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법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다분히 형벌제도가 중심을 이루고

                  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반상(班常)을 구별하고 주로 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어

                  국민들이 법을 두려워하고 기피하게 된 것입니다.

 

                  일제시대 때 비록 서구의 대륙법이 도입되었으나 식민지 정책으로

                  법의 적용이 왜곡되어 식민통치의 수단으로도 이용되어져 왔습니다.

 

                  해방이후 중요한 정치변화에 따라 법이 무시되고 힘의 논리가 앞서는가 하면

                  수많은 법의 남용은 역사를 통해 끝없이 반복되어 내려온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그대로 우리의 습성과 관습에 얽매여서

                  어느덧 사실과 객관성보다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진실에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말도 있듯이

                  오늘날의 법은 언제나 힘 있는 자들의 법이며 이념에 따라 많이 변질되어 왔습니다.


                      법을 지키는 자가 손해를 받고
힘 없으면 제대로 통하지 않는 세계가 바로 우리나라일 것입니다.

                  지도층은 법을 어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그 법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법이 갈수록 개정된다는 사실은 바로 그 정치가 불의하고

                  법을 얼마든지 자기들의 마음대로 뜯어 고칠 수가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중국 초나라 명왕 시대에 석사라는 명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아주 청렴 결백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고을을 순행하고 있는 시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인을 쫒아가서 잡고 보니 바로 자기의 아버지였습니다.

 

                  재상은 아버지를 놓아주고 자기 스스로 옥에 갇힌 다음 사람을 왕에게로 보내어 아뢰게 되었습니다.

 

                 "살인자는 신의 아비였습니다. 아비를 잡아 법을 세우려면 불효가 되고

                  그렇다고 법을 무시하고 죄를 용서한다면 이는 불충이 되니 신은 죽어 마땅하옵니다."

 

                  그 보고를 받은 왕은 재상을 벌을 주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왕은 "뒤를 쫒았으나 잡지 못한 것 뿐이므로 마땅히 죄를받을 일이 못된다.
                  전과 같이 일을 보도록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재상은 왕의 처분을 사양했습니다.

 

                  오히려 재상은 " 그 아비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지 못하는 것은 효자의 도리가 아니오,

                  임금의 법을 받들지 못하는 것은 충신의 도리가 아닙니다.

                  왕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왕의 은혜이오나 벌을 받아 죽는 것은 신하로서의 도리입니다."

                  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법이 아무리 잘 제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에게 그 법을 지키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 법은 아무런 효과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법을 제정하고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 법을 무시하며

                  철저하게 준수하려는 마음이 없다면 그 법은 더욱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결국 좋은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법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사람들의 준법정신이 더욱 중요하고

 

                  법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 비로서 우리나라가 유지되며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따스한 부모님의 마음으로

  

 


            6월은 우리에게 얄밉게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6월이 오면 나라를 위해 쓰러져 간 숭고한 영령들의 피와 민중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나라안에는 온통 장미꽃보다도 붉은 정열이 타오릅니다.

 

            이념과 사상을 넘어 남북 정상이 만나 기쁨으로 얼싸 안았던 희망의 계절이요

            2002년에는 월드컵의 축구 열기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감동적인 계절입니다.

 

            6월의 하늘 길을 걷고 있노라면 어디선가 그윽한 향기들이 우리 마음의 천국으로 들어와 더욱 설레이게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요즈음 주변에는 봄날처럼 따스하고 인정있는 모습은 보기 어렵고

           살벌하고 잔인한 일들이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점점 각박해져서 자기 일에만 더욱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TV의 격투기를 보면서 흥분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죽어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애써 기분을 감추응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우리는 한국전쟁을 통해서 고난을 많이 겪었기에

           매일같이 북한에 대한 이야기나 이념문제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습니다.

 

           그것은 또 하나의 우리 마음 속에 북한에 대한 무서운 적개심을 불어 넣고 복수를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이는 이로 갚으라"는 전쟁과 보복뿐입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우리들은 거기에 자연히 물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사랑을 외쳐봐도 자신이 사랑보다 감정을 앞세우고 있는데

           어떻게 이 세계 속에 평화가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져 버린 기성 세대에는 기대할 수 없고 다음 세대에나 기대해 볼 수밖에 없는데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적개심을 불어 넣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통일이 가능할까요? 어려울 것입니다.

           결국 이 땅에 전쟁과 보복은 그칠 날이 없고 그로 인해 온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전혀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식들을 향한 따스한 부모님의 마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란 한마디로 親 (어버이친) 입니다.

           부모란 떠나가는 자식의 뒤를 보다가도 보이지가 않으면 동산위에 올라가서 보고

           그래도 보이지가 않으면 나무 위에 올라 서서 바라보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진정한 부모란 자식이 비록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라도 모든 것이 다 내탓이려니 하며

           날마다 눈물짓고 자식을 위해 기도하며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부모일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국 교회와 우리 사회에게 묻고만 싶습니다.

           과연 우리들은 자식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도했으며 남북통일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 보았습니까?

           걸핏하면 자식들을 내세워서 자기 맘대로 움직이고 북한을 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속담에 "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라" 는 말이 있습니다.

           미운 놈에게 떡 하나를 더 준다는 것은 그 떡 하나가 원수를 친구로 만든다는 기적을

           우리 선조들은 생활 속에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이 가장 아플 때는 자식들간에 싸우는 모습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처럼 언제나 희생을 하면서도 참아내고 빼앗기고도 더 주려할 때

           거기서 싸움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한결같이 날마다 속만 썩이고 눈만 뜨면 싸우고 있는 자식들을 향하여

           조금도 미워할 줄 모르고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주릴 때 채워주며

           목마를 때 마시게 하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조차도 사랑의 정신을 따르지 않는데 있습니다.

