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태로운 우리 사회

 

 

 

 

 

 

                 오래 전에 우리 한국에도 내한했었던 신부이며 시인이었던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그의 강연에서 예언자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자기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루마니아인 그는 해군에 입대하여 잠수함을 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강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당시의 잠수함 내부는 말할 수 없이 좁아 책장에 책이 쌓이듯 사람들은 침실에서 차곡 차곡

              누워야 할 지경이었다. 공간이 그렇게 좁은데 한 가운데는 구리로 만든 통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속에 흰 토끼 한 마리를 넣어둔 것이 무척 의아했었다.

         

                 낡은 잠수함이라 산소 측정기가 없었고 그 토끼가 산소 부족 현상을 측정하는 데 이용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산소가 결핍되면 토끼는 사람보다 7시간쯤 먼저 죽게 되는데 비스켓이나 물을

              먹지 않으면 벌써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후 내가 다른 잠수함에 근무하게 되었을 때 그 곳에는 토끼가 없었고 나는 잠수함의 맨 밑바닥에서

              일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으나 나중에 내가 토끼의 역할을 맡게된 사실을 알았다.

              

                 사람들은 전에 토끼를 관찰하듯 수시로 나의 건강 상태를 살폈고 내가 음식을 먹지 않고 괴로워하면

              잠수함내에 산소가 결핍되고 있다는 것을 판단했다.

             

              순간 나는 시인이 왜 인류에게 유용한 지를 깨달았다.

              시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토끼 역할을 하는 것이며

              시인이 괴로워 하면 그 사회는 병들어 있는 것이다 "  

 

    

              이상에서 게오르규는 그 사회의 산소 결핍 현상을 누구보다도 먼저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며 예언자라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있는 사회, 그리고 예언자의 경고를 받아 들이는 사회는 위기를 만났더라도 곧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그의 말하는 경고를 무시할 때 그 사회는  닥친 위기로

              매우 큰 불행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우리 사회의 사태를 보고 있노라면 우선 답답함에 숨부터 탁하고 막힐 지경입니다.

              따스하고 화창한 봄 날에 밝은 소식들 보다는 나라는 왜 이렇게 자꾸만 거꾸로만 가는 지 겨울 바람에  

              그저 차가운 냉기만이 맴돌뿐입니다.

 

              얼마 전, 경기도 파주 지역에 떨어졌던 국적 미명의 무인기를 두고 온 나라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국방부는 국방부 대로, 언론은 언론들 대로 온갖 추측과 의혹을 불어 넣고

              국민들을 더욱 더 자극시키고 있습니다.

 

              국가와 언론들은 우리의 남과 북이 지금도 무모하게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보십니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아니 건만 왜 자꾸 국가와 언론들은 북한을 잡아 먹지못해서 안달일까요?

              그 까짓것 무인기의 무게와 길이가 무엇이길래 저리도 호들갑을 떨고 있을까요?

 

              나아가 국가와 언론들은 북측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무인기를 띄워서 우리 측 상공에다

              핵을 내려 놓고 화학용 무기 가스를 살포할 수도 있다는 둥 해괴 망칙한 망발을 하고 있습니다.

 

              급기야는 우리 국민들이 나서서 진위 여부를 따지자 국방부의 호들갑은 현 수준에서 북한의 무인기는

              공격용 무기가 아니라며 또 한차례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이들에 비해서 우리 국민들은 참으로 둔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랏빚이 1천백조대가 넘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모두가 다 잘 되어 간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편안히 자기 생활에만 즐기려는 우매한 국민들을 볼 때

              참으로 안타깝고 불쌍하기 한이 없습니다.

 

              도대체 무인기가 무엇이길래 우리도 그것을 잡겠다고 2018년까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다가

              고성능 무인기를 미국으로 부터 들여와야만 할까요?

              그 돈으로 무기를 살 생각은 있어도 왜 무상 보육이나 무상 급식은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몇 일 전에는 서울의 도심 한 복판에서 할리우드를 환대한 서울를 주제로 어벤져스2 한국 촬영이

              강행된 바가 있습니다.

              서울의 상암 일대와 강남 등지에서 반나절씩이나 교통을 통제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가로 막았습니다.

 

              이번 행사의 책임자이기도 한 새누리당 박창식 의원은 영화 촬영으로 인한 교통 불편에 많은 시민들이

              참고 견디는 것은 서울이 영화에 등장하면서 얻게 되는 막대한 수익과 기대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 나라의 경제 효과가 2조원이나 있을 것처럼 잔뜩 희망을 불어 넣고 있지만 이미 빚더미 위에

              앉아 버린 집안에서 밤낮 잔치나 벌인다고 해서 우리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우리의 교육계는 정말로 편안하십니까?

              백년지대계라던 우리 교육은 어디로 흘러 가고 있는지 국민들 가운데는 아는 이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더욱이 일자리 문제로 불거진 시간제 교사제도가 정부정책이라고 생각할 때

              일선의 많은 교사들과 가정의 학부모들은 불안감에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천직으로만 여겨야 할 교사들에게 정부는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하챦은 직업인으로 전락시켜 버렸고

              학부모들에게는 과연 그러한 교사들이 얼마나 책임감을 갖고 혼란없이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 지

              그저 앞 날이 캄캄할 뿐입니다.

