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대한 분노를 더욱 높여라

 

 

 

 

 

인간의 모든 신체및 정신적인 기능은 악에 대해 타고난 반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반감이 있다는 것은 그 기능이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감정의 가장 낮은 형태는 반감(反感)에서 시작하여 증오, 그 다음이 혐오이다.

이 단어들은 동물이 깃대나 털을 쭈뼛이 세우거나 격렬한 떨림으로 자기 방어를 취하

일종의 공포심을 뜻하는 말이다.

 

미움은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어떤 무기보다도 위험하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불과 같아서 신중히 사용되어야 한다.

 

물론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 자체보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사람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악은 교묘한 형태들로 우리 안에 침투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사회 정의를 막고 있는 종북 문제나 정치싸움들을 보면 아무 소득도 없는 국력만 낭비할 뿐이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헌법정신과 국가 가치가 아름답고 최상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어떤 의도로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막 잡으면 막걸리가 되는 것이다.

 

한국인 중에 통일에 대한 마음들이 남북한이나 보수나 진보나 누구 하나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대와는 달리 통일이 언제 될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이뤄질 것인지

 

또 통일이 이뤄진다면 이후에는 어떤 문제가 따를 것인지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이며

그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매우 불확실하기만 하다.

 

마치 안개가 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우리의 통일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바로 직시하라!

 

요즈음 북미간의 신경전처럼 미국은 북한을 길들이기에 안달이고

북한은 북한식 대로 핵카드로 맞서고 남한은 남한식 대로 외국과 연합하여 북한을 비난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말씀대로 통일은 대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북한주민이 탈출해서도 아니고

북한이 쉽게 붕괴되거나 남한이 흡수 통일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 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민족 통일을 염원하면서 전쟁을 통한 무력으로의 통일인가 아니면 협상으로서 평화 통일인가

그리고 1국가 1체제인가 1국가 2체제인가의 문제로 통일을 생각하게 된다.

 

한반도의 통일 논의는 언제 어떤 방법의 논의라고 하더라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에 따른 역학관계와

남북 당사자간의 이해 관계와 주변 국가들의 실리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의 남북 통일은 모두에게 보탬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통일이 저해도 될 수있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분단 자체가 우리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동서 냉전 속에서 강대국들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것이기에 우리의 통일문제는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오스트리아의 통일처럼 4강들의 경계를 불식시키지도 못했고

독일의 그것처럼 통일을 할 수있는  기본 조건도 성숙되지가 않았다.

 

1990년 서독이 통일을 흡수 통일하면서 장벽이 무너진 것은

동독인들은 이미 1973년 부터 서독의 TV나 언론 매체들을 쉽게 접하고 서독을 신뢰할 수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자신들의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확신이 있었기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진위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철저하게 북한 출입을 가로 막고 TV를 차단하며

언론들은 매일같이 종북 논란을 쏟아내며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더욱이 종편방송들은 TV앞에서 말 잘듣는 탈북민들을 불러다가 북한의 부정적인 모습들만 보여주고 있고

논객들은 연일 국정원의 입장만을 그대로 전달하며 추측성 보도만을 그대로 내보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북한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고 살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북한을 길들이기 위해

그들의 돈줄을 차단하고 심리적인 압박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든지 통일을 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안에 벌어지는 끝없는 갈등과 치안유지는 계속 늘어나고 말 것이다.

 

하나의 주장을 놓고서도 누가 옳은지 말싸움을 한다면 언제나 힘있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될 수 없고 무력에 의해 얻어진 승리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어떠한 악이라도 미워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인격을 타락시키고 생활을 파괴하며 슬픔과 고통을 낳게하는 무엇이라도 미워해야만 한다.

 

제 멋대로 행하도록 방관되는 사회에서는 불의를 저지르는데 대담하다.

그러나 이기심이라는 불의를 많은 사람들이 증오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은 스스로 떠나가고 말 것이다.