           더욱이 교회안에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교회가 행함에는 너무도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너무 똑똑하고 인색한 사람들이 많으면 세상은 사실상 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세상이 화평하려면 모두가 따스한 부모같은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부 폴란드의 유명한 아우슈비쯔 수용소에 맥시밀리안 콜베라는 폴란드 신부가 갇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수용소 안에서 동물처럼 타락하며 빵 한 조각을 위해서는 도둑질도 서슴치 않는 그 때

           허약한 몸을 가졌으면서도 신부는 언제나 남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쓰러지면 그 사람의 몫까지 대신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막사안에서 한 사람이 탈출하여 잡히지 않자 열 명을 골라서 굶어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연병장에 사람들을 세워놓고 그 중에서 열 명을 골라 냈습니다.

           선택된 사람들은 모두가 원망했습니다.

           그 때에 콜레 신부가 나서서 " 제가 이 열 사람중 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 하며

           특별히 가족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을 지목했습니다.

 

           결국 신부는 그를 대신해서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굶어 죽으면서도 마지막까지 남아 한 사람 한 사람씩 죽어갈 때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콜베 신부는 15일째 나치들의 석탄산 주사를 맞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정말 부모같은 마음을 가진 따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한 사람에게는 생명을, 많은 사람들에게는 독재에게도 이길 수 있다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는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 가장 훌륭하고 가장 빛나는 인물 " 로 선정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간과 정력을 다 바치고도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따스한 부모님이 되십시오.

           이러한 부모들이 많아질 때 이 땅에는 반드시 평화가 올 것입니다.

           불의한 세력들은 물러가고 정의로운 평화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5·18민중항쟁추모탑

 

   국가 개조는 잘못된 역사를 바로 돌려놓는 것이다.

 

 

 

 

              누가 내게 주체성이 없는 발언이라고 시비 걸지는 모르지만

              한일 합방으로 부터 시작된 우리의 짧은 역사를 돌아 보면

              미일간의 포오츠 머드 조약(Portsmouth) 이나 강대국들의 카이로, 얄타회담의 결과로

              오늘의 남북이 두 동강이 났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약소민족의 한을 어디가서 달랠 길이 없다.

 

              우리의 한반도는 마치 한 부부가 오랫동안 살다가 헤어진 어느 가정의 슬픈 현실과도 같다.

              평화로웠던 가정에 어느 날 힘센 장정들이 몰려와 가족들을 총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떼어 놓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지금부터 함께 살아서도 안되고 만나서도 안된다며 협박을 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실제로 우리 민족은 2차 세계 대전 후 미국과 구소련의 잘못된 정치적 타협에 의해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더욱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진영을 대표해서 남북은 처절하리 만큼 대리전쟁을 치루어야만 했고

              약소민족의 서러움을 맛보기도 했다.

 

              남북이 갈라진 것도 부끄러운 일이지만 동쪽끼리 서로 헐뜯고 싸우는 것은 더 없이 부끄러운 일이다.

              북한은 북한대로 남한은 남한대로, 북한은 구소련과 중국의 힘을 입고 남한은 UN과 미국의 힘을 입었다.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이니 반동이니 운운하면서 적화통일에 급급하였고

              남한에서는 반공이니 빨갱이니 운운하면서 정권유지의 방편으로 삼아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 났을 때 군부는 쿠데타 과업을 완수하고

              군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겠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하였지만 저들은 군으로 돌아가는 대신에

              정권을 장악하고 계속해서 집권을 하기 위해 보다 강력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집권을 하고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말할 수 없이 무서운 공포 속에 떨어야만 했으며

              저들의 총칼 앞에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충성을 맹세하고 말없이 협조를 해야 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지금의 보수를 자칭하는 정치인이었고 언론이었으며 경제계, 교육계, 종교계들도 있다.

 

              그들은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로지 자기들이 하는 일은 다 옳고

              그들에게 반항하는 무리들은 적색분자로 몰아 이 사회에서 영원히 추방을 시켜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2000년 6월 13일에는 평양에서 사흘동안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이 있었다.

 

              6월 15일에는 남북 정상들 간의 "남북 공동 선언 합의서"가 채택되었으며 이로써 남북 간에는

              전쟁의 공포를 상당 부분 완화시키고 한 민족의 동질성을 전 세계로 각인시키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우리는 누구나가 고난을 만나면 고난을 가져다 준 상대방을 저주하며 미워하게 된다.

              고난을 당할 수록 우리의 증오심은 더욱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는 아직도 일본에 대하여 뿌리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다.

              36년 간의 나라를 잃었던 그 아픔에 대한 기억과 더불어 한국 전쟁을 도발한 북한 집단에 대해

              적개심까지 겹쳐서 우리 민족의 가슴에는 증오심으로 퍼렇게 멍이 들어 있다.

 

              거기에다가 군사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광주시민의 대량 학살은 아직도 그 증오심이 깊게 남아 있다.

              아직도 그 책임자가 누구였는지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가 개조란 마치 어린이가 장난감을 만들 듯이 적당히 조립하는 놀이가 아니다.

              국가 개조가 무슨 장난인가? 어느 누가 그 것을 개조하고 인정한단 말인가?

 

              무엇이 잘못이고 어디부터 잘못되었는 지를 당사자들은 곰곰히 생각해 보고

              국민들이 읽어주는 설명서를 제대로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일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고 북한에 있는 동포들을 가족처럼 여기며

              그들을 따스한 아량으로 끌어 안아야 할 것이다.

 

              군사적인 힘이나 경제적인 힘만을 자랑하지 말고 오직 뜨거운 형제애를 자랑하며

              서로가 용서하고 화해하며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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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와 지도자의 책임

 

 

 


인간의 언행이란 항상 일치되어야 한다.

실천적 의미에서의 행함이 없을 때 말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도자들은 강단에서의 설교나 입술만을 가지고 세상사람들에게 자기 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가정에서나 사회, 모든 일상적인 삶을 통해 매 순간 사람들에게 보고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책임에 대해 말을 할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을 그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와

그가 놓여 있는 상황으로 부터 필연적으로 비롯되는 속박이나 구속, 의무나 임무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는 물론 날마다 마주치는 주위 사람들의 행복에 대해서도 책임있게 처신해야 하고

만일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형벌을 면할 수는 없다.