 

              급기야는 전국 교육 대학교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수업을 거부하며 시간제 교사 제도 도입을 반대하고

              동맹 휴업에 들어 갔습니다.

 

              지금도 신학교에 가보면 학생들에게 세상의 속된 직업적인 사람이 되지 말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세상 권세나 명예나 사욕을 위해서는 처음부터 아예 성직자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직자는 신자들에게 유모이며 자상한 부모 역할도 겸해야 함을 사도들은 일찌기 교훈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과 거룩한 복음 사역을 위해서만 최선을 다하는 자가 바로 천직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교사들도 교직을 천직이라 여기며 아이들의 미래는 자기가 책임지고 가르치겠다는

              유능한 스승들이 많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지금 위기가 코 앞에 다가와 자기의 스승 예수는 피땀 흘리며 기도하고 있는데

              편안히 잠에 빠진 한심한 그의 제자들과 같이 오늘의 교회들은 혹시나 잠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예언자라고 말할 때 단순히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에언자는 아첨을 일삼지도 않으며 위정자의 편에도 서지 않고 다만 시대의 뜻에 따라

              묵묵히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갑니다.

 

              이제 우리는 위기 의식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나타난 불의들을 보며 힘있게 경고를 보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자꾸 벌려 놓고 늘리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 줄이고 간소화하는 생활들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더 이상 어느 한 사람만이 주장하는 시대는 떠났습니다.

              시인이나 언론들만이 떠들어 대던 전유물같은 시대가 아닙니다.

 

              왜 우리 나라의 지성인들은 다른 국가들도 다 받는 노벨 문학상 한 개쯤 나오지 않는 것일까요?

              좀 더 가슴으로 아파하고 좀 더 사랑으로 품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 시대의 예언자로써 부름받은 무리들입니다.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우리도 이 시대의 산소 결핍 현상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 차리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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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가족들의 이중생활

 

 

 

 

 

 

                                           날씨가 몹씨 춥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가족들을 이끌고

                                           시장앞에 나타나 구걸하기를

 

 

                                           날씨는 춥고 배도 고프니

                                           제발 우리들을 한 번만 도와주세요.

                                           다시는 여러분들께 이런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런 뒤에 그 가족들은

                                           자리에 앉아 음식들을 먹으며 머리를 조아리고

                                           시장 사람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그 가족들은

                                           몇 일도 채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시장앞에 나타나

                                           사람들에게 구걸하려고 한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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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자연은 이 땅에서 태어나 얼마나 자유롭고 향기로운지

             우리는 자연을 대할 때마다 항상 고마움을 느낍니다.

 

             차갑고 지루하던 긴 장막이 걷히고 봄이 열리는 3월이 오면

             그 동안 잠을 자고 있었던 모든 생명은 깨어나고 힘차게 활동을 시작합니다.

 

            3월을 March 라고 하는데 이 말은 행진하다 움직이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3월의 개울가는 어느 새 모든 것이 녹아 내리고 바다를 향해 힘찬 전진을 시작하며

            어둡고 매말랐던 땅에는 새순들이 돋아나서 희망찬 내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길 가엔 개나리꽃, 뒷 산에는 진달래꽃,

            들 판에는 민들레꽃, 집 안에는 사랑꽃이

            섬진강 따라 매화꽃은 길게 줄을 잇고 남녁에서는 노란 산수화가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봄은 그 색깔과 아름다움과 개성으로 무궁무진한 꽃의 세계를 보여주며

            오늘도 말없이 상춘객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꽃에 만족하지 않고 알 수없는 수 많은 변덕으로 계속 물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선조들은 알지 못했던 기묘한 꽃들을 구하여 눈부신 벚꽃과 가시넝쿨,

            신비한 외래종의 꽃들을 계속 불러 들이면서 우리의 생태계는 이제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만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형적인 변덕을 자꾸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옛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친 것이나 모자란 것이나 모두 좋지 않다는 말로 곧 중용(中庸)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할 때에는 항상 불완전하여 우리가 아무리 불의를 피하려고 해봐도

            인간은 어쩔 수없이 약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법은 사소한 일, 하찮은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이 법의 원칙이며

            법정은 특히 무익하고 귀찮은 일들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독단적이고 무익하며 무가치한 일들에 대해서 자기 양심을 법정에 세워놓고

            무조건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큰 착각입니다.

 

            진실되고 고결한 양심은 유연하고 민감하며 예리하고 절대적이어야 하지만

            그 반면에 진리가 다 그러하듯이 그 스케일이 크고 넓고 관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연필로 그은 듯한 가는 선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들은 삶을 용기있게 그려나가는 희망도 필요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특별한 장점이나 탁월함에 대해서 편집적(偏執的)인 애착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가 자기 함정에 빠져드는 덫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식물학자가 말하기를 "꽃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결점은 그 꽃이 가지고 있는 좋은 속성을

            너무 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세계나 인간의 결점들도 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요?

            망상에 의한 이상(理想)은 우리를 너무 지치게 하며 왜곡시키고 피폐(疲弊)하게 만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 기도나 묵상, 집회에 참석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것,

            금욕이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서 너무 과할 경우에는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지나친 것은 인간적인 의지가 만들어 낸 경배의 행위,

            성경에서 말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명분하에

            인간적인 과욕에서 나온 이상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그리하여 집회가 좀 더 화려하고 거창하며 아름답게 꾸며서 자기들만의 축제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신앙적인 열정은 원래가 단호하고 뜨거운 것이기에 이성을 차리기도 힘듭니다.