 

패역하고 어그러진 사회에서 악에 대한 반감은 인간의 자아를 정화시켜주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악에 대한 증오심은 도덕성을 한층 더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유든지 이러한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다면 이는 꺼져 버린 불과 같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적도 만들지 못하고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훨씬 더 오래 전에 죽었어야 될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악한 일을 꾸짖고 이 세상을 보면서 불의를 미워하고 책망할 일이 얼마나 많은 지도 것이다.

한 평생을 살면서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한 번도 꾸짖어 보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비겁한가?

 

그것이 비록 자신에게는 관심없고 조용히 살겠다는 뜻이었다면

차라리 그의 무덤을 어느 깊은 산 중이나 지하에다 만들어 주는 것이 낫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기름진 설교강단에서 배부른 설교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를 부르짖었던 셰례요한처럼 되는 것이 아름답다.

 

대중들의 감정은 높은 도덕적 근거보다는 공정하고 진지하기가 어렵다.

언론들이 이를 어느 정도 교정을 시키고는 있지만 우리의 언론또한 양심을 저버린지 오래이다.

 

격렬한 폭력을 수반하는 대중들의 분노와 편견, 탐욕등에 영합하려는 언론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다.

그러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며 공정하고 올바른 기사를 싣는 언론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언론이 있다면 그 언론이야 말로 우리 사회를 지켜주며 안내해 주는 견고한 망대(望臺)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중들이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과감하게 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의 결여는 그 것만큼이나 더 경종을 울려야 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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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에게 정직하라

 

 

 

            사회 조류는 때때로 아무런 문제없이 조용히 흘러갈 때가 많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바쁜 지 책도 별로 보지 않고 생각도 깊이 하지 않는다.

 

            종교는 대부분의 경우 이미 존재하는 원리들을 반복하며 선포할 뿐이다.

            매사가 그렇게 시시하고 틀에 박힌 코스대로 그대로 통과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힘 없는 서민들이 무시되고 힘 있는 부자들이 대우받는 불평등한 시대에 살고 있다.

            경제는 갈수록 침체되고 사회도 매우 불안한 데 청년의 실업률은 OECD국가에서 이미 꼴찌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사회적 분위기는 점점 더 거창해지고 화려해지며 진수성찬을 차려놓

            즐거운 음악소리에 맞추어 모두가 기분을 내고 있다.

 

            이런 부조화되고 모순된 사회현상은 우리 국가의 장래에도 커다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예민하게 이 시대의 위기를 감지하고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며

            위기에 대처할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내주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나태함과 우매함,

            그리고 자신을 더욱 불행하게 만드는 무기력에서 깨어나게 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격동기를 맞고 있는 한국 사회는 지금 급진적인 혁명 시대가 물러가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려는

            전환기에 와 있다.

 

            이러한 때에 이성의 선함을 전제하고 악의 근원을 정부형태나 민주주의의 부재안에서만 찾는다면

            우리의 아름다운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자신과 주변 세계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다.

            대개 이러한 견해는 뚜렷한 논리적 근거없이 전제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갖고 있는지 조차 모를 때가 많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 선과 악, 정의나 불의를 결정하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과 논쟁을 하게 되면

            똑 같은 상황에서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경우를 볼 수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정치나 사회, 경제문제를 살펴보면 사람마다 많은 견해차이가 있음을 볼 수있다.

 

            그런데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폭력이나 혁명적인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화적인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똑 같은 문제를 두고서도 어떤 이는 과학이 더 발달하면 공해 문제도 과학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어떤 이는 오히려 과학의 발달이 환경오염을 더욱 더 가속화 시킨다고 주장한다.

 

            결국 이러한 논리들을 따지고 들어가다 보면 근본적으로 변치않는 자신의 전제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 문제를 아무렇게나 풀 수없듯이 모든 사고 활동도 전제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역사는 변화하며 발전한다. 누구도 이를 거스릴 수는 없다.

