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인가?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집권당이면 집권당답게

                         언행을 똑바로 하고

 

                         무엇이 옳은지

                         똥인지 된장인지

 

                         신중히 판단하여

                         코끼리처럼 일을하고

 

                         야당들이면 야당답게

                         자세를 똑바로 하고

 

                         무엇이 나쁜것인지

                         정의인지 불의인지

 

                         두눈을 크게뜨고

                         맹수처럼 덤벼들라

 

                         당신들이 무시하는

                         국민들을 뭘루보고...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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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지도자는 아닌가

 

 

 

 

                                       지도자라면 반드시 비판적인 안목을 가져야 한다.

 

                               또한 지도자들은 멈춰 서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며

                               신중히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하고

                               이것저것 비교해가며 균형을 맞출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추정된 결론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쉽고 간단한 기존방식을 고집하는 지도자가 있고

                               능력은 없으면서 단지 힘, 자기의 세력만을 믿고 행세하는 지도자도 있다.

 

                               지나치게 어느 한 편에 치우친 능력만을 갖춘 지도자는 아닌지...

                               부하들이 제안할 때 그 속에 감추어진 목적도 모르면서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있는 통찰력은 있는지...

 

                               그것도 이것도 아니라면 그는 우리의 진정한 지도자는 아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한국전쟁 기념의 방향

 

 

 

       전쟁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퍽 오래된 것이다.

      인간은 평화를 그토록 원하면서도 한편에서는 전쟁을 준비하는 모순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현 상황은 준 전시상태요, 긴장감이 나돌고 있는 현 상황에 따라

      대한 민국의 건장한 신체의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 씩은 국방의 의무를 거쳐야 한다.

 

      한국전쟁 수십년을 맞이하면서 TV나 신문등 각종 언론들이 쏟아내는 것들은 여전히 전쟁에 관한 기억들 뿐이지

      어떻게 하면 평화를 위해 안정을 이룰 수 있을까 하는 진지한 논의는 아무 것도 없다.

 

      평화에 대한 교육은 전혀없고 반공교육을 더욱 강화한 것만이 한국 전쟁을 기념하는 행사가 전부가 되어 버렸다.

      이념과 사상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아무런 절실한 것이 되지를 못한다.

 

      이미 굳어질 때로 굳어져 버린 기성세대에는 기대할 수 없고 다음 세대에나 통일을 기대해 볼 수밖에 없는데

      어릴 적부터 철저하게 반공, 이념교육을 받고 자라난 저들앞에 과연 평화는 올 것인가?

  

      평화와 통일의 문제는 이러한 정권의 이해에 얽매인 당사자들이 아니라

      순수한 민간인 단체들로 구성된 시민들이 주도해 나가야 함이 옳다.

 

      실제적으로 한반도의 전쟁은 남북간의 현실상 일으킬 수없을 것이 확실시하다.

 

      그것은 중국과 러시아를 등에 업지 않고서는 극복할 수 없다는 북한의 현실과

      남한은 국제사회의 동의와 미국의 지원없이는 섣불리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시대로 올라가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과 독일간의 연합국의 전쟁이었다.

      전쟁도발에 대한 응징으로 독일은 동서양맥으로 분단되어야만 했고 

 

      일본에 대한 응징역시 일본열도에서의 분단이 자연히 이루어졌어야 옳았지만

      미국과 러시아는 한반도를 강제분단조치 시켜버렸다.

 

      그로 인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하여

      우리는 동족 간의 뼈아픈 대리전쟁을 치뤄야만 했고 약소 민족의 서러움을 맛보기도 했다.

 

      어느 덧 남북의 집안 싸움은 더 이상 우리만의 문제가 안되게 되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염려하는데 감상적이지 않을 부모는 없다.

      자기 식구에 대해 감상적인 것은 지극히 당연한 문제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민족에 대해 감상적이지 않고 냉철하게 사태만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너무 야만적이고 가족이기를 포기한 잔인한 행위와도 같다.

 

      이제 우리는 통일문제에 있어서 보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우리의 통일에 대한 방식은 "철저히 고립된 체계"안에서 지나친 남북간의 문제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주로 정보에 원활하지 못하고 자기 주장이 지나치게 강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가장 열린 마음과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행동으로 옮길 때만이 가능하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당장이라도 전쟁날 것같은 분위기를 만들며 나라를 지배하는 통일방식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통일은 우리와 우리민족을 살리기위한 최대의 방편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민족구성원 어느 누구도 희생되지 않고 올바른 평화로운 방식에 의하여 진행되어져야 한다.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개인적, 국가적 고통과 함께 막대한 경제적 부담이 예상될 수도 있다.