            그러한 열정이 박해와 억압을 낳고 순수하던 신앙의 정신마저 깨뜨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착각의 노예가 되면 점점 더 치우치게 마련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기 보다는 설교들을 오직 청중을 모으는 데만 급급하면서

            스스로를 능력의 종이라고 자임하며 자기 PR이나 교회 자랑하기에만 열을 올리게 됩니다.

 

            나중에 자신에게 닥칠 결과를 생각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약속하는 행위들도 지나친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약속한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로 인한 죄책감은 또 얼마나 두려울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 당시의 교회를 초대 교회(初代敎會)라고 부릅니다.

            초대 교회의 시작은 예수의 부활 승천 후 제자들이 120명의 무리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였는데

            순식간에 삼천명으로 불어났고 그 수는 날마다 증가하여 남자의 수만 오천여명에 달하였습니다.

            이 무리들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전신(前身)을 이룹니다.

 

            이들은 로마 각처로 흩어져서 도시에 여러 교회를 세웠는데 이들이 보여준 나눔과 사랑의 실천은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됩니다.(행2장)

 

            그러나 다른 무리들 가운데에는 성경에 대한 열성이 너무 지나쳐서 이교도들을 자극하고 모욕을 주며

            공격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상황인데도 자기의 몸을 던져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시험이 다가올 때에 쉽게 쓰러지거나 자신의 신앙까지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매우 극단적인 신앙인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 지도자들은 권력자들과 결탁하기에 바쁘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인들이나 퇴역 장병들을 모아다가 대중들과 싸우며

            어떤 사람은 자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자기의 몸을 내던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흔히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행위에 대한 그 사람의 동기는 선하였지만 결과는 악한 것으로 나타났을 때와

            또 하나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도 선한 행위를 두고 그 동기가 악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그 행위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그 동기가 선하다고 한다면 그 잘못도 넘겨 버리기 일쑤이고

            후자는 그 동기가 악하다고 판단이 되면 온갖 방법으로 낙인을 찍어 가혹하게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비록 그 동기가 어떠했는 지는 모르지만 방법이 잘못되었고

            따라서 그 결과 또한 당연히 악하게 나온 것입니다.

            후자는 눈엣 가시처럼 자기가 힘이 있을 때에 재판하는 감정싸움은 아닐까요?

 

            우리는 매일같이 TV를 보며 국가가 지은 엄청난 불의에 대해 하루 속히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공동체안에서 그 원칙이나 훈련하는 방식, 규범들의 약점을 개혁시키겠다며 공연히 분주하고

            요란하게 떠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개혁자로서의 좋은 요건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부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응답해 줄 것인지,

            분쟁만 일으키는 개혁은 진정한 개혁이라고 할 수없습니다.

            억지로 꾸며낸 듯한 이러한 개혁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에도 힘듭니다.

 

            진정한 개혁은 아름다운 꽃과 같아서 뜨거운 태양 아래 가만히 서 있어도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단지 눈에 보이는 변화와 개혁만을 추구하는 자는 태양이 내리쬘 때 곧 말라 버리는 꽃과도 같습니다.

 

            개혁(改革)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동산의 나무가 병든 것처럼 개혁은 그저 가지나 치고 주사나 몇대 놓는다고 해서 낫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혁신 (革新) 들은 언제 또 다시 불의가 재발될 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의 모든 개혁자들이여! 개혁을 하시려거든 지금 당장 썪은 나무부터 잘라 버리십시오!

            주변의 가시넝쿨을 치우고 잡초를 뽑아내는 일 역시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지나치게 하여 다른 의무에 방해가 되거나 다른 의무를 간과해 버리는 경우,

            육체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범위까지 나가는 경우,

            현실적인 상황이나 조건이 맞지 않는데도 억지를 부려 행하려는 경우,

            이 모든 것들은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신중하고 겸손한 자는 두번 다시 지나친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비록 상대가 높은 지위나 성격으로 자신을 화나게 하고 비난할 수 없도록 만들어도 함부로 나서서

            그의 잘못을 비난하기 보다는 부드럽고도 정당하게 그 사람이 거부감을 갖지 못하도록 권면합니다.

 

            대부분의 논쟁은 비록 그것이 좋은 분위기에서 진지하게 논의가 된다 하더라도

            논쟁자들은 처음부터 그대로 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얘기가 오고 가도 결과적으로 쌍방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감정만 더욱 나빠지고

            헤어지고 맙니다.

 

            자연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없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자연의 품속입니다.

            희망이 살아 숨쉬고 조화로움과 실재(實在)와 합리(合理)가 어우러지고 

            가식이 없는 진정성과 순수함이 살아 있을 때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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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은 왜 필요한가?

 

 

 

 

 

 

                 지난 시절, 내가 힘 겹도록 배움에 사무치고 신학공부를 하던 때

                 학비가 없을 때면 나는 종종 큰 가방을 어깨에 둘러 메고

                 어느 농촌 마을로 들어가서 생활용품들을 팔아야만 했다.