특히 지도자들이 모든 책임을 다하여 지켜야 할 국민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만일 우리가 지도자를 의무나 임무를 배신한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다면 지도자의 책임은 그 하중이 더욱 무겁다.

그러나 지도자가 서 있는 위치, 그가 둘러 싸여 있는 사회적 계층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책임을 감안할 때

누가 그 양을 계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의 첫 방향이 잘못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한다.

그 방향의 각도가 아무리 미세하다 할 지라도 나중에 얻게 될 일탈은 엄청난 것이다.

 

한 항해자가 순조로와 보이는 물결을 따라 자신 만만하게 노를 저어 나아갔다.

그런데 계속 항해하다 보니 배가 이상하게도 무거운 듯이 별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더욱이 물결이 물결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고 순간 그는 굉장한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배의 키나 돛대는 아무런 힘이 되어 주지를 못했으며

물결이 노호(怒號)하는 소리를 들었는가 싶더니 그 배는 소용돌이 속으로 자꾸만 끌려 들어가고 있있다.

선장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배는 물결에 요동치며 쓰러지고 말았다.

 

물이 분리되던 곳, 사람들이 구조를 기다리는 그 곳에는 아무도 보이지가 않았다.

우리의 지도자는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침몰하고 있는 세월호만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기쁨과 슬픔은 삶에 있어서의 중요한 요소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의 사건 속에서 두 가지를 경험해 볼 수가 있다.

 

즉, 한 사람에게 있어서 슬픔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감정은 불확실하고 변화가 많은 이 세상에서 서로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전이(轉移)되기도 한다.

 

때때로 아침에는 밝았던 우리의 기분이 저녁에는 우울하고 어둡고

아침에는 우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고 있지는 않은가?

 

슬픔과 기쁨은 서로를 적당히 조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이 두 가지로 하여금 서로를 보완하도록 요구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슬픔이 지속될 경우 그 사람은 우울하고 늘 어두운 표정을 하고 다닐 것이다.

또한 기쁜 일만이 항상 있게 된다면 그는 지나치게 가벼운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고난 당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위로가 되어 주지를 못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모두 다 경험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돕고 그들을 이해하는 데도 보다 빠를 것이다.

 

우리의 삶은 지난 날의 아름답고 소중햇던 기억들로 인해서 현재의 쓴 고통을 맛보기도 하고

한 때의 괴로왔던 시련으로 인해서 현재의 기쁨과 행복이 더 없이 찬란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엇 때문에 그러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지 그 원인에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재난의 원인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법칙을 잘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현상일 수가 있다.

 

마음 속에 있는 분노와 그 분노의 폭발, 실패등은 무지(無知)에서 발생하며

그러한 무지는 더 이상의 변명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재난의 원인은 전에 일을 바로 잡지 못하고 그냥 방치해 둔 것으로 부터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떤 재난도 우연히 발생하지는 않기에 잘못을 되풀이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싼 댓가를 치르게 한다.

 

재난의 원인은 돈을 목적으로한 이기심과 탐욕일 수도 있고 부주의한 무관심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보다 주의 깊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많은 재난에서 자기를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재난이 너무 빈번히 발생하거나 오래 지속되어 무감각해진 것은 아닐까?

전시(戰時)에 널려 있는 주검들과도 같이 우리에게도 재난은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재난이 왜 일어 났는지, 결과는 무엇인지를 주목하고 강하게 인식되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 재난의 결과는 죽음과 같이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재난은 인간의 가치를 보다 낮게 평가하도록 우리를 시험할 지도 모른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삶에 보다 큰 가치를 두고 있다.

 

이러한 각자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의무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보다는 먼저 그것을 자기가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이와 반대로 행동하고 맹목적이고도 이기적인 행동에 따라

인간의 삶을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천박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없는 일들을 국가가 대신 나서서 해주기만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

그리하여 자기가 믿고 따를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에게 복종하며 국가에게 세금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정부와 여당, 이익 단체들은  이 모든 일들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힘쓴다.

심지어는 이 일이 우리 모두의 책임이고 국가의 책임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저들의 말은 당연한 것처럼 들릴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그 일은 오로지 국가와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집권당에게 하늘이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깊은 뜻이 있는 지도 모른다.

 

그 동안에 우리 사회는 심각하게 지역간의 갈등과 대립은 팽배해져 있고 남북 사이는 멀어졌으며

국가 기관은 정권 야욕에만 눈이 멀어 민심의 불안들은 점점 쌓여만 가고 있다.

 

배는 이미 침몰되어 버렸고 고귀한 생명들은 배 안에 갇혀 있는데 그 누가 저들을 구출한단 말인가?

다시 한번 상기시키거니와 희망이 남아 있는 한 아직은 재난이 아닌 것이다.

 

내가 저지른 잘못도 아니고 내가 져야 할 책임도 아니니 따라서 국가도 책임질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가?

강한 자들이 당황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소한 문제들이다.

 

사람들은 사소한 실수들을 가지고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피차 너무도 괴로운 일이라고 강변한다.

우리는 모든 과거가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들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그리고 현재를 구성하는 것 또한 모두 작은 것들이며

우리가 미래로 나갈 모든 것 역시 작은 일들이다.

 

작은 조가비들이 하얀 언덕을 이루고 그 하얀 언덕들이 모여 길다란 해변을 이루는 것과 같이

사소한 행위들이 인생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세월호의 참사가 우리들의 눈 앞에서 자꾸만 아른 거리는데

몇 일전, 대통령의 사과문 발표 속에서도 세월호의 괴로움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들어 보면 자책하는 마음이 더 컸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누구라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신속하게 대처만 했더라도....

 

그에게서 국가 운영 능력은  어느 정도 검증은 하였으나 이 모든 일에 그는 너무도 태연했고 너무도 연약했다.