      반세기가 넘는 동안 서로다른 이념과 체제아래 서로다른 삶을 보내왔기에

      사회적으로도 많은 갈등과 혼란, 불편이 예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우리 역사가 저지른 어리석음과 무 책임에 대한 반성의 비용이며

      나아가 통일과 번영에 따른 반드시 지불해야 할 수업료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공동번영과 세계평화통일이다.

 

      우리는 지난 남북 분단으로 인하여 동족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겪어왔고 마음의 분단까지 겪게 되었다.

      이로 인한 피해는 서로를 사랑하는 대신에 미움과 증오, 끝없는 반목을 가져왔다.

 

      우리는 후손들에게 민족분단에 따른 더 이상의 전쟁 공포와 민족 희생을 물려주어서는 안된다.

 

      그동안 우리는 지나치게 국가 중심주의가 강해졌으며 이기적이고 투기성 자본에 의한 경제의식이 많아지고

      사회적으로는 퇴폐와 소비에 의한 문화 중심산업이며

      안보적으로는 과도한 군비경쟁에 도취되어 제국주의적인 성향에 가까워졌다.

 

      이러한 불완전한 사회를 속히 탈피하여 어느 선의 안보력을 바탕으로 상호의존적인 평화체제를 형성하고

      지역마다 따스한 공동체가 다시 살아나는 사회로 회복되어야만 한다.

      

      지금 우리가 할 수있는 일이란 튼튼한 국방과 외교력은 시급하다.

      주변 4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민족 자존과 번영의 힘을 스스로 유지하는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우리 사회내에서 일어나는

      지역및 계층간의 갈등해소와 화합을 이루어가는 일 역시 당장에 시급하다.

 

      민족의 이념과 갈등의 제거없이는 이 땅에 진정한 평화란 없다.

      증오와 분노가 자리잡고 있는 한 우리 사회에 진정한 평화란 찾아 올 수가 없다.

 

      이 갈등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제2, 제3의 연평해전, 금강산사고, 천안함사고와 같은 사건들이

      언제 또 다시 재발할 런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국가의 흥망성쇄는 국민의 신의에서 나온다.

      국민이 정치인과 정부를 믿지 못할 때 그 어떤 강한 군대나 경제도 월남 전의 패망과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민족 양심의 순화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민족의 양심으로 거듭나야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평화와 행복의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는 희망의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깊은 안목으로 멀리 내다 보라

 

 

 

 

 

             그 나라의 과거를 알려면 오늘의 어른들을 보면 되고

          그 나라의 미래를 알려면 오늘의 청소년들을 보면 되고

 

          그 나라의 현 주소를 알고 싶다면 지금의 정치인들을 유의깊게 살펴보라

 

 

          그 사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불의가 판을 칠 때 거기에는 질서가 없다는 증거이다.

 

 

          질서가 없는 시대는 참으로 불행한 시대이다.

 

          질서가 없으면 삶의 기초가 흔들리고 나아갈 방향을 잃게 되며

          온갖 악이 판을 쳐서 결국 그 사회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국 사회는 돈과 권력이면 무엇이든지 최고라는 욕구가 넘쳐나는 사회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이기고 싶다는 경쟁심리가 사회적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

 

 

          정치는 개판, 경제는 쓰러질 판, 사회는 먹자판, 지역간에는 싸움판이 팽배해져

          공동체 구성원간의 갈등이 그칠 날이 없다.

 

 

 

          지난 MB정부가 새롭게 출범하였을 때 나는 그만 잠에서 두 사람의 꿈을 동시에 꾸었다.

 

          한 사람은 MB의 모습이며 또 한 사람은 바둑의 신산 이창호 국수였다.

 

 

          먼저 이창호 국수가 꿈속에 나오더니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으며 서로는 도란도란 얘기 꽃을 피웠다.

 

 

 

          얼마 후에 MB도 꾸었는데 그는 공원에서 내게로 다가와 악수를 건넸으며

 

          어디에선가 여학생들이 몰려오자 그는 그 곳으로 이내 사라져 갔다.

 

 

          바둑과 정치는 모양만 다를 뿐 서로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결코 서둘러서도 안되고 욕심을 내어서도 안된다.

 

 

 

          모두가 다 알다시피 바둑의 묘미란 포석과 끝내기에 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할  지라도 기본이 되어 있지 못하다면 그 결과란 뻔한 것이다.