 

                 매 학기가 돌아오면 남들은 한 학기씩을 잘도 올라가는데

                 나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듯이 자주 한 학기씩을 쉬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 수 없지 뭐... 하면서 또 다시 산으로 들어가서 몇날이고 기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것은 나를 한층 더 강화시켜주는 값진 공부였다.

 

                 가만히 그 때를 돌아보면 어느 새 무수히도 거쳐간 모든 교단들과의 인연...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모두 총회장급 교회들이었고 그 교회들은 지금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훗날에 내가 결혼을 하던 때는

                 40대의 어느 젊은 주례사를 모시고 성대한 결혼식도 마쳤다.

 

                 밀려버린 학비는 아는 지인의 피아노를 저당잡혀야만 했고

                 칼빈이라는 별칭도 들어가며 수업을 받아야만 했으며

                 이해가 가지 않을 때면 나는 종종 질문세례를 퍼붓기도 하였다.

 

                 수업은 자주 중단 되기가 일쑤였고

                 교수들도 무척 곤혹스러운 듯 대충 넘겨버리는 눈치였다.

                 어떤 강사는 다음학기를 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 스스로 강단을 떠나야만 했다.

 

                 사람은 누구나가 자기 집안은 자기가 청소한다.

                 적어도 청소만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자기 집안을 누군가가 대신 나서서 쓸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개혁이든지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개혁을 서두르라.

 

                 특히나 한국교회와 국가는 먼저 개혁 되어야 할 대상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건물이나 높은 종탑을 연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당이지 교회는 아니다.

 

                 교회라는 말은 (Ecclesia 에클레시아) 라는 말로

                 흩어진 무리들이 두 사람 이상 그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타락되었다는 것은 건물이 썩은 것이 아니라

                 그 종교계가 부패했다는 의미이다.

 

                 보편적이기를 꺼려하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일 수가 없다.

                 교회가 강단에서 서슴없이 이념이나 조장하고

                 헌금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멋대로 구분짓는 것은

                 종교계가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한 집단과도 같은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은 국가의 축소판이다. 국가란 개인의 상황을 보다 확대한 것이다.

                 국가란 (the body politic) 사람들의 모임이며

                 국가안전은 어떤 특정한 것이 아니라 그 정부의 도덕여하에 달려있다.

 

                 정의가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국민은 불의를 거부한다.

                 그것이 설령 권력이나 대통령이나 어디에서 나왔더라도 불의를 거부한다.

                 또한 우리는 쿠데타에서 나왔든지 정권야욕에서 나왔든지 독재를 거부한다.

 

                 만일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나면 우리는 몸전체를 관리하려고 부단히 힘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도덕적 부패가 쌓이면 사회의 활동성은 파괴되고

                 이것은 오직 개혁으로만 가능하다.

 

                 로마 카톨릭이 중세를 주름잡았지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오늘날 사회주의에 속한 국가들이 점점 개방정책을 서두르며 민주화 되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구 세력들이 이를 막고 사회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몸부림도 있다.

 

                 중국의 자유화물결이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를 못할 것이다.

                 자유가 귀하다는 의식을 알게된 이상 국민들의 열망을 그 누구도 막을 수는 없다.

 

                 개혁(改革)이란 단지 어떤 묵은 제도나 기구등을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하는 변혁만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나은 환경,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 자유롭게 살자고 하는 끝없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있다.

 

                 우리는 지금 모든 분야에서 개혁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에 대한 청렴결백은 매우 시급하다.

                 황금을 훔친 강도가 쌀을 훔친 도적을 재판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의 큰 부정은 가난한 사람보다도 부자들이 통크게 사기를 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한국 교회와 국가가 개혁되어야 함을 느끼면서도 개혁이 늦는 것은

                 개혁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자연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무릎꿇고 개혁의 법칙을 배우라!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우리는 크게 놀라지만

                 거기에서는 탄성만 있을 뿐 썪은 냄새는 전혀 맡아볼 수가 없다.

 

                 북풍의 칼바람이 숲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지만

                 그로 인해 나무들은 뿌리가 더욱 박히고 수액은 풍부하게 된다.

 

                 하늘의 전령사인 천둥과 번개도 가끔씩 우리를 향해 내리치지만

                 그로 인해 공기가 정화되고 대기의 병균들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개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보라! 그 끝이 다가 오고 있다.

                 저들은 허망한 꿈을 꾸며 소득없는 승리를 위해 밤낮 애쓸 뿐이고

                 저들의 싸움은 죄만 더할 뿐 저들의 자랑거리는 웃음거리가 되며


                 저들의 승리는 일시적일 뿐 저들의 행복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고

                 저들의 영광은 시들어가는 꽃과 같도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가 찾고 있는 지도자는 어디에...

 

 

 

 

 

                 우리 주변을 보고 있노라면 진심으로 하늘을 두려워 하는 사람

                 국가보다도 정의를 더 사랑하고 어떤 유권자 앞에서도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

                 현 시대에는 별로 없는 것같다.

 

                 때때로 아주 타락한 국가나 민족들도 직면한 위험이 다가오면

                 크게 경성(警醒)하여 정의로운 사람을 지도자로 추대하고 그의 지도에 복종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정치적 지도자는 마음이 진실한 사람가운데서 선출되는 경우가 별로없다.