            거스리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역사는 우리나라가 지금 비록 자유를 누리고는 있지만 위기에 처해 있음을 알리기 위해

            각종 재난과 사고등으로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금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아무도 심각하게 그 재난의 의미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의 참사가 일어난 지 지금도 악몽이 깨어나지 않았는데 얼마 전, 성남시 판교에서도 어처구니 없는

            추락사고가 있었다.

 

            지난 10월 17일 성남 판교 테크노 밸리에서 공연 도중 맞은 편 건물 환풍구 위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27명이 환풍구가 무너지며 20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16명이 숨지고 11명이 크게 다쳤다.

 

            첨단 과학의 기술로 지은 건물이 왜 이런 엄청난 사고가 생겼을까?

 

            아무리 좋은 축제나 잘 지은 건물이라 할 지라도 안전하지 못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관계자들은 별 일 없으려니 하고서 모든 안전 조치에 소홀히 했던 것이다.

 

            이 사고는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사람들의 혼잡이 예상될 때는 더욱 주의 깊게 안전 예방에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이다.

 

            오늘 우리 사회에도 이와 같은 안전 장치를 해 두려고 역사는 사람들을 바꿔가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지난 6.4 지방 선거에서 나타난 전국적인 진보 교육감 선출은 단순히 어떤 이념이나 지역보다는

            순수한 국민들의 투표에 의해서 책임자를 선택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서울이나 경남등 다른 도시들이 그런 방식으로 교육감을 바꾸어 놓았다.

            그들을 바꾸지 아니하고는 변화되는 새 역사에 부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역사의 전환기에 서 있는 우리들은 어떠한가?

            나는 이번에 선출된 교육감이야말로 이 사회를 위해 사명을 띤 지도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당장은 교육부터 바꿔져야 할 만큼 우리 사회는 안전하지 못하며

            저들 속에서 느껴지는 예민한 위기 의식으로 교육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 동안 우리 국가는 너무 경제나 힘만을 강조한 결과 나라 안팎으로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평화가 올 줄로만 알았던 남북관계는 끝 없는 기싸움과 대북전단 살포로 중단되고 말았고 사회는 이념과

            지역 갈등으로 더욱 심화되었으며 우리 주변에서는 도덕과 안전 불감증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지난 MB 정권 때 밀어부친 4대강의 예산 낭비는 지금도 말이 많은데 현재의 중앙 정부가 강력히 지원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모처럼 마련된 아이들의 무상교육이 중단될 위기에 놓여 있다.

 

            세상에 어느 가정이 아이의 행복보다 자기 집을 위해서 담장을 높이 세워놓고 CCTV를 설치하며

            비싼 가구들부터 들여 놓는단 말인가?

 

            우리는 지금 분명하게 역사의 전환기에 서 있다.

            모두 다같이 내 생각, 내 고집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지혜와 정직함으로 자신부터 달라져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지금도 무엇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비난 받는 것이 두려워 피하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이 불의인 줄 알면서도 인정에 못 이겨 자신의 양심을 팔고 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사회 생활을 쉽고 편하게 하기 위해 동정앞에 무릎꿇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는 쉽고 편할 지는 모르나 결국에는 자신의 떳떳한 목소리를 낮추게 하는 약점이 된다.

 

            누가 우리에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는가?

            누가 우리에게 여우들 틈에 있을 때는 여우처럼 행동하고

            늑대들 틈에 있을 때는 늑대처럼 행동하며

            사자들 틈에 있을 때는 사자처럼 행동하라고 말했는가?

            그러나 그래서는 안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사람답게 행동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도 성공할 수 없다면 차라리 양심이 꺼릴 것이 없게 작게 성공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의 판단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의견에도 따르지 말라.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떠들고 어떻게 생각하든 지 자신의 판단에 옳다고 여겨진다면 그 일을 행하라.

 

            세상에서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볼썽 사나운 행동이나 서두르는 마음이 아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거만한 태도를 버리고 항상 자신에게 정직하며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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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와 가난한 자

 

 

 

 

 

 

 

            이 세상에서 돈 만큼이나 힘 있는 것이 또 있을까요?