 

 

          사람이 하수 일수록 자기 것만을 보게 되고 처리하기에만 바쁘며

 

          진정한 고수 일수록 여유있게 몇 수 앞을 내다보며 자기의 길을 나설 뿐이다.

 

 

 

          지난 MB시대를 돌이켜 보면  MB정부가 막 출범하였을 때 그는 과연 세일즈맨의 귀재, CEO의 리더답게

 

          그의 동작 하나하나는 빈 틈이 없었다.

 

 

          얼굴에서는 광채가 더욱 빛났으며 충분히 상대를 제압시키고도 남을 강한 포오스도 느껴졌다.

 

 

 

          MB정부를 떠 올릴 때 우리는 어쩌면 그 인사들이 하나같이 많은 실력과 지식과 신앙을 겸비한

 

          덕망있는 자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만이 한 시대를 책임질 수 있는 진정한 지도자의 요건은 될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그 시대와 역사를 통찰할 수있는 안목들이 너무도 부족했다.

 

 

          한 시대의 지도자가 안목(眼目)이 없을 때 그 나라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도덕함과 과소비, 폭력의 난무는 지도층들의 역사의식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이다.

 

          안목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그 보는 시야가 매우 좁고 편협(偏狹)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멀리 보지못하고 눈 앞의 작은 이익에만 집착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가 쉽고

          잘못된 정책들을 수립하기가 일쑤이다.

 

 

 

          지난 정부에서 거행된 정책상의 난맥들을 보라!

 

          아름다웠던 4대강의 모습들은 어떠했나?

          뉴타운은 어떠했나? 방송언론은 어떠했나? 국정원의 활동은 어떠했나?

 

 

 

          어디 그 뿐이랴

          그 시대는 너무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 마디로 불 도우저 시대였다.

 

 

 

          "제발 침체된 우리 경제를 회복시켜 달라"며 많은 국민들과 교계가 한 소리로 그에게 일을 맡겼건만

 

          그는 임기 내내 모든 인사들을 고소영(高所領)내각으로 채웠고 정책들은 일사 분란하게 막무가내식이었다.

 

 

 

          이에 화가난 여당도 야당도 많은 국민들도 정부를 향해 "어쩌자고 그렇게 하였느냐"며 호되게 꾸짖었지만

 

          정부는 귓등으로만 들을 뿐 본체만체였다.

 

 

          급기야는 국민들이 일어나 광장앞에서 촛불들을 밝히고 시위하자

 

          이를 간파하고 눈물을 보였지만 그 때뿐이었다.

 

 

 

          오랜지를 오뢘지로 지적하고 철 지난 용어들은 새로운 유행으로 대체시켰으며

          건물은 학원으로 바뀌고 옛 동네들은 뉴 타운으로 둔갑되어 비싸게 팔려나갔다.


          돈 없고 힘 없는 서민들은 자기 집을 내주며 빈 털털이가 되었고

 

          힘 있고 능력있는 사람만이 계속 그 곳에 남아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념이 무엇이관대 북한과는 철천지 원수(徹天之 怨讐)가 되어 말 한마디 건네보지도 못하였으며

 

          임기 내내 죽어간 국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누구를 위한 개발이며 누구를 위한 희생인지, 용산 철거현장에서, 쌍용차 공장에서, 천안함에서,연평도에서...

 

          애꿎은 우리 국민들의 희생은 또 누가 책임질 것인가?

 

 

 

          국정원은 대체 어느 나라 기관이기에 저렇게도 민간인들을 괴롭히며 사찰하고 선거에 개입하였을까?

 

          경찰은 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국민들이 당장에 죽어간다는데 권력자들만 쳐다보고 있었으며

 

          나로호는 또 무엇이기에 그렇게도 시급했나...

 

          명예가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인지 임기말의 호화로운 저택은 왜 또 필요할까?

 

 

 

          전두환의 환수법도 마찬가지다.

 

          자기들이 곤란할 때는 나 몰라라 손 놓고 있으면서 남에게 전가시키기만 하였다.

 

         

 

          이렇듯 지도자들이 역사의식이 없으면 나라의 이익과 국민보다는

 

          자기의 이익과 자기의 지역만을 편파적으로 대변할 뿐이다.

 

 

 

          문제는 이런 시대에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역사를 일깨워야 할 언론들과 종교계가 더 큰 문제였다.

 

 

          매일 TV나 신문에서 수없이 보도가 나오지만 강단에서 선포되는 열띤 메세지도

          이 사회의 정의보다는 그저 도덕적인 훈화나 덕담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 말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하나를 좇는라 정신이 팔려 그것이 망쳐놓은 아름다운 산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다.