이 모든 일에서 그가 믿을 것이라고는 자신의 수하가 전부였고 그는 회의로써 처신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기에서 아무런 죄가 없다는 냥 문제의 화살을 자꾸만 구원파 유병언에게로만 돌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공권력을 적극 활용했고 문책을 하였으며 강자로서 총리를 지목하는 여유까지 보여 주었다.

 

그러나 주의하라! 지금은 선거철이다.

지도자들은 지금도 국민들의 불신을 가중시켜서 국민들을 절망에 빠뜨리는 쓰라린 기억들이 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그치지 않고 되돌아 오는 부메랑처럼 후회와도 같은 것이다.

오! 만일 그 일이 다시 생긴다면 우리는 결코 두번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리라...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지도자의 잘못과 유감

           

         영화 <포세이돈 어드반쳐>에 보면 커다란 호화 여객선이 바다에 지진이 일어나서 그만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은 그저 막연히 구조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젊은 목사가 용감하게 나서며 탈출을 주장하자 몇 사람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이 막 위층으로 올라갔을 때 밑에 있는 사람들은 물이 갑자기 들어와서 모두가 몰살되고 말았습니다.

 

         목사 일행은 선미를 향해 가는 도중에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그 때마다 많은 문제가 발생하지만 그들은 쉬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마침내 목표했던 선미(船尾)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새어 나오는 증기 때문에 마지막 난관을 돌파할 수 없게 되자 목사 자신이 밸브(Valve)에 매달려서

         증기를 차단하고 그는 추락하여 죽고 맙니다.

 

         그의 희생을 바탕으로 일행은 마침내 구조가 되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이 목사처럼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희망을 부르짖으며

         우리에게 필요한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깨달아야만 할 것입니다.

 

         사실 한 국가의 도덕 수준은 그 나라의 지도자의 도덕 수준을 넘기 힘듭니다.

         불의는 언제나 높은 지위에서 세인들의 존경을 받고 고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에 의해 은밀하게 저질러 집니다.

 

         무서운 말라리아 같은 병은 습지에서 시작하여 고지로 퍼져 가지만 도덕적인 불의는 고지로부터 시작하여          

         저지(低地)로, 일반 서민들에게까지 번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저지르는 죄의 심각성은 그들은 결코 높은 지위에 있을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에 고위 공직자가 부적격자 임에도 불구하고 그 지위만을 탐내어 부정한 방법으로 그 자라에 올랐다면

         그는 자신과 여러 사람에게도 죄를 지은 것입니다.


         공직자가 의학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 자체는 전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의학의 전문가 인냥 행세한다면 그는 높은 수준의 사기 행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운전을 하지 못하는 것이 평상시에는 아무런 죄가 되지 않지만 거센 풍랑속에서 자기가 배를 몰아야 할 때에는

         귀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핏값까지도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부적격한 지도자가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고 민족의 생사권을 좌지 우지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요?

 

         여러 사람의 생명과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울 때 지도자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만큼 슬픈 일도 없습니다.

         지도자들이 존경만 받으려고 하고 희생하기를 꺼려 한다면 누가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국가 존립의 위기가 몰아 닥쳐 지도자가 떨리는 두 손으로 배의 키를 움켜 쥐고 있을 때

         우리는 그에게서 무슨 기대를 걸어야 할까요?


         진정한 리더쉽은 위기 때일 수록 빛이 나는 법입니다.

         위기 때의 지도력이야 말로 진정한 지도력입니다.

 

         그런데 지금 정부는 또 다시 경제를 들먹거리며 자기들만 빠져 나갈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국민들을 향해서 사회불안을 조장하지 말고 국민분열을 획책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무책임하고 자기들의 무능과 국민들의 비난을 딴 곳으로 돌려 보려고 하는 꼼수입니다.

 

         옛 말에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까? 법 무서워 산에 못 가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조금은 거치는 것이 있다고 할 지라도 의례히 해야 될 일은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의식 중의 하나는 이미 일어난 사건마다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크게 잔치를 벌려주고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별로 대수롭지 않는 일처럼 넘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거기에서 별로 공감을 얻지 못한 채 혼돈과 무지에서 방황을 하며

         오늘에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새롭게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누구나 다 당하기를 싫어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고난에는 우리의 잠자던 영혼을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이 민족이 겪는 시련을 강 건너 불보듯 하지 말고 그 속에 우리 무지가, 우리 잘못이 들어 있음을 깨닫고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의 경쟁력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경제 회복도 중요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우리 국가의 희망을 찾는 일입니다.

 

         비록 눈에는 잘 보이지는 않지만 승리의 원료중에는 우리 국민들의 땀과 눈물과 피도 섞여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우리 국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정부는 더 이상 우리 국민들이 분열되지 않도록 남북대결을 자제하고 권력쟁탈을 중단하며

         상처난 국민들의 가슴을 치유하여 속히 희망을 불어 넣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뚜렷한 신념이 없는 지도자들은 스스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온갖 뇌물과 청탁이 오고가는 유혹속에서 자신이 서지 않는다면 함부로 나서지도 마십시오.

 

         우리 국민들도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정치인들과 기업인, 공직자들이 부정으로 신세를 망치고

         우리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는지

         어떤 사람이 나라를 지도하기에 적합한 지를 정의의 관점에서 심사숙고 해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세월호가 주는 역사적인 교훈





       요즘 우리는 TV를 통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갖게 되는 생각이 있다.

       모든 재난이 다 그러 하듯이 재난은 언제나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아쉬움과 회환을 갖도록 해준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난이 왜 일어났고 재난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으며
       그 재난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지를 조심스럽게 접근해 보고자 한다.


       예로부터 우리는 어른들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것이 어른들에 대한 공경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도 낯선 사람이 아이들을 부르면 아무에게나 가지 말라고 가르칠 정도이다.