 

                 우리만을 놓고 보더라도 국민의 인기를 끌고 국가의 요직(要職)에 오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재치있는 웅변술이나 권모술수, 재력,권력등이다.

 

                 욕망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이미 우리나라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장관들, 고위직에 이르기까지

                 심오한 통찰력이나 헌신적인 마음등은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된지 오래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그들에게서 입법자로서의 참된 인격을 별로 찾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그가 흠이 아주 많더라도, 입법자가 되어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우리나라의 정치판이 이렇게 싸움과 잘못의 연속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람은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의사를 최대로 존중하며 그들이 세상을 좀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희망을 보여주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따뜻한 지도자를 원하면 대부분 그런 지도자가 나타나기 마련이고

                 진정한 인격자를 따르기를 원할 때 그런 인격자가 나타나서 갈 길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국가나 사회, 경제나 종교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을 비난하기 이전에

                 먼저 그들이 우리들의 생각과 목적을 잘 반영하는 지를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이 먼저 이념과 정파를 초월하여 바른 마음을 갖지 못한다면

                 가장 훌륭한 지도 능력을 갖춘 자는 결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가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 의무에 충실을 다할 때 진정한 사회복지가 이루어지며

                 거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 지게 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거짓 평화를 경계하라!

 

 

 

 

         지난 2월 6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방부실에서 주요 외교 안보 부처 등 신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평화는 강력한 힘으로 지켜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의 어떤 도발에도 단호하게 응징할 수 있는 철저한 대응 태세를 주문하며

         어떤 대화나 신뢰정책도 우리의 안보 태세가 허약하면 제대로 추진하기 어렵고

         경제도 안보 태세가 허약하면 살아나지 못한다면서 보다 강력한 국방을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도

         계속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평화를 지키자고 자꾸만 분열을 만드는 것은 끝없는 전쟁뿐이다.

         힘은 반드시 소멸되기 마련이다.

         상대의 힘이 크면 클수록 더 큰 힘을 필요로 하며 끝없는 살인무기가 계속 개발될 수밖에 없다.

 

         무력을 강화하고 전쟁을 준비하면서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는 위선자들과 같이

         평화는 더 이상 사람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면서 서로가 화해할 때 진정한 평화가 오는 것이다.

 

         평화(平和)란 사전에 말하기를 평온하고 화목함이라는 뜻으로 전쟁이나 무력 충돌이 없이

         나라가 평온한 상태를 말한다.

         평화란 방해로 부터의 자유함과 고요함을 의미하며 사람이 평화를 지킨다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들의 욕심을 내 버리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이다.

 

         진정한 평화는 수동적(受動的)이 아니라 능동적(能動的)이다.

         소극적인 자세에서 평화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자세로 평화가 올 수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평화는 자기 방어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데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자기 희생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자기를 내어 줄 수 있는 관용적(寬容的)인 삶을 힘쓸 때

         거기에 평화가 있는 것이다.

 

         평화는 인간의 행복중 가장 최고봉이며 행복의 시작이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평안하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사람은 세 가지 면에 있어 평화로워야 한다.

         첫째는 마음이 평화로워야 하고 둘째는 사람간에, 세째는 나라가 평화로워야 한다.

 

         우리가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 것은 근심이나 걱정, 슬픔등이 기쁨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주야로 불안들이 찾아와 자기의 몸을 짓누르고 진액을 마르게 하여 병이 찾아오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스트레스와 불안과 공포등은 바로 마음이 평화롭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이웃과 어울려야 살 수가 있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환경이나 좋은 조건을 다 갖추어도 평화롭지 못하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부부간에도, 가족간에도, 친구간에도, 이웃간에도 갈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세상에 전쟁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나라는 안정되고 크게 발전하기 시작한다.

         인구도 늘어나고 건축물들이 높이 세워지며 무역과 상업은 활발하여 나라는 부강하게 된다.

         가끔은 천재 지변이 일어나 많은 인명 피해를 내고 큰 재앙을 몰고 오지만 그것은 국민들의 슬기로

         곧 사라져 버리고 세상은 다시 평화를 되찾게 될 것이다.

 

         사실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케 하고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며 도처에 슬픔과 죽음을 안기지만

         그것이 그쳤을 때는 빠르게 평화와 재건과 안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평화운동은 이 사회에 정의를 실현시키는 일과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다.

         공평(公平)과 정의가 없이는 그 나라에 평화도 없기 때문이다.

 

         기원전 28년 부터 기원후 60년 까지의 약 90년간을 로마의 평화시대라고 부른다.

         옥타비안 장군이 애굽 정복을 끝으로 전쟁도 끝이나고 기원전 27년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로마의 황제가 되었다.

 

         그는 기원후 14년까지 44년간에 걸쳐서 통치하며 국방을 튼튼히 하고 정권을 안정시켰으며

         치안질서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 황제를 칭송하며 " Pax Romana" (팍스 로마나)라는 아무 유명한 말도 생겨났다.

 

         그러나 팍스 로마나는 거짓 평화, 제국주의적 지배 체제하에서 이루어지는 평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로마의 평화는 단지 전쟁이나 내란, 민중붕기 등이 없이 지배 질서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뜻이며

         그것은 부와 권력을 가진 지배 계급을 위한 불의한 평화였다.

         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억압과 착취의 현상을 정당화하는 지배 이념일 따름이다.