          경제성장이나 정치권력에만 좇느라 우리는 보다 큰 풍요로움을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의 한국 사회가 더욱 더 나아가려면 이제는 깊은 안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지나친 성장욕심, 권력욕심, 제일주의를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할 것이다.

          사람들도 더욱 더 행복해지려면 욕심을 버리고 다툼을 버리고 절제있는 생활을 해야할 것이다.

          그래야 국민들의 소리가 들리고 원성이 잦아지며 사회는 더욱 안정될 수 있을 것이다.

 

          수 없이 들려오는 외침이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만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마음에 깊숙히 담고 실행으로 옮겨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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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뢰가 고작해야 기싸움인가?

 

 

 

               지난 과거 우리는 문사문화에 젖어 혹독하리만큼 고초를 많이 체험한 폐쇄국가였다.

               그러다가 1987년 제5공화국이 끝나갈 무렵 노태우 대표의 갑작스런 6.29선언이 터져나오자

               그 동안 억압속에서 갇혀 지내던 이 사회가 빠르게 개방적인 사회로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이런 선언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주요 원인은 노태우씨 개인의 결심만이 아니라

               거대한 민중들의 압력이 그의 심경에 많은 변화가 왔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의 전환을 가속시킨 또 하나의 요인은 88올림픽이었다.

               그 날의 석촌호숫가에 앉아 바라다 보는 잠실운동장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오색 풍선이 하늘가를 수놓고 비둘기가 창공을 향해 축하를 해 주었다.

 

               처음에 올림픽을 유치하였을 때는 정치적인 목적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모두가 마음을 열고 올림픽을 받아 들였을 때

               사상 유례없는 동서의 모든 국가들이 올림픽에 참가하여

               세계변화의 물결이 그대로 우리 사회 속으로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번의 국회에서 제기된 전두환의 숨겨진 추징법도 속 시원하게 파헤칠 것은 파헤치고 거둘 것은 거두어야 옳건마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까닭은 여전히 이를 막으려는 구세력들이 너무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과 남에 대하여 얼마나 관대하고 용서하며 살아왔을까?

               우리는 가끔씩 TV를 볼 때마다 해외나 우리나라에 살고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바라볼 때가 많다.

               그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안타깝게 여기며 서로 도와 주어야 된다고 말하기도 하며

               기금을 모으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봉사하기도 한다.

 

               그것은 자신이나 남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따스한 인간애였나? 순수한 동정심인가? 아니면 위선이였을까?

 

               똑같은 입장에서 생각할 때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일까?

               저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같은 민족, 같은 동포라 하면서도 모두가 정치권에 휘둘려 이러한 인간애는 잊지는 않았는지...

 

               언제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마치도 금방이라도 말만 잘 들으면 저들을 다 먹여 살릴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무감각하게 저들을 정치적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번에 무산된 남북간의 당국회담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기싸움이 얼마나 중요하기에 같은 민족끼리 격을 따지며 사람들을 골라서 만난다는 말인가?

               대통령도 앞으로는 국가를 위해 아무와도 만나지는 않겠다는 말인가?

 

               아무리 남북회담의 무산소식이 정부와 언론들의 허탈감이 크다고 해서

               오랜시간 정부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개성공단의 기업들이나 우리 국민들의 상심만큼이나 클까?

 

               이러한 남북간의 당국회담 무산은 일찌기 처음부터 예견된 사실이었다.

               이 날은 남북이 나란히 판문점에 모여 의견 조율을 하고 있었을 때에

               우리의 안방 TV에서는 자칭 보수전문가들이 화기애애한 표정으로 하루 온 종일 떠들며 훈수를 하고 있었다.

 

               어느 종편을 엿 보아도 이들은 마치 추리 소설처럼 꿰어 맞추고 마침내 현 정부의 신뢰 프로세스가 성과를 거두었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며 흥분에 들 떠 있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정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번 기회에 우리가 더욱 주도권을 잡고 북한의 비핵화를 끌어내며

               저들의 버릇까지라도 단단히 고쳐 놓아야 할 것이라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신뢰(信賴)란 미로처럼 어느 한 쪽 이야기만을 듣고서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신뢰란 함께가는 사람들이 아무런 조건없이 그저 상황을 따져가며 남에게 먼저 오라거나 바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도자가 먼저 앞서가고 손내미는 것이다. 한 술에 배부르랴!