            돈 앞에서는 사랑도 보이지 않고 만물이 다 고개를 숙입니다.

 

            재물의 힘이 얼마나 센지 그것을 소유한 자는 달리 의지할 대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부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타락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에 인정받기도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부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만이 부자인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진정한 부자란 빚이 없고 생활 필수품을 조달하고도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는 고립입니다.

 

            우리가 가난해 질 때 우리는 외로와 집니다.

            친구가 우리를 떠나거나 우리가 그들을 기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형제들도 우리에게서 떠납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난한 자를 회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를 더욱 고독하게 내버려 둔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야 하며

            온갖 더러운 악취들도 향수처럼 참아내야 하고 땅에서는 힘들게 일을 하며

            공장에서는 쉬지않고 작업하며 시장과 거리에서도 고되게 일해야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부자는 가난한 서민들의 사회 진출과 학문과 행복과 자유와 건강을 위해

            아무 것도 돌보아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가난으로 고통할 때 부자들은 오히려 비대해집니다.

            가난한 자는 간절한 말로 구하여도 부자는 엄한 말로 대답을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아무리 지식이 많고 인격이 훌륭하다고 해도 누가 가난한 사람들과 친구가 되려 할까요?

            그리하여 우리는 단순히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주는 것만으로는 그들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절망의 바다에서 스스로 헤엄쳐 나올 수 있도록 튼튼한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입니다.

 

            힘이란 무엇일까요? 정의를 위한 능력입니까? 불의를 위한 권력입니까?

            요즘 우리 정부의 하는 일을 보고 있으면 정부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실제로도 힘 없는 노동자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최저 임금등으로 사측과 맞서 시위를 할라치면

            우리 정부는 기업이 살아야 한다는 명목으로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감옥에다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정부는 보수 단체들의 대북전단 살포에서는 그냥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대북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제한할 법적규정은 아직 없다고만 강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편방송사들은 한 술 더 떠 저들을 위해 써포트 된지 오래입니다.

            보수 단체가 행동을 개시하면 자신들의 임무가 무엇인지 아름답게 포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편 일의 대가는 정확하고도 정직하게 보상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부 부자들은 가을날의 수확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합니다.

            부자들 사이에는 노동의 가격을 깎아 부당한 대우를 하는 예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부자는 경쟁에서 성공하기 위해 힘없는 서민들을 악용하여 그들보다 더 싼 노동력으로

            사업을 크게 일으키고자 합니다.

 

            성경에서도 야고보는 부자들의 부당한 재물이 소리지르며 노동자가 울부짖는다고 표현했습니다.

            금은 보화가 금고에 쌓여갈 때 날카로운 외마디로 복수를 부르짖는 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지고

            압제받는 수많은 서민들의 요구가 아무리 정당하고 이들의 호소가 아무리 급박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은 이에 귀를 기울이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러한 호소는 마침내 하늘에 상달되고야 말 것입니다.

            추수꾼들의 신음과 탄원을 듣고 이에 보응하기 위하여 하늘은 마침내 채찍을 꺼내들고

            가난한 서민들을 짓밟는 부자들을 문책하며 그들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징계를 내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부유한 사람들의 재물을 부러워 하며 힘있는 자들의 권력을 부러워 합니다.

            이들은 물론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평판이 그것보다 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일찌기 가난한 옷을 입었어도 무엇이 행복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행복이란 결코 즐기는 삶이 아니요 방심한 상태도 아니며 희희낙락하는 웃음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열심히 사는 것이요 꾸준히 수고하는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누가 인생을 마치 집과 같다고 표현했습니까?

            그러나 그 길이는 눈으로 측정되지 않고 날과 달과 해로 측정됩니다.

            어떤 인생은 매우 길지만 어떤 인생은 매우 짧습니다.

 

            때때로 이 집의 거주자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이 그 집을 소유하면 그 집은 구두쇠의 집과같이 자기만을 위해 좁고 불편한 집이 됩니다.