       맑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온갖 거짓말로 아이들의 순수성을 빼앗아 놓고 
       아이들이 속아 넘어갈 때마다 그것이 재미있다는 냥 시청자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이 저지른 죄가 어떤 결말을 가져올 지는 아무도 모른다. 
       뜨거운 눈물로써 우리 자신의 검은 부분들이 완전히 지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매일 죄를 의식하면서 지내야만 한다. 

       그 죄가 크든지 작든지 어떻든지 항상 주의 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조심성 때문에 죄에 대하여 듣기를 꺼려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심성이 옳게 적용될 수도 있지만 잘못 적용될 수도 있다.


       죄를 말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될 때 그 죄를 묵과하게 되는 잘못이 되고 
       그 죄를 다시 저질러도 된다는 우를 범하고 말 것이다.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죄를 듣기 싫어하는 민족이 되어 버렸다. 
       그것이 군사문화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한다면 하루 속히 고쳐야 할 것이다.


       가장 분명해야 할 종교인들 조차도 더 이상 죄를 지적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보다는 듣기 좋은 말들로 채워가며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고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말로 확대되었다.

 

       결국 이런 보상 교리는 신자들로 하여금 받을 생각만 하게 했지 
       그 나라를 위하여 무엇을 해야할 지를 약화시켜 놓았다.


       이 세상은 너무 악하고 요란하여 나만이라도 잘 믿고 천당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대부분의 교인들 생각이다. 
       이런 의식이 한국 교회로 하여금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


       세상을 비추어야 할 교회들이 빛으로서의 사명을 망각하고 있다. 
       한국 인구가운데 20%가 넘는 많은 교인을 두고서도 여전히 그 사회가 부도덕과 불의가 만연한 까닭은 
       바로 교회가 현실을 기피하고 사후에 갈 천당만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사회는 언제 부터인지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뀐지 오래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모르면서 자기의 입장이 난처해 질 때마다 분위기가 가라앉는다는 이유로

       이내 화제를 돌려 버린다. 
       혹시라도 누군가 바른 충고를 할라치면 사람들은 '넌 매사에 부정적이야"하면서 따돌리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신도 이미 솔직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역사에 있어서 목적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어떻게 보면 역사는 우연, 필연, 자유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愚然)이란 뜻하지 않은 일이 저절로 된다는 의미이고 
       그러한 우연성도 주관에 상관없이 객관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분명한 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중요한 요인 중에 개인적인 요인은 결코 배제해서는 안된다.


       지난 날 우리는 삼풍 백화점의 붕괴로 많은 인명의 사상자를 내고 많은 재산의 손실을 가져왔다. 
       그것은 참으로 서글프고 불행한 사건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었다.


       삼풍 백화점이 붕괴된 가장 큰 원인은 모든 면에 부실공사 투성이었다. 
       설계도, 시공도, 감리도, 관리도, 인허가도 모두가 주먹구구식이었다.


       서초 구청의 8급 공무원 담당자가 삼풍 백화점의 사용허가를 내주었는데 그가 공무원직을 그만 두고 
       구청옆에다 큰 사무실을 차려 놓고 고급 승용차 3대를 굴렸다고 말한다.


       당시 세계 42개국의 공무원 청렴성을 조사했더니 1위가 스웨덴, 2위가 스위스, 3위가 싱가폴이었고 
       우리나라는 21위 였으며 중국이 41위였다.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경영주들의 탐욕이 있었는가 하면 그러한 참사 현장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최명석 군(20세, 11일) 유지환 양(18세, 13일) 박승현 양(19세, 17일)은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장장 377시간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소식들은 너무도 신기하여 
       인간의 생명이란 과연 끈질기구나 하는 것을 새삼 느낄 수가 있었다.


       이번에 일어난 세월호의 침몰 사고 역시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돈만 주면 무엇이든지 통과되는 국가의 행정체계나 
       돈만 있으면 불법을 저질러도 된다는 기업측의 과욕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공직자가 퇴직을 하면 남은 여생을 가족들과 함께 편히 지낼 생각은 하지않고 또 다시 신분 세탁을 하며 
       정부 기관에 남아 계속 일을 하고 있는데 과연 정부와 기업과의 유착관계는 끊어질 수 있을까?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져 버린 지휘체계의 혼선은 우리 국민들에게 말할 수없는 실망감만 주고 말았다. 
       거기에다가 초기 대응에 미숙하기 짝이없는 국가가 보여준 모습들은 과연 그들이 우리 국가인가 싶을 정도이다.


       국가 기관이란 원래가 그 사회의 최고 전문가로 뭉쳐진 최고 권력 기관이다.
       군인이 총을 무서워 하면 전쟁터에 나갈 수 없는 것처럼 
       아마츄어는 기분나는 대로 하면 그만이고 프로는 자기의 생명을 걸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 기관이 죽음을 두려워 해서야 어떻게 전문가라고 할 수가 있을까?

       툭하면 조류타령들이나 하고 극도로 몸을 아끼면서 어떻게 귀한 생명을 구조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배는 이미 기울어져서 사람이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판국에 무책임한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에게 그래도 배 안이 가장 안전하니 기다리라고 했다니 정신있는 사람인가?


       살신성인(殺身成仁)이란 말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가 희생당한 사람이다. 
       만일에 그러한 일만 없었다면 자신은 더욱 잘 살 수 있었는데도 누군가가 국가를 대신하여 사람을 구출하고 
       세상을 먼저 떠났다면 국가는 그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그를 의인처럼 받들고 최대한 보상해 주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원인들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당하고 있는 이 고난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 원인이 어디로 왔던지 간에 중요한 것은 비극적인 우리 고난의 현실이다. 
       오늘날 이 사회속에 고난이 있고 저들이 걸어온 것과 같은 비극적인 인생이 있다.


       희망이란 바로 두려웠던 마음은 사라지게 하고 모든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봄같은 소식이다. 
       방안에 문을 꼭꼭 걸어 잠가놓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봄날의 따뜻한 동산에 올라가 답답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자기의 마음들을 햇살에 비추이면 희망의 꽃이 그 속에서 피어나게 될 것이다.