               상대가 나설 수있도록 더욱 더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한 부부가 갈등중에 서로 싸움을 하는데 믿을 수가 없는데

               어느 한쪽에게 당신이 먼저 내게  무엇을 해준다면 나도 무엇인가 해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것을 어느 누가 믿을까?

               진정으로 대화할 의지들은 있었을까?

 

               내가 주도해야 옳고 저들이 주도하는 것은 죽으면 죽었지 결단코 수용하지 않겠다는 사고방식은

               진정한 신뢰받는 자세는 아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팽팽한 기싸움에서는 아무리 회담이 많이 성사되어도 진정한 대화가 될 수가 없다.

               내 고집과 내 주장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자세없이는 남북간의 어떠한 만남도 의미가 없다.

 

               신뢰란 기싸움이 아니다.

               세워주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고 하지 않던가?

               신뢰란 약자를 먼저 세워주고 덮어주고 서로 화해하는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마음이 열려야 살 수있다.

 

 

 

        한국인의 정서가운데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당장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몰두하여 일가 친척이 잘 되면 공연히 시기를 한다는 뜻이다.  

        자기가 잘 되야지 먼저 남이 잘 되는 꼴을 못보는 민족이 바로 한국인이다. 

        오죽하면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고 하였을까?

 

        좁은 땅에 살다보니 사람들의 마음도 모두가 닫쳐버렸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갈 때도 사람들은 경비원으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는다.

        초인종을 누르면 뺄꼼하게 조그만 구멍을 통해 확인하고서야 문을 열어준다.

        너와 나의 관계가 단절될 때 그 뒤엔 서로간의 의심과 죽음뿐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와 쇄국 정책 때문에 다른 문화가 들어올 여지가 없었다.

        이런 닫친 사회에서는 자기들끼리 비교하면서 가문이나 지역 중심의 강한 배타심을 지니게 되었다.

        비슷한 것들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사소한 차이로 구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오늘날의 족벌, 학벌, 지연을 중요시하는 풍토문화가 비롯된 것이다.

       "도토리 키 대보기"란 말대로 비슷한 것들끼리 약간의 차이를 강조하면서 서로 편가르기를 하는 것이다.

 

        조선왕조는 마치 세상 물정 모르는 처녀처럼 그저 집안어른인 중국의 눈치만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고

        외부로부터 물자나 정보가 들어오고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고인 물과 같이 전혀 변화도 발전도 없는 은자(隱者)의 나라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 안에서 사색당쟁이나 일삼고,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 할지라도 자기 울타리 밖에 있으면

        가차없이 찍어 내려온 역사가 바로 조선조 오백년이었다.

 

        이런 정체된 사회 속에서는 새로운 것들이 빛을 보지 못하게 마련이다.

        아무리 위대한 세종대왕의 한글이라도 닫친 사회 속에서는 오히려 언문(諺文)이라고 하여 천대를 받아서

        한글에 의한 국문학이 별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독일의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발명은 오늘날의 과학혁명, 산업혁명을 이끌어 왔지만

        그보다 200년이나 앞서서 발명된 고려의 금속활자는 겨우 토정비결이나 족보제작에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만일에 베토벤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길가에서 타령이나 하는 신세로 전락되었을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지난 해부터 불기 시작한 우리나라의 가수 싸이의 신드롬은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동안 국내에서는 어느 한사람 알아주지 않았다가 그가 강남스타일로 세계에 알려지자

        그때부터 메스콤들도 그를 추켜 세우고 국민들도 따라 춤추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만일에 그가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국민들이 이토록 흥분을 하며 야단법석을 떨었을까?

        우리는 과연 그에 대하여 얼마나 잘 알고 있으며 그의 노래나 춤을 잘 따라서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도 바뀌고 전반적으로 규제가 너무 심하다.

        여러 분야에서 인재들이 고르게 넘쳐나고 있지만 마음껏 펼칠 수있는 공간하나 부족하고

        그 나마 있는 것조차도 규제가 너무 심하여 도태되고 있는 현실이다.

 

        정권의 입장따라 규제도 오락가락하며 언론인들을 흔들며 들였다 뺏다 마음대로 조절하기도 한다.

        TV를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들은 우리나라와 같이 닫힌 사회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할 지라도

        지역적 출생이나 차별적 한계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나오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 가족, 우리 지역, 우리 단체만 생각하는 닫친 마음에서는 작은 연합과 일치, 작은 연대와 협력조차도 꿈꿀 수가 없다.

        따라서 이런 곳에는 어떤 요동도 일어나지 않으며, 새로운 변혁도 불가능한 것이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언제나 그 시대를 가장 앞서가는 사람들이다.