 

            우리의 통일 문제는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지금도 남북사이를 왕래하는 저 강물을 보십시오.

            한반도에서 이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한 것이 또 있을까요.

 

            남녘 들판에서는 벌써부터 물결치는 곡식이 풍성한 수확을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 마음의 들판에는 아직도 무성한 갈대만이 누렇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곡식이 물결치는 들판에 서서 그것들이 바람에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그것은 정녕 "사람이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하늘의 음악이며 자연의 소리입니다.

 

            통일로 가는 길목에서 국민들의 동의없이는 그 어떤 것 하나라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남과 북, 해외에서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여!

            농부에게서 인내를 배우십시오.

 

            농부들은 농사짓는 일에 대해서 조바심을 내지도 않으면서 무관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은 후에 얼마 가지도 못하면서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망의 싹이 지체되어 속히 나지 않으면 짜증을 부리기 일쑤이고 포기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풍성한 결실이 맺어질 수 있을까요?

            과연 마음이 조급한 사람들에게 무슨 소득이 있을까요?

 

            농부들은 이른 봄에 밭을 갈고 돌을 골라주며 밭을 휴경하기도 하며 써레질을 합니다.

            이것은 밭의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씨앗이 발아(發芽)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농부가 어떻게 결실의 때를 기다리는지 깊이 상고(詳考)해 보고

            우리가 초조하면 할수록 우리의 추수의 때는 더디게 실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모두가 반성하는 시기이지 황금빛 들녘을 자랑할 시기는 아닙니다.

            그 동안 우리들은 통일을 이루기 위해 무슨 씨앗을 심어왔는지 곰곰히 생각해보고

            내년에는 더욱 더 분발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진리의 가지가 뻗어 믿음의 잎이 되고 사랑의 꽃이 피어 조금씩 조금씩 더 커지고

            더 푸르고 더 성숙해져서 결국에는 아무도 말릴 수가 없을 때 완전한 통일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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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인권에 대한 유감

 

 

 

 

어느 날 소크라 테스와 베이컨이 만나 서로 협상하기를 "니 꼬라지를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했다.

 

지난 날 우리 민족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서로 죽이고 파괴한 지 언 반 세기가 지났다.

동서 냉전의 시대가 끝나는가 싶더니 어느 사이에 경제와 문화교류를 시작으로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로 변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중국과 교류하고 심지어는 우리나라를 강탈해간 일본하고도 동맹을 맺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한반도에는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며 적대시하는 반목과 증오가 여전히 남아있는 실정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지난 날의 한국 전쟁과 천안함이나 각종 사건을 겪었기에 북한과의 사이가 멀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북한의 완고함과 억지, 도발적인 행위가 점점 우리가 멀리하게된 이유가 되고 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도저히 저들과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면서 또 다시 위험부담이 없는 일상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북한과 통일을 해야된다고 기도도 하고 주장도 하지만 그것은 오직 저들이 우리에게 머리 숙이고

"잘못했습니다"하면서 용서를 비는 통일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우리가 저들을 용납할 수 없고 저들은 전부 나쁘고 우리만 옳다고 확신하며 고집을 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북한을 비난하며 여론을 만들고 변화를 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며

무슨 자격과 염치로 북한에게 인권을 말하는가?

 

또한 시민 사회가 그렇게도 만류하던 삐라 전단지도 요지부동이며 장차 우리에게 무서운 재앙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다.

지금도 남북한은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데 풍선 속에는 사람을 살리는 돈이든지 아니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누가 무엇을 어떻게 보냈는 지도 알 수가 없다. 어찌하여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가?

 

지금 우리는 튼튼한 안보의식을 갖고 상대방을 욕하고 사이버를 검열하는데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가 분열의 역사를 지양하고 화해를 이루어 갈 수있을까를 연구하고 기도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국내에서 일어나는 사회 문제와 정치 현실에 깊이 참여를 해야 할 것이다.