       예로부터 "민심(民心)은 천심(天心)"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백성들의 마음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민심이 자꾸 땅에서 매이면 국가는 그마만큼 불행해지고 
       민심이 즐겁고 평안하면 천심은 국가에게 복을 내린다는 의미이다.


       지금 우리가 당한 이 고난은 분명히 이 민족이 더 이상 정쟁을 중단하고 
       남북이 속히 화해하며 민심을 돌아보라고 하는 하늘의 깊은 뜻도 있다.

       그리하여 하늘은 오늘도 우리에게 복과 화를 준비하고

       위정자들의 마음을 깨우쳐서라도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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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됨을 위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신 새벽 무덤가에서 여인들이 천사를 만났을 때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가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갈릴리는 북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지방으로 기원전 734년 부터 강대국에 의해 점령 당해왔다.
         앗수르에 의해 병합되어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였고         

         그 후 6세기 동안 갈릴리는 바벨론, 페르시아, 마게도냐, 애굽, 시리아가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그 동안 끊임없이 여러 다양한 민족들이 이주해 와서 이 지역에서 살았던 곳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734년 부터 80년까지 한 번도 갈릴리 지방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서 볼 때 갈릴리는 수 없이 주인이 바뀌면서

            우리 민족과 같이 아픔이 많이 있고 고난을 많이 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사9:1-2에 보면 갈릴리를 "사망의 그늘진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마4:23에서는 예수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셨는데 그 소문으로 인하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천사는 예수가 부활하던 날 여인들에게 나타나 예수의 부활소식을 보여주며        

        "그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너희가 볼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갈릴리는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만이 아니다. 의미적이요,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 곳은 온갖 질병과 악함으로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고 

         예수가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를 삼으셨던 곳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와 고통 당하는 자가 있고 병든 자가 있는 곳,            

         그들을 위로하며 치료하고 희망을 전해 주어야 할 곳이 바로 갈릴리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좋은 나라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자유롭고 질서있게 사는 나라일 것이다.

         나라가 제 아무리 경제와 국방력이 튼튼하다 할 지라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없다.

 

         과거에는 국방이니 안보니 말할 때에 그것은 군인들이 잘 훈련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였으나         

         오늘날의 국방은 군인들만의 일이 아니요 국민 전체의 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총화나 총력안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말이다.

 

         국가라 함은 모든 국민이 다 깊은 잠에 들지라도 늘 깨어서 국민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국민된 자는 누구나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지키는 것이 아닌가?

 

         지난 날 우리가 IMF시대에 국민들이 허리를 동이고 난국해법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 고통분담이란 말이 있다.          노동자와 기업이 고통을 분담하고 정부와 국민이 고통을 분담하면 경제대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분담은 사실상 기독교의 정신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롬12:15-16에서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강조했다.

 

         예수께서도 어느 날 장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셨다.         

         아이들은 모여서 잔칫집 놀이와 초상집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피리를 불면 모두가 따라서 춤을 추고 한 아이가 곡을 하면 모두가 슬프게 곡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몇 아이는 춤을 추지 않았고 몇 아이는 곡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잔치 분위기를 깨는 자들이요, 그 아이들은 슬픔을 나누지 않는 방관자들이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란 고통을 나눌 수 있는 부모의 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였다.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내려가는 정신적인 자세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랑한다면 고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고통을 나눌 때에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역순환을 하면 무관심이 이기주의를 낳고 이기주의는 무서운 재앙을 낳게 된다.           

         이러한 정신들이 우리 나라와 가정과 사회안에 널리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2014년 4월 16일 8시 48분 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앞바다에서 승객 476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갑자기 세월에 지쳤는지 그만 바다에 침몰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6.800톤 급이나 하는 이 거대한 배는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시 단원고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승용차 200대와 화물 등도 함께 있었다.

 

         고귀한 생명 174명만을 구조한 채로 학생들의 생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국민들은 TV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부모들의 가슴은 자꾸만 타들어 갔다.

 

            얼마나 학생들이 바닷 속에서 무서워 하며 떨고 있을까?

         그리고 또 누구를 원망하며 기도를 하고 있을까? 


         이러한 와중에서도 거짓 스팸문자를 보내어 돈 벌 궁리나 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대로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들일까?

 

         흔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모양만 갖추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양과 질에 있어서도 어떠한 동요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강하고 튼튼해야 한다. 

        

         사랑은 신자의 신앙 상태를 말해주고 이웃됨을 반영하는 표증이다.

 

         우리 나라 안에는 별의 별 사람이 존재한다.           

         사기꾼, 전과자, 성폭력범, 술주정뱅이들, 대구사람, 부산사람, 호남사람, 서울사람,

         이 당 저 당, 기독교인 불교인, 천주교인, 잘난체 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을 넓은 아량을 가지고 포용해야 하나가 될 수 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하나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며 사랑없이는 사소한 불화와 이견(異見)으로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남을 이해하게 되고 양보할 수가 있으며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두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과부와도 같다. 

          

         이 세상에서 볼 때 과부는 아무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며 마땅한 대책도 없는 무기력한 자이다.         

         이렇게 형편없고 과부같은 우리가 간청한다고 해서 그 간청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면 큰 오산이다.

  

         대통령을 원망하고 대책반을 부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실망뿐이다.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하여 다 써보지만 문제는 더욱 더 어려워져 갈 뿐이다.

  

         이럴 때에 우리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청은 강청으로 바꾸고 강청은 기도로 바꾸어서 하늘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고난의 바닷 속에 살고 있다.         

         자동차는 많아지고 살기는 좋아졌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답답함은 덩욱 더 증가만 되고 있다.         

         토끼같은 자식들은 또 어떻게 키우며 무얼먹여야 할지...앞 날이 캄캄하기만 하다.