        그리하여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예언가, 혹은 시인이라고도 부른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도 바로 그런 큰 꿈을 꾸면서 파란 만장한 많은 일생을 살아왔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열렸다는 것은 바깥세계에 대하여 열려있다는 뜻이며

        마음이 닫혔다는 것은 오직 자기의 관심이 자기세계에서만 한정되어 있음을 뜻한다.

 

        이것은 정권이 바뀌면 정치적 보복이나 하는 오늘의 옹졸한 정치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너그러운 마음이다.

        바로 이런 열린 마음에서만 새로운 역사를 받아드릴 수 있고, 거기서 새로운 변화와 발전과 창조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창조나 개혁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점진적이다.

        자기의 마음이 열리고 거기에 확신이 들어오면 자기의 삶부터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기쁨으로 열심을 갖게 되며 무엇인가 자기도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열려서 거기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면 그 변화는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20%만 열리고 확신이 일어나도 그 사회 전체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을 20대 80의 원리라고 부른다. 어떤 성과의 80%는 20%가 이룬다는 법칙이다.

        팔린 매상의 80%는 20%의 상품과 20%의 고객이 가져오는 것이다.

        이 원리에 의하면 사회 변혁이나 갱신의 80%는 그 사회의 20%가 열린 마음과 확신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지도자의 사명은 바로 사람들에게 이러한 열린 마음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그런 변화의 한 가운데 서 있으며, 계속해서 변화를 이룩해야 할 도상에 있다.

        문제는 새로운 세대들의 마음이 열려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꾸만 나와야 한다.

        새로운 세대들이 기쁨과 확신속에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날 때 이 사회는 계속해서 개혁되어 갈 것이다.

 

        우물안 개구리처럼 좁은 세계 속에서 닫친 마음으로  더 이상 아옹다옹 다툴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세계, 보다 열린 세계를 바라보면서 크게 생각하고 크게 꿈꾸며

        내일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일자리는 무엇일까?

 



               

                   만일에 어떤 사람이 물에 빠졌다면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가 원하는 것은 물의 구조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신속한 구명(救命)이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발전하면서 국력을 앞세우며 자랑스럽게 선진국임을 표방하고 있지만

               경쟁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큰 요인은 우리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논쟁이다.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같은 땅에 태어나 학업과 폭력에 시달리며 대학을 마쳤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기쁨과 슬픔이, 승리와 패배를 알기 까지에는 아직도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그동안 일자리 문제로 TV에서, 국회에서, 심지어는 종교시설안에서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용들을 얼마나 지겹도록 들어왔는지 모른다.

 

               지금 저들도 자기들의 잘못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사람들을 구명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인간 존엄에 대한 무지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국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외면해 왔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적응하지도 못한 채 세상을 원망하고 노숙자로 맴돌거나 인생을 포기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한가닥 희망을 기대하며 교회로 나왔다가 차갑고 딱딱한 분위기에 그만 좌절하며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런데 이보다 더욱 그들을 아프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무관심이다.

              "나도 배고픈데, 나도 할 수있는데, 나도 끼고 싶은데" 하면서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누군가 다가와서 따스하게 손 잡아 주는 이 하나없고 이런 저런 핑계로 저들을 따돌리고 있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에게는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일에 거절이 있었다면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 만일 국가가 사람에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도 없다.


               국가의 목적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수호하고 행복을 주는데 있다.

               국가란 한 마디로 국민들에게 행복을 주기위해 잔치를 배설하는 주인과도 같다.

 

               잔치집의 생명은 늘 음식에 있다.

               음식을 통하여 사람들은 더욱 더 기쁨과 활력을 얻는다.


               잔치집에 가 보면 언제나 볼 수있는 것이 분위기다.

               넓은 식장안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 앉아 시끌벅적하게 먹거리를 나누며 축제를 즐기고 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잔치집에서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일자리란 무엇일까? 생계를 위한 몸부림일까? 자기만의 욕심일까?

               때때로 우리는 국가가 너무도 엄격하여 사람들을 구분하고 까다로운 규칙과 법제도로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일자리의 부족현상은 지나친 가족쏠림의 현상에서 볼 수있다.

               잔치집의 특징은 언제나 가족들의 모임이다.


               잔치집에서 음식이 차려지면 사람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로 둘러 앉아 즐겁게 음식을 나눈다.

               어떤 자리들은 물건으로 자리를 확보하고 어떤 자리들은 불편해서 빈자리도 보인다.