 

        우리 또한 과거에 평화를 위해 반공이념을 지지했고 평화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독재를 용납했으며

        경제발전을 이룩한다는 명목으로 온갖 경제적 불의를 용납해 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모두가 거짓 평화임을 알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것은 정권 유지와 착취를 위한 수단

        으로 안보를 내세우며 평화를 들먹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거짓 평화에 속아서 그 세력과 타협하며 안주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할 것이다.

        이 땅에 도사린 모든 부정의와 가진 자만을 위한 사회 구조등을 배격하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해마다 일어나는 재난사고
 




                     
  예로부터 우리는 국가적인 대형사건이나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국가의 효과적인 재난 관리체도에도 불구하고

                  거듭하여 성수대교 붕괴, 대구 지하철 방화, 강원도 산불재해,

                  호남 지방 폭설피해, 서해대교 차량화재, 서해안 기름유출사건, 숭례문 방화사건, 구제역 확산

                  농촌 집중 폭우로 인한 연이은 참사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형사건들이 발생 될 때마다

                  정부는 새로운 조직 기구를 신설하고 법령을 제정하여 모든 사태를 수습하여 왔습니다. 

                  재난과 같은 천재 지변의 원인은 지구환경의 변화와 사회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급격한 변화시대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제도상의 문제, 
                  행정조직이나 안전관련 운영상의 문제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자연재해의 발생을 근원적으로 다 막을 수는 없습니다. 


                  재난의 종류는 다양하고 사전 예방에도 어렵습니다. 
                  이것을 막으려면 국가적인 비용에도 상당하게 소요될 것입니다. 

                  재난으로 인한 피해는 눈에 보이는 피해말고도 정신적인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어버리고 애써 키워오던 터전을 잃고
                  농작물들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그들의 절망감은 깊은 상처로 남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재난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크게 당황하면서 그 재난이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재난이 천재 지변이기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그저 우리는 하늘만을 쳐다보면서 또 다시 그럭저럭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재난에는 해마다 겪는 시련이기에 정치인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재난으로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별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연 재난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 없이 다가오며 아무런 교훈도 없을까요?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은 항상 사건이 터지면 문제의 그 원인은 보지 않고  
                  누가 사건을 일으켰으며 피해는 누가 당했는지에만 큰 관심을 보일 뿐입니다. 

                  지금 세계는 곳곳에서 많은 재난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인정 사정없이 우리를 향해 강타하고 있습니다. 

                  분명 무엇인가 사람이 잘못하고 있기에 일어나고 있는 줄도 모르고 
                  강대국들은 계속해서 지속적인 성장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큰 재난 사건에는 분명히 하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애써 그런 생각들을 떨쳐버리고 
                  어쩔 수 없는 천재 지변으로만 받아 드리면서 그냥 넘어갑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그 누구라도 자기들의 부덕함에서  

                  이러한 재난이 왔을 것이라고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재난이 우리들의 잘못이며 정치가 바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변화를 자신들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여
                  재난을 당하고도 겸손하지 못하며 여전히 그 자연을 파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난을 당하면서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자연의 재해는 더욱 커지면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경제 발전을 자랑하면서 산을 깎아 도로와 도시를 만들어 
그 곳에다 화려한 건물들을 올려놓았지만 

                  우리는 지금 하루 아침에 그 모든 것이 다 무너질 수 있다는 경험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우리 교만에 대한 하늘의 경고이며
                  자연의 세계를 알지 못한 우리 무지의 댓가일 것입니다. 

                  우리가 자꾸 파헤치고 개발하여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순식간에 잃어 버린 것은 
                  우리의 경제 발전과 개발을 재고하라는 자연의 강력한 경고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 것은 정치인들이 정쟁을 중단하고 

                  근본적으로 잘못된 경제이론을 재검토하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조정하라는 것을 뜻합니다. 

                  경제가 좀 나아졌다고 해서 자꾸만 사치하고 낭비하는 생활을 고쳐 
                  절약하면서 최소한의 삶을 깨달아 유지하도록 하라는 의미입니다. 

                  재난은 결코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심판이며 자연이 고통하는 신음의 소리입니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언제 어느 때나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하늘의 경고입니다. 


                  내우외환(內憂外患) 말과 같이 
이러한 재난 사건들은 더욱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며

                  더 이상의 안일함과 나태함으로 살지 말라고 하는 하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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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도 있듯이 지금 우리 사회의 민심은 자꾸만 나빠지고 있으며

                  천심은 우리에게서 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는 더욱 더 정신을 차리고 정신 없이 벌려 놓은 살림을 간추리며 
                  간소하고 절약하는 사람이 되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야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 사회에 나타난 안철수 현상과 새 것의 교훈

 

 

 

 

요즘 우리 사회에 돌아가는 정치 현실을 보면 안철수 현상에 대한 화두가 매우 뜨겁다.

모든 언론들은 매스콤을 동원하여 온갖 추측과 과장으로 정치판을 뒤 흔들고 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대신 작고 가는 소리, 정의로운 소리가 등장하여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고 선택된 소수의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정의로운 사람만이 들을 수있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그 시대 때마다 사람들에게 무시되어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렇게 작고 가는 소리가 그 시대를 심판하고 미래의 비젼을 보여주며 역사를 주도해 왔다.