과거 우리 민족은 방심하고 있을 때에 한국 전쟁으로 상처받고 경제로 신음하였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며 우리는 말할 수없이 많은 타격을 입었다.

 

자유가 무엇이고 정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체 우리의 인권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며 우리는 그저 군사 정권이 시키는 대로 가두면 갇히고 때리면 맞고 죽이면 희생을 당하였다.

 

그 때에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정의를 부르짖고 민주화를 외치며 총칼에 쓰러져 갈 때 우리의 언론들과 종교인,

보수 정권은 과연 무엇을 하였는가?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고 찬송부르며 애써 외면하려 했고 애써 무관심하려 했던 것이다.

     세상이 바뀌면서 계속 터져 나오는 비리들을 보면서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사명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분단된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는 불신을 조장시키는 교육이 강화되어 이 불신의 씨앗이 남북간에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 그 씨앗은 바로 우리 사회를 좀 먹고 우리 가정을 파괴시키고 있다.

 

어디에나 뿌려진 이 불신은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라나 우리의 가정과 이 사회를 질식시키며 이 사회를 점점 불신의 사회로

물들이고 있다.

 

남북한의 여러 회담들을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너무도 깊은 불신의 벽이었다.

분단 반 세기가 넘는 동안 불신의 뿌리들은 이제는 어쩔 수없는 거목으로 자라나 아무도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고 있다.

 

결국 이 불신이 이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그냥 방치한 채로 평안히 지낼 수가 없다.

 

이 사회가 이렇게 혼란된 상태 속에서 우리는 안정을 찾을 수가 없다.

이 민족의 분단을 그냥 놓아둔 채로 우리는 희망의 노래를 부를 수가 없다.

 

이 사회의 누군가가 먼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남북한의 누군가가 먼저 손 내밀 때 통일의 여명이 밝아올 것이다.

지금 북한 사회가 매우 어렵고 혼란스럽다.

그러기에 우리는 더욱 더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 민족이 세계 속의 위대한 민족임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 밑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순수한 인간애보다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남북한의 순수한 인간애는 억지로 나타내는 우리의 그것보다는 더욱 더 아름답다.

 

마찬가지로 북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생활을 도와주고 탈북자들을 도와주며 그들의 인권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이 민족에 대한 순수한 사랑 이념과 사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같은 핏줄이 가질 수있는 그 사랑을 잃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아가 이 땅에서 다시는 한국 전쟁과 같은 군사 쿠데타나 5.18광주 학살이나 연평도 포격들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우리 국가가 저지른 엄청난 불의나 성범죄나 세월호의 침몰 사건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가졌는가?

 "니 꼬라지를 아는 것이 힘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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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헛된 논쟁을 삼가라

 

 

 

 

          우리는 지난 2014년 4월 16일 TV를 통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난 세월호가 침몰하여 수 많은 인명들이 죽어간

          역사적인 사건을 지켜보았다.

 

          수 많은 국민들도 팽목항에 나와서 자꾸만 바닷 밑으로 끌려가는 학생들을 생각하며 망연자실하며 울고 있었다.

          급기야는 유가족들이 거리로 몰려나오고 항의도 해보지만 안타까운 그들의 심정만은 아직도 위로가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저들 보다도 먼저 발 벗고 나서서 자기 일처럼 도와 줄 수는 없었을까?

          도대체 세월호의 특별법이 무엇이길래 국가는  저들에게 그것만은 안된다며 저리도 완고하게 나오는 것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흥정하며 정치적으로 해결하려고만 하는 것일까?

          진실로 대한민국 안에서 아이들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이 모든 것들은 자꾸만 우리들의 마음을 슬프게만 한다.

 

          대개 사람들은 논의를 하고자 할 때에 서로 의견이 잘 맞으면 어떤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능히 해낼 수 있다.

          그러나 논의가 길어지고 논쟁이나 정치이야기로 흘러 집안 싸움까지 번지면 그 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기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도를 넘어 지나치게 시간을 오래 끈다면 짜증을 부리는 것이다.