 

         위기는 곧 기회요,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듯이 지금 우리는 좋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했더라면...

         

         다음 번에는 이와 같은 위기가 찾아오면 두번의 실수는 없을 것이다.         

         위기가 찾아오면 모든 생각과 교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와 민족에게 큰 위기가 찾아오면국가의 지도자와 모든 성직자들은 국민들앞에 나아가

         무릎꿇고 지난 날들의 잘못을 통회하고 용서부터 구해야 할 것이다.

  

         삼분오열로 찢기워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그 분에게 매달려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떠나갔던 국민들의 마음은 돌아오고 하늘도 감동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가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셨으며

         장사된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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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YTN 참조 >

    

 

 

                  아! 무심하다. 세월호(歲月號)

     

                인생은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세월호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한 치도 알 수없는 안개와 같은 깊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앞에는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또 아래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다.               

               마치 선원들이 긴 항해를 마치고 무사히 항구에만 도착 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인생의 항구에 까지 무사히 도달하기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인생의 바다에서 물결은 조수의 밀물과 썰물같이

                세월호는 정녕 고달프고 변화무쌍한 우리의 인생인가?

                모든 배에는 각기 그 이름을 갖고 있다.

                또 처음 항해를 시작하는 자기의 항구와 항해하는 목적지를 갖고 있다.

 

                하나의 배가 처음 건조(建造)되면 자세한 검열을 받고 배로써 갖추어야 할 모든 적응력을 확인한다.

                배가 낡아 가면 갈수록 그 가치는 성능이 떨어지고 위험도 그 만큼 높아지게 마련이다.

 

                모든 배에게는 각양 다른 적재량도 갖고 있다.

                100톤 급의 작은 배는 6000톤 급의 배만큼 많이 실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작은 배는 큰 배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좁고 험한 항로들을 마음껏 다닐 수 있다.               

                배가 접촉하는 물의 양이 많으면 많을 수록 배가 쓰러질 위험도는 훨씬 더 높아진다.

 

               

                그 배에 무엇이 실렸는 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세상을 더욱 더 아름답게 해 줄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일감을 더욱 안겨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빵을 더욱 채워주며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도 희망을 안겨 줄 것이다.


                만일에 배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유지하지 않으면 항해도 할 수없고 조정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배에 화물이 없으면 배의 균형을 잡기위해 모래나 자갈, 물 등으로 평형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바닥짐, 평형수라고도 하는데 배는 그 균형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균형감각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때 배는 기울어져서 바로 침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균형감각은 사람에게도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의 욕심이 너무 없게 보여서도 안되지만 너무 비만해서는 더욱 더 위험하다.

 

                배의 항구는 휴식과도 같은 존재이다.

                배가 항해하면서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충분히 휴식하고 보충을 하며 점검하는 곳이 항구다.

 

                어떤 배들은 항해할 준비조차 못하고서 나갔다가 침몰해 버리기도 하며

                어떤 배들은 암초에 부딪쳐서 거친 물살에 흔들리며 산산 조각이 나기도 한다.

 

                그 동안 우리의 인생들도 얼마나 바다에서 부딪치며 파선을 하였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도박, 주식이라는 바다에 빠져서 인생이 파탄나 버렸는가?

 

                지금도 팽목항에서는 고인들의 유품을 고이 간직하며 날마다 슬픔을 달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는 자식이 평소에 아끼던 물건, 비록 때가 묻고 낡았지만

                가엾은 어머니는 그 물건을 볼 때마다 떠나간 자식생각에 그만 눈물을 글썽이고 만다.

 

                아무리 무뚝뚝한 아버지라도 그것들을 보시고는 끝내 그 위에다 눈물로 대신하며

                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면서 울부짖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다고 이미 떠나간 자식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인간의 양심은 마치 배의 키와도 같이 노련한 선장이라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해진 항로를 따라 무사히 안전하게 항해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사람의 부주의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 지 분명히 목도 하고 있다.

 

                지난 날 우리 역사에서도 군부 독재가 나타나 권력의 세월호를 빼앗고서

                나라안에는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죽어 나갔는지 모른다. 

 

              

                군사문화가 시작되자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유신을 통한 끝없는 인권탄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현재에도 고스란히 남아서 지금도 그 세력들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사건들을 은폐하며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라의 키를 잡은 사람들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나라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선장은 신뢰있는 사람으로 신뢰는 항상 양심이라는 선원을 데리고 다닌다.

                양심의 선원들은 예리한 그 시각으로 어떠한 망원경도 없이 선장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육지를 발견하고 암초와 같은 장애물들도 먼저 찾아낼 것이다.

 

 

                우리가 더욱 더 신뢰하는 선장과 함께 항해를 할 수만 있다면

                그 배는 우리들의 정해진 행복의 목적지까지 안심하고 무사하게 데려다 줄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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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와 어르신들께

 

 

 

 

               사계절 중 봄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기쁨을 주고 있는지

               계절의 여왕 여름도 눈꽃 나라의 겨울도 다른 계절보다 더 열등하지는 못하다.                  

 

               마찬 가지로 사람에게도 젊은이들에게만 있는 아름다움이 있고

               나이가 든 사람에게도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거리에서 머리는 하얗게 새고 허리는 둥그렇게 굽으신 노인들을 볼 때가 있다.

               이들의 무릎은 몸을 지탱하기 조차 힘겨워 떨리고 힘을 내야만이 간신히 걸어갈 정도이다.

 

               비록 과도한 노동과 질병, 고통과 슬픔등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린 노인들도 있지만

               꿋꿋하게 이와 같은 것들을 이기고 간 노인들의 모습은 마치 화창하고 아름다운 가을날의 오후와도 같다.

 

               가을 나무에 물든 노랗고 빨간 나뭇잎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찌 마음이 즐겁지 아니한가?

               할 수만 있다면 가는 세월을 붙잡고 나뭇잎들이 푸르고 싱싱하게 좀 더 오래 남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노년기의 성숙함에도 그 안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이 있다.

