 선수를 비롯해서

                      박지성, 박주영, 이청용 선수등 감독님들의 노고에도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 그들은 한국 축구사의 주역들로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역사 현장에서 이번 월드컵 축구의 진정한 주인공들은 누구였습니까?

 

                      기업인들입니까? 선수들입니까? 아니면 방송인들입니까?

                      이미 그들은 충분히 그 댓가를 받았고 인기와 명예를 한 몸에 누렸습니다.

 

                      월드컵 경기가 시작되던 날 밤을 새워 공원에서 거리에서 집안에서 아무런 댓가없이

                      목이 터져라 " 대 ~한민국"을 힘껏 외치던 그 때의 국민들의 응원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오히려 역사의 현장을 지켜 보면서 때로는 박수를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분노를 나타내며

                      때로는 함께 웃고 함께 울며 서로가 어울려 경기를 관람하고

                      성원을 보내주는 관중들이야 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주인공이 아니겠습니까?

 

                      이 시대의 주인공들은 선수들의 모습을 예리한 눈으로 주시하던 관중들과 같이

                      오늘날 우리 사회 역사를 예리한 눈빛으로 지켜 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도덕적인 혼란, 가치관의 혼돈, 극단적인 이기주의 속에서

                      서로 증오하고 미워하는 적대감이 팽배해진 사회입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 역사의 눈으로 그들을 이해하며 바라보아야 할까요?

                      올바른 눈, 올바른 의식은 우리들로 하여금 올바른 역사위에 서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사회를 실망시키거나 분노케 하지 않고 자유케하며 감시하고 

                      희망을 줄 수있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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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의 인사문제
           

 

                   우리의 가정에는 언제나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있습니다.

                   큰 그릇, 작은 그릇을 비롯하여 연약한 그릇, 귀한 그릇들도 있습니다.
 
                   이 그릇은 모양도 다르고 질도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그릇들이 적절하게 사용됩니다.

 
                   그릇이란 깨끗함이 생명입니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할지라도 그릇들이 깨끗하지 아니하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천할지라도 그 그릇이 깨끗하면 쓸모가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고도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그 기관의 인사에 대한 하나의 정당한 평가기준을 가릴 때

                   전통적으로 사람에 대한 학벌이나, 경력, 기술등이 우리의 능력이라고 보았다면

                   그 사람에 대한 덕망이나 도덕등은 우리 사회의 자질기준으로 보았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능력입니까? 자질입니까?


                   어느 나라, 어느 단체, 어느 기관내에도 그릇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국가와 회사들은 어느 집의 가정과도 같습니다.

                   이 가정안에도 여러 종류의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대통령을 비롯하여 주요 정부인사, 공무원, 회사원들은
                   각기 그 능력과 인격에 따라 인재들을 골고루 사용하게 됩니다.

                   이 나라에 사용되는 인사의 기준에는 절대적인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인사들이 모두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TV나 신문, 언론들을 보면 검찰들에 이끌려 등장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온갖 변명들을 늘어놓는 것은 결코 낯 설은 풍경만은 아닙니다.


                   그 이유란 한 마디로 그들이
올바르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릇이란 깨끗해야 합니다.

                   그릇이 더럽고 불결한 상태로는 더 이상 그릇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라고 해서 모두다 똑같은 그릇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公認)된 그릇이어야 합니다.

                   한 번 더럽혀진 그릇은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불신감을 주며 각종 원인모를 질병에 오염되고 맙니다.
                   이러한 질병은 무엇이든지 만반의 위생태세를 갖추라고 경고하는 일종의 제동장치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부정이 파헤쳐지면서
우리 사회에 부정이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부정들은 많았지만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거기에 동조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부정이 감추어질 수 없는 사회야말로 밝은 사회입니다.
                   이 사회를 밝히는 빛이 밝아질수록 부정은 점차로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사회를 밝히는 빛이란 
국민들의 올바른 의식이라고할 수있습니다. 

                   국민이 깨어 있으면 정치인들이 국민을 속일 수 없고

                   과학자들이나 의학자들이 국민을 속일 수 없으며
                   기업인들이 올바른 기업을 운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우리사회는 온갖 도덕문제로 점철되어져 있습니다.


                   때때로 선거때나 청문회가 시작되면 사람들이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으로 거짓과 과장들이 난무하고

                   막대한 돈을 끌어다가 로비하는 모습에서 무슨 바른정치가 나오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를 들여다 보면
땀흘려 돈을 버는 사람, 노력하는 사람이 제일 모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은 자신의 신분이나 이권을 이용하여
일찌감치 청탁이나 투기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쉽게 벌 수 있는 경제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덮고 있는 불신과 부조리는
한 마디로 예의와 염치를 모르는 그들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회란 바로
이 부끄러운 것들을 청소하여 단순한 삶, 깨끗한 삶이 되도록

                   더욱 준비하고 자숙하여 아름다운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모두가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아고라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799672



                    한국 전쟁과 평화
                     

                                            인간이 겪는 이 땅의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가

                              단절과 전쟁일 것입니다.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며
                              많은 것을 반성하게 하고 역사를 새롭게 보도록 자각해 주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통하여 전쟁의 뜻과 원인을 깨달아 알 때
                              거기에 진정한 평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동족 상잔의 피 비린내나는 전쟁을 겪었으면서도
                              우리는 아직도 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반성하지도 아니하였고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으며
                              오히려 저들을 원망하고 비난하며 멸공을 다지는 의식만을 키워왔던 것입니다.

                              전쟁을 치룬지 어느덧 반세기가 지났지만
                              4.19의거를 비롯하여 수 많은 정변(政變)을 겪으면서
                              우리는 여전히 시련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이 땅의 진정한 평화는 오는 것일까요?
                              이 땅에서 일어난 전쟁의 책임을
                              언제까지 계속 저들에게만 전가시키면서
                              그들을 증오하고 안보만을 부르짖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동안 우리는 전쟁을 치루면서

                              무력을 증강하고 안보를 강화하고 체제와 교육만을 증가시켜 왔습니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 교육일까요?
                              어떤 이념을 반대하는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될 수가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얼마나 좋은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 시대에 실현할 것인지를 교육할 때입니다.

                              안보의식만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난하고 저주하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 분열의 역사를 지양하고
                              화해를 이루어 갈 수 있을까를 연구할 때입니다.

                              계속 안보의식에만 사로잡혀있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피해망상에만 사로잡혀 있는 그
들과는 무엇이 다르다고 하겠습니까?


                              언제까지 안보만 부르짖다고 있다가
                              또 다시 전쟁을 치뤄야만 하겠습니까?

                              이제는 과거에 가졌던 모든 증오심들은 떨쳐버리고
                              새로운 평화의 시대를 향하여 모두가 힘있게 나서게 될 때
                              거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 게 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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