 

          말다툼이란 본질적으로 무익한 것이다. 그리고 논쟁의 주제가 말에 대한 문제일 때는 더욱 무익하다.

          말다툼은 의심스러운 것을 해소시켜 주기 보다는 누가 더 힘이 쎈지 오히려 의심을 더욱 증폭시킨다.

 

          물론 논쟁은 필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반대로 필연적인 악이기도 하다.

          이성과 논리에 근거한 시비는 자주 현인(賢人)들에 의해서 권해지고 실행되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그 함께하는 무리들이 정당한 이유를 거부하고 격한 감정으로 나아갈 때 다툼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 때에 자기를 변호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든 방법은 오히려 분열을 확대시키며 적대감을 부채질하는 격이 되고 만다.

 

          비록 그 다툼의 문제가 많은 사람들의 주목거리는 되지 못할지라도 그것은 공익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실들을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게 한다.

 

          심지어 사람들은 처음에 다툼이 왜 시작되었는 지도 잊은 채 사소한 충돌에서 시작하여

          급기야는 피 흘리는 일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인간은 쉽게 해결할 수없는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분위기 전환을 위해 때때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분쟁만 일으키고 시간만 허비하는 유치한 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모든 싸움들은 상대적이어서 우리는 대단히 깊이 관여하거나 상관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정의를 혼란시키고 빛을 가리며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싸움에는 모두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우리의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당연히 싸워야 한다.

 

          우리들 가운데에 비록 그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불의 앞에서 참지 않고

          정의의 이름으로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만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무엇이 옳고 그른 가를 알고자 할 때에는 어떠한 원칙들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가 인정할 수있는 합리적인 주장이어야 하고 방법은 언제나 정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말꼬리만 잡고 늘어지는 사람은 마치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처럼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 무언가 모면하려고 하는 계략이 숨어 있다.

 

          여기에서 밀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으로 모두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논쟁은 아주 해로운 것일뿐만 아니라 논쟁을 하고 있는 당사자들까지도 해롭게 만든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정치인들도 처음에는 서로 만나서 화기 애애하게 논의를 한다.

          그러다가 대화가 중단되고 나면 협상을 하게 되고 협상이 깨어지고 나면 상대를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전략일뿐 결론은 오직 한 가지 자기들의 방식대로 해결되는 것이다.

 

          과거 우리 정치인들은 자기들에게 불리한 일이 닥쳐오면 한 쪽에서는 시간을 끌어가며 국민들을 자극시키고

          다른 한 쪽에서는 언론이나 사법부들을 끌어다가 상대를 자극시켜 왔다.

          그런 명분이 주로 경제이야기나 서민이야기이며 정치인에 대한 나쁜 이야기다.

 

          오늘날의 정치인들이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으려면 이런 전술을 효과적으로 잘 구사해야 한다.

          이런 전술을 잘 해내야 자기 정권을 효과적으로 지킬 수 있고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매한 국민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그러려니 하고서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고도의 정치이다.

          정치란 한 마디로 사람들을 묶어 놓고 그들을 통치하는 기술을 말한다.

 

          그리하여 정치인들은 흩어지려는 사람들을 하나로 연대시켜 자기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몰아내고

          거기에 자기들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 정치인들의 속셈이다.

 

          결국 인간의 흩어지려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를 갈망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개인주의적 성향은 인간이 바라보고 나갈 삶의 중심을 잃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간이 삶의 중심을 다시 찾을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진리의 싸움에는 나쁜 전략으로 인해서 많은 싸움들이 패배해 왔다.

          그러나 진리의 싸움에는 노련한 장수처럼 공격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우리가 만일 우리의 내면이나 주위에 있는 불의한 적을 물리치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적이나 도덕적인 모든 힘을 모아 불의와 싸워야만 한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정부패의 대다수가 정의를 외면한 잘못된 정치에 있기에 우리는 더욱 더 정의를 강조해야만 한다.