그 시대를 지배하던 큰 소리들은 역사의 바다에 침몰되고 작고 가는 소리가 그 역사를 지배하며

그 역사의 방향이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매우 불행한 존재이다.

인간들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며 갖가지 험담을 늘어 놓는다.

그러나 그 잘못은 대개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의욕이 너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욕이 있었다면 아무리 삶이 단순하고 보편적이라 하더라도 삶의 의욕이 이처럼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의욕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한 잔치에도 더 이상 만족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상상에 의해 갖게 되는 만족은 항상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할 때 쉽게 싫증을 낸다.

그리하여 새로움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상황속의 새로운 추구가 아니라

언제나 내적인 새로운 자각에 의해서 추구해야만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허망하고 과장된 기대감과 정치적인 복잡한 추측,

그리고 밝고 유익한 일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오히려 어두운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리에게 유익하거나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기대와 추측이 무너지고 말았을 때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새 것이란 막연히 지난 날의 싫증과 지루함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들을 찾고 동경하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감수성은 죽어버리고  만다.

 

외형은 자꾸 변화하지만 그 내면은 언제나 한결같다.

변화 무쌍한 우주의 상황속에는 처음부터 동일한 힘과 법칙이 작용하여 같은 현상을 계속 창조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 세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그의 특별한 힘이나 악이나 지혜나 어리석음, 또는 그 생각이나 행동이 평범하지 않고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를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오직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 그는 과연 진실하고 신뢰할만한 인물인가?

 

우리는 잠깐 여기에서 새 것을 향한 피곤한 발걸음을 멈추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해오던 그 길로 계속 나간다면 과연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

헛된 망상을 부등켜 안고 계속 이대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거기에서 우리가 만족과 희망을 찾는 한 우리들은 더 이상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설사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미래는 과거와 다를 바 없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잘못된 길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하고 있다.

우리의 눈은 그 동안에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며 우리의 입은 지금도 새로운 것만을 찾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기대하며 새로운 것을 찾고 있지만 우리들 자신안에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새 것이란 바로 구겨진 종이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종이를 손에 쥐고 구겨서 새 것처럼 빳빳하게 다시 쓸 수가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란 구부러진 나무와 같이 인간은 모두 구부러진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

만일에 정원사가 한 나무라도 구부러진 것을 본다면 정원사는 그것을 곧게 하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만일 손으로 그것을 펼수 없다면 줄로 묶든지 막대기를 받쳐서 나무가 곧게 자랄 수 있게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것을 찾아 헛되게 인생을 낭비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에 보면 솔로몬은 자신의 생애에서 많은 부분을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 사람이다.

그가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도 크고 많은 책들을 지었으며

백제 의자왕의 삼천 궁녀처럼 그에게도 후비가 700이요 빈장(嬪嬙)이 300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실망에 찬 한숨과 허무감뿐이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의 실망과 허무감은 많았다.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반란을 일으키며 정권을 차지하였다.

5.16에 따른 개인이나 집단들에게는 각종 상을 수여했으며 1970년 4월 22일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였다.

 

우리나라는 70년대 부터 경제 성장을 서둘러 왔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놀랍게 성장한 모습으로 갖추었다.

그러나 서둘러 이룩한 경제 성장은 많은 모순과 문제를 내포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외채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서둘렀기 때문에 기초를 확실히 다지고 천천히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대충대충 쌓아 올린 것이다.

지금의 4대강이 그러하다. 장기적인 안목이 없이 즉흥적으로 처리하는 행정은 얼마 안되어 헐어 버리기 일쑤이고

포장한 지 얼마 안되는 길은 또 파헤치기를 밥먹듯이 한다.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정책은 조령모개(朝令暮改)식으로 자꾸 바뀌어 학생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문제를 근본부터 착실히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땜질하듯 해결하여 왔기에 또다시 문제는 터지게 마련이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에 기만 당해 왔으면서도 그 본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 새로운 기계, 새로운 교통, 새로운 집, 새로운 가구, 새로운 음식등과 같이

용도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은 많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권태를 바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모두 눈을 뜨고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거기가 거기이다.

 

그렇다면 안철수 의원이 말하는 새정치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흔히 창업을 이야기 할 때 일자리와 같이 기술을 익히고 훈련을 많이 쌓아야 성공을 거둘 수가 있다.

막대한 투자금을 들여 사업을 번창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위험하며 부도를 맞을 수도 있다.

 

아무런 정치 경험도 없는 그가 무슨 정치를 해왔길래 무엇을 믿고 새정치를 하겠다는 말인가?

그가 추구하는 새정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단순하게 새로운 양비론을 펼치며 정치를 하겠다는 뜻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모아 정치를 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그가 말하는 새정치의 진정한 모습인가?

 

우리 말에 "누리"란 말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새누리"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새누리당이 바른 길을 가지 않고 온갖 더럽고 추한 길로 계속 나간다면

그 당은 역겨운 냄새와 같이 누린내가 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찾아 열정과 근심과 갈망으로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은

지난 날의 삶이 너무도 공허하고 불만도 컸었다는 반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똑같은 것을 가지고도 자주 새로운 것을 부각시키며 남들과는 다르게 차별화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새 것이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새 것이란 대개 미숙하고 불안정하며 실수도 내포하고 있다.