               어떤 사람은 관계일로 어떤 사람은 체면으로 공공기관은 아무나 들어갈 수있을까

               혹시나 힘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예약해 놓은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국가가 아무리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도

               제 일처럼 일일이 챙겨주지 않는다면 서민들의 일자리는 생겨날 수 없다.

               

               잔치집의 또 하나는 초대장에 달려있다.

               잔치집이 제 아무리 화려하고 음식이 푸짐해도 누구나 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곳에 들어가기 위하여 경쟁하고 성형하고 비싼 과외를 받아가며 들어가게 된 것이다.


               모든 계층과 지위에 있는 사람들...

               신분과 지역, 종교를 초월하여 우리 사회의 어떤 사람이라도 일자리는 필요하다.

               가난한 자, 소외된 자, 장애인들이라고 차별하지 말라.

               

 

               일자리는 언제나 주인 집의 의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선진국이라는 사실은 앞으로 우리에게 할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이고

               세계로 뻗어 나가려는 수맥(水脈)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은 손님들의 수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손님들의 먹을 양보다 더 많은 음식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잔치에서 대접(待接)이란 특별한 사람에게만 부여되는 대우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특권층들에게 비싼 몸값을 치루며 많은 혜택을 내어주고

               경영사업에도 이들을 기꺼이 참여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약자들에 대한 국가의 일자리 정책들을 보라!

               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국가는 고작해야 공공근로나 재활사업, 임시직이나 취로사업에 머물면서

               선심쓰듯 적은 껌값이나 적은 임금으로 고된 노동을 시키고  있다.


               만일에 국가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가차없는 압박과 불안감으로 어떠한 불이익도 주고 있다.

 

               마치도 국민들에게 죄인 다루듯이 좀 더 올바르게 생각하고 충고하기도 하며

               양심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아직도 위축되고 까다로운 사람들에게는 적극적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관대함은 사람들을 현혹시켜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고

               엄격한 정책만이 많은 사람들을  따라오게 만드는 가장 좋은 정책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심한 압박과 부담감은 예전의 나빴던 모습보다도 더욱 나쁘게 될 소지가 충분하며

               이것은 민주국가에서는 상반되며 참여하면서도 저들의 불만과 갈등은 높아질 뿐이다.

 

               저들을 돌이키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만히 앉아 저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찾아가서 희망을 주는 일이다.


               엄격하게 규칙을 따져가며 채용할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혜택과 방법으로 기회를 주고

               사람들에게 국가가 인정받고 격려가 필요하다면 자리를 많이 만들어라.


               어느 특정한 인맥이나 정당, 자신의 가족들만 뽑지 말고 골고루 많이 만들어라.


               지금 국가의 축제가 더 필요하며 기업의 축제가 더 필요하고 종교의 축제가 더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라.

 

               누가 일자리가 없다고 말하는가?

               우리 사회안에는 아직도 해야할 일자리가 너무도 많이 있다.

               왜 사람들이 잔치를 하면서도 즐겁지도 않고 괴로워 하고만 있는가?

               그것은 우리 사회가 음식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하고 가진 자들에게만 너무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차별없고 안정이 되며

               모두가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육사의 성폭행을 어떻게 해야할까

 

 


 

                        내 어릴 적 연희동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친구들과 어울려 즐겨 놀았던 고무줄 놀이가 있었다.

 

                   떼굴 떼굴 떼떼굴 도토리하나

                   도토리 먹으면 아기된다고

                   육군사관학교 갔다 왔더니

                   나라를 사랑하는 꽃다발

 

                   어찌나 여자 아이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던지

                   난 그만 심술이 나서 그 고무줄을 끊고서 도망가 버렸다.

 

                   육사(陸士)가 어떤 곳인가?

 

                   사육장(飼育場)인가?

                   훈련장(訓鍊場)인가?

 

                   사육장이라면 정성껏 그것들을 키워서 모두다 팔아먹고

                   훈련장이라면 열심히 그것들을 가르쳐서 안전하게 내 보내고

 

                   진정 이 곳이 위안부(慰安婦)는 아니거늘

                   어쩌면 하는 일마다 일본을 닮아가려고 하나

 

                   좋은 것이 아니라면 아예 쳐다보지를 말고

                   모범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배우지나 말지

 

                   도대체 우리의 사병들이 나가서 무엇이 되려고 하는지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권력이 그렇게도 좋다던가?

 

 

 

 

 

                         국민들은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잘 하는지

                         한번 보겠다며

                       

                         부족한 지역으로

                         열심히 봉사하라고 보냈더니

                         

                         이제는 자기가 한번

                         신당을 차려 보겠다고...