 

               노년의 아름다움은 봄 날에 솟아나는 새싹과는 달리 누렇게 변해가는 심홍색이다.

               그것은 노년기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하게 부여된 아름다움이고 황혼녁에만 볼 수있는 장엄한 광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생의 짐에 눌려 지친 이러한 어르신들이 

               낮고 약한 목소리로 힘겨움을 호소하는 소리를 들어 볼 수도 있다.

 

               인생의 나이를 먹으면서도 사소한 일들에 매달려 있는 사람만큼이나 부자연스럽고

               가련한 사람들도 또 있을까?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 들었음에도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망령

               육체적으로 쇠잔한 나이임에도 젊은이들의 즐김과 겉치장과 몸짓을 흉내 내고자 하는 추태

               휘청거리는 두 다리로 위험한 곳에 뛰어 들려고 하는 불안

               나이를 감추기 위한 짙은 화장이나 성형

               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에 군림하고자 하는 태도

 

               이러한 노인들을 바라보며 과연 어느 누가 아름답다고 말하던가?

               또한 그 모습이 얼마나 어색하며 억지스럽고 불안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희망이 언제나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 주듯이 "이제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할 때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무릎에는 놀라운 힘이 솟게 된다.

 

               이렇게 만족이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 주고

               나머지의 여정을 힘 있게 걸어 갈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순례의 길은 때때로 고단하고 힘든 길이며

               끝도 없이 계속될 것만같은 두려움과 방해들 때문에 피곤해 지기도 한다.

 

               이럴 때 자신이 처한 형편을 올바르게 판단하고 항상 만족하고 감사하며 진지하게 사는 삶,

               그리고 초지일관(初志一貫)된 마음으로

               변함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인가?

 

               우리 사회가 갈수록 경로사상이 약해지는 것은 변해가는 핵가족 제도의 영향

               타락해 가는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은 언제까지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을 것처럼 여기지만 인간은 모두가 늙게 마련이다.

               그 동안 노인들이 기껏 기르고 가르쳐 놓았더니 이제와서 그 분들의 공덕을 잊어서야 되겠는가?

 

               우리들은 모두 부모 세대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그 빚은 우리들의 생명을 부여 받은 것이요, 우리들의 혈관에는 지금도 그들의 피가 흐른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과 희생의 빚도 졌다. 그런데 지금 그 부모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그 빛나던 눈동자에는 어느 덧 총기가 흐려졌고 얼굴은 창백해졌으며

               당당했던 어깨는 축 내려 앉아 행색은 더욱 남루하여 생기마져 사라졌다.                                          

 

               이러한 노인들을 생각할 때 다른 것들은 다 제쳐 두고라도 노인들의 복지와 기초연금은 너무도 중요하다.

               그것은 어떤 정치나 어떤 당리당략이나 어떤 살림살이 보다도 중요하다.

               이들이 모두 내 가족이요, 자랑스런 우리의 얼굴이고 미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쓸 것은 처음부터 다른 곳에 다 써 버리고 이제와서 기초연금이 바닥났다고 말한다면                                    무슨 염치로 우리의 자식들에게 동방예의지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의 지도자들은 모두가 정장을 차려입고 노인들을 볼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용서를 구하면서 인사부터 해야 할 것이다.

 

               서양 속담에 "꽃은 사랑과 섭섭함을 받으며 진다"는 말이 있다.

 

               노인들 만큼이나 사랑스럽고 희고 아름다운 꽃이 또 있을까?

               이 땅에 사는 노인들이 꽃처럼 시들어 갈 때 그들에게 더 이상 섭섭함이 남지 않도록

               우리는 모두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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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명(辨明)과 이유(理由)

 

 

 

 

 

                        우리 말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물의 한 측면만을 보고 그 사물과 관련된 것이나 여러 가지를 보지 못함을 일컫는 말이다.


                        변명과 이유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유는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마음 속에 생각해 두는 것이지만

                        변명은 결정을 내리고 난 후에 나타난 상황이다.

                        결정은 이유에 근거한다.

                        이것을 변명에 근거한 것으로 보려는 것은 단지 착각일 뿐이다.


                        이유란 현실이다. 그리고 변명은 대개가 지어낸 것이다.
                        변명은 기껏해야 두 번째 이유거나 조금 못한 이유일 뿐이다.

                        이 변명은 결코 우선적이고 직접적인 동기가 아니다.


                        비유란 어느 정도 논리가 타당성이 있어야 한다.
                        비유는 어느 한 쪽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포함하며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같은 잣대로 보아야 한다.

                        적절한 표현내기 http://blog.daum.net/91386/16751806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 과연 올바른 눈, 올바른 입이 있을까?


                        몇일 전, 새 정치 연합의 대표 안철수 의원이 기초공천을 앞두고서

                        국민들에게 철수를 하겠다며 약속하고 철회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 때에 새 누리당 의원들은 때를 기다린 듯 한 소리로 안철수 때리기에 나섰다.


                        이들은 안 의원을 향해서 기초선거 약속은 지키지 않고 안철수를 하였다며 꼬집고 

                        그가 말한 새 정치가 이것이냐며 연일 맹공을 퍼부었다.
                        정치권뿐만이 아니라 모든 언론인들도 이에 가세했다.


                        그렇다면 새 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어떠했을까?


                        지난 날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을 앞두고서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며
                        다시는 그네 정치를 하지 않겠다며 약속을 한바 있다.

                        그러나 막상 선거일이 또 다시 다가오자 박근혜 대통령은 이름을 밖 그네로 바꾸며

                        밖 그네에 새 누리당 사람을 태우면서 또 다시 위험한 누리를 즐기고 있다.


                        누가 먼저 그 약속을 깨뜨렸으며 누가 더 국민들을 속였는가?


                        정치인들은 공인(公人이다.
                        공인은 약속이 생명이며 공인이 약속을 지키지 아니할 때

                        국민들은 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옳을까?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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