자꾸만 일을 만들고 분열되기 보다는 서로 융합하고 보완하여 모두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우리의 양심부터 살립시다.
          도시나 지방의 어느 중심지를 가더라도 한 지역안에는 여러 개의 상점이 길게 늘어져 있고
          그들 사이에는 무언가 은밀하게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에 오직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 한다는 강한 일념으로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그리하여 상대방보다 물건이 하챦고 불리하다 생각되면 가격을 임시 조정하는가 하면
                  싼 물건을 내놓고 서슴없이 속임수나 온갖 편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는 비밀을 간직한 채 진실을 가리우고 이 물질을 넣기도 하며
                  아무런 효능도 없는 물건들을 마치 산삼보약과도 같은 냥 효능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손님들을 위해서 내놓는 누룽지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누룽지가 밥을 다 짓고 난 후에 드러난 구수한 그 누룽지가 아니라
                    실제로는 손님들이 먹다 남긴 밥들을 모아다가 물에 행구고 달궈진 누룽지라고 생각할 때
                    과연 그것이 진정한 누룽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지금도 거리에서는 국적도 이름도 알 수없는 무니만 국내산인 경우가
                      얼마나 허다하게 많던가?
                              이렇게 상인들로 하여금 부정한 방법들을 사용하도록 부추키는 정부와
                              우리 사회의 눈은 어디를 향해 있을까?
                                  그러나 그들은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자기가 먼저 쓰러지고
                                  모두가 망해 버리고 만다는 사실들을 과연 알고나 있는 것일까?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하라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이념과 체계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를 공존하며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희망이 누구로 부터 괴로움을 받지도 않으면서 평화롭게 산다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서로 반대되고 일치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평화란 이루어질 수 없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바가 서로 다른 것만큼 화합하기 어려운 때도 없다.

                                  그리하여 평화는 단순하게 사람들로 부터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 조용히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평화는 우리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행위에 달려있는 것이기에 전적으로 우리의 능력에만 속한 문제는 아니다.

                                  바람직한 평화는 우리의 능력이 허락되는 세계안에서 모든 이웃들과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 행위를 삼가해야 한다.

                                  적대 행위를 삼가해야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인격이나 지위, 권리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며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은 그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연료의 분량만큼 타오르기 마련이다.

                                  남에게 모욕을 주고 보복을 하는 자는 평화를 깨뜨리는 자이다.

                                  이러한 모욕과 복수는 자신이나 상대방 모두에게도 사나운 폭풍우처럼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들고 만다.

                                  지금과 같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약을 올린다거나 댓글로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가 싸움을 할 때 주먹이나 힘보다는 오히려 신랄한 비난에 대해 더욱 더 분노한다.

                                  그 이유는 물건이나 신체의 손상은 다시 회복하면 그만이지만 악담은 끝까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치명적인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에 대한 편견도 생각 속에 박히면 다시 바로 잡기가 어려운 이치와도 같다.

                                   

                                  평화의 붕괴가 어쩔 수없는 자기 방어에 의한 결과라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도 있다.

                                  또한 악법을 저지 시키기 위해 빚어지는 갈등같은 것들은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라 할 수있다.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을 지켜내야 한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해서도 싸울 권리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들이 네몸처럼 나의 삶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나 권력앞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무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쉽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의를 확립하려는 논쟁과 갈등은 오히려 권장할만한 것이다.

                                  만일에 국가가 평화라는 미명아래 사회에 대한 국민으로서의 주장과 요구를 금지시킨다면 정부와 사회는

                                  틀림없이 독재와 부패, 붕괴를 향해 치달으며 무력과 권모술수가 판 치는 암울한 시대가 오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합법적인 논의보다는 폭력적인 시위나 쿠데타같은 사건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하며 그 주동자들의 욕망이나 잘못으로 오히려 국가의 평화를 깨뜨리고

                                  국민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난 과거에 유신 시대가 그러했으며 군사정권 시대가 그러했다.

                                  우매한 사람들은 그 길만이 잘 사는 길이라고 그저 동조하고 따라갔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그것은 모두 새빨간 거짓이었으며 정권의 수단으로 악용한 것이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모두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불안한 시대 속에 살고 있다.

                                  언제 터질 지도 모르는 남북한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시시 때때로 일어나는 강도들의 위협과 경제적인 불안,

                                  그리고 환경의 오염등으로 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탄식하면서 왜 하나님은 이 땅에 불의한 세력들을 다 몰아내고 정의로운 사회를 허락하시지 않는지

                                  호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요즈음 영화 <변호인>의 천만 돌파를 보면서 정의와 진리가 승리하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비록 외적으로는 변화된 상황은 아무 것도 없지만 정의와 진리의 도도한 흐름이 이 역사속에 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우리는 어떤 일에든지 그 방면에 권위자나 시민사회를 무시하고 자신의 판단만을 너무 고수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평화로운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가치가 있는 지 모른다.

                                  이웃과의 평화는 다른 것보다 절제와 관대함 위대한 사고방식으로부터 나온다.

                                  불평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없으며 성을 잘내는 사람들은 짖는 개보다도 무섭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해야 할 것이다.

                                  이 간절한 권고는 오늘날과 같이 한국의 상황이 매우 어려운 때는 더욱 절실하다.

                                  자유가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듯이 평화역시 그러하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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