 

                         국민들이 원하고 있고

                         나라도 지금

                         자기를 간절히 찾는다고...

 

                         귀가 얇은 것인가

                         무대뽀인가 어리석음인가

 

                         마치도 세상권력을 다 얻은냥

                         철 없는 소년은 사기가 등등하고

 

                         초심은 어디갔나

                         마실 나간 소년은 돌아올 줄 모른다.

 

                         돈이 많아서 일까

                         어리석어서 일까

 

                         의사인가 의원인가

                         전문가인가

 

                         

                         전화는 유혹이고

                         의식만이 살 길인데

 

                         날 때부터 제발

                         남에게 지지마라

                         맞고는 오지만은 마라

 

                         아작내라

                         우리가 남이가

 

                         대다수 사람들은 모두가

                         가만히 구경하고 있건만

 

                         혼자서는 괜히 언론에 휘둘리고

                         정치싸움에 휘말려서

                         함께 난리 부르스를 추면서

 

                         이제는 작정하고

                         흩어놓을까 합쳐놓을까

 

                         정치란 원래가 상대는 낮추고

                         자기는 더욱 올라서야 하는 것

 

 

                         안 맞는 것은 서로가 맞춰가고

                         좋은 것은 서로가 협력하면서

                         함께 갈 수는 없을까?

 

                         오늘 보다는 내일을

                         자기보다는 전체를

 

                         살펴보고 돌아보며 돌봐주는

                         아름다운 사람도 있어야하지 않을까?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무언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한.미정부

 

 

 

 

                  진실은 언제나 주관적이기 보다 객관적일때 구별하기가 쉬운 법이다.

                  모두가 자기들 주관대로 자기들의 잘못은 감추고

                  상대방에게만 모든 잘못을 떠 맡긴다면 문제를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오늘의 상황에서도 한.미와 북.중과의 관계는

                  단순히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잘못된 것인지는 분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정부와 언론들의 말대로

                  무조건 내가 하는 말은 옳고 저들의 생각은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먼저 잘못되어야 하고 상대는 틀린 것이고 상대의 계획과 뜻도 잘못된 것이어야만 한다.

 

                  한.미 정부는 지금의 중국에 대해 북한을 향한 과감한 제재와 경고하는 모습만을 바라보며

                  마치도 제발 그렇게 해주었으면 하는 어린 초(初)짜와 같이

                  이제 중국이 북한에게 손을 보기 시작했으며 저들의 오만한 버릇까지라도 고치고 무장해제시켜

                  머지않아 북한은 붕괴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착각에 빠져 언론몰이를 하고 있다.

 

                  연사들도 덩달아 연일 이곳 저곳의 종편방송을 찾아 힘을 주어 되풀이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과연 중국이 맘대로 북한을 길들이고 한.미는 자기뜻대로 북한을 압박하고

                  한국사회는 갈등이 조성되어 정권잡기에 유리하도록 계속 지켜만 보고 있을까?

 

                  지금과 같이 한국이 미국과 손을 잡고 현대식 무기를 자랑하며 열을 올리고

                  북한도 결코 물러 서지만은 않겠다며 핵무기로 위협하고 모두가 실력대결로 나서는 상황에서

                  중국은 북한이라도 제발 정신차리고 싸움을 여기에서 끝내 줄 것을 종용하고 있는 선언이 아니던가?

 

                  그렇다고 해서 중국이 과연 한.미의 소원대로 북한을 이대로 단념하고 희망을 포기할 수 있을까?

 

                  중국의 기본입장은 항상 과거나 지금이나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있다.

 

                  한.미정부는 이제라도 중국이 북한을 단념하고 우리와 좀 더 가까이 지냈으면 하는 심정이겠지만

                  중국에게 있어 북한은 여전히 한.미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혈맹들이고

                  북한없이는 중국도 동북아 진출발전에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우수성을 믿는다면 결코 북한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저들도 한국인의 뿌리다.

                  단지 저들이 곤경에 처해있고 위기를 맞았다고 그렇게 날마다 저들을 들었다 놨다 자기들 맘대로 조롱해서는 안된다.

 

                  남북이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가 대치하여 비방하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무시할 수가 있을까?

                  왜 한국의 보수정권들은 모두가 남북대화나 남북사업들을 파탄내면서까지 자기들의 뜻을 굽히지는 못할까?

                  국민들이 깨어있고 시민사회가 힘이 있다면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한.미정부는 이제라도 크게 착각하지 말라.

                  역사는 전진해야 하고 국민들은 숨을 쉬어야만 한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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