          이렇게 정의를 외쳐야 할 사람들에게 엉뚱한 사람들이 나타나 자기들이 정의이며 따라오라고 강요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거기에 굴복할 때 마침내 우리는 자유를 상실한 채 그들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어떤 사람이 힘을 이용하여 양식산을 자연산이라고 우긴다 해서 자연산이 될 수는 없다.

          양식은 양식이고 자연은 자연이다.

          본질을 망각한 채 헛된 논쟁을 삼가라는 말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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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의 요구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에는 의(義)와 불의(不義)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한 채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은 진정으로 정의를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의 만족과 이익을 위해서 정의를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빛은 희망입니다. 빛은 어두움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리하여 희망을 비추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와 불의에 대해서는 분명해져야 합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신념과 용기를 갖고 하루 하루를 살지 아니하고

                                   겁을 낸다면 그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날마다 근심하고 걱정을 하는 것은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행복하고자 하는 자신의 소망과 함께

                                   실천하는 노력들이 뒤따라야 합니다.

 

                                   우리들은 시대에 따라 무조건적으로 과거의 모든 전통을 외면해서도 안되며

                                   새로운 것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들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기에 무조건 받아들여서도 안되며

                                   그것이 과거에 있었다는 이유로 무조건 거부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과거 우리 정치인들은 선거철만 되면 유권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왔습니다.

                                   후보자들은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서 하지도 못할 억지 공약들을 남발하며

                                   만일에 당선이 되었을 때는 어려운 공약들은 갖가지 변명으로 철회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당했구나를 생각하면 그것이 과연 우리 국민의 수준이요,

                                   우리 정치의 현주소인지 은근히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소크라테스가 말한대로 이제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바른 의식을 갖고 이 시대에 희망을 선포해야만 합니다.

                                   단지 정부나 언론이나 종교계만이 희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일하는 일터, 즉 학교나 직장이나 가정, 그리고 외면 당한 공원에서도

                                   우리의 희망의 소리는 내일도 계속 울려 퍼져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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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火)과 죄(罪)

 

 

                           

 

 

                  우리는 종종 TV나 신문을 통해 큰 화재 사건을 접할 때가 있다.

                  그런데 그 사건에 대한 결말은 대부분이 그 불의 원인을 자세하게 모른다는 사실이다.

 

                 당신은 지금 시내의 한 복판에서 불에 타기 쉬운 물건들을 모아놓고 그 위에 작은 불씨 하나를 던져 보라.

                 그리고 나서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라.

                 그 불씨는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옯겨 붙어 하나의 큰 불을 이루고 결국에는 이 집에서 저 집, 이 길에서 저 길로

                 마음껏 옮겨 다니며 마침내는 도시 전체를 악마의 불꽂 속으로 빠지게 할 것이다.

 

                 죄도 이와 같다.

                 하나의 작은 죄는 한 개인 안으로 들어와 그 개인 전체를 더럽히고

                 한 사람의 잘못된 행실은 그 사람의 가정과 이웃들에게 악영향을 끼치게 하며

                 한 사람의 타락한 모습은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에게 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한 사람의 범죄는 그 사람이 속한 나라 전체를 타락시킬 수도 있다.

 

                큰 불은 나무와 같은 연약한 것들을 불로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불은 그의 재료들로 자신과 같은 불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것은 죄도 마찬가지이다.

 

                죄는 자신이 지배하는 모든 것들을 저주로 변화시킨다.

                죄는 인간의 건전한 소유욕을 무분별한 욕심으로 변화시키며 인간의 바람직한 야망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한 바를 이루려고만 한다.

 

                보라! 한 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신체가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죄로 인하여 쇠약하고 추하게 변해 버렸고

                한 때는 강력하고 나는 새도 떨어 트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죄로 인해 그 힘을 상실해 버렸다.

                또한 한 때는 희망으로 부풀었던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서 불과 죄를 바라보며 어떻게 대처해야 옳을까?

 

                큰 불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태우고 힘이 없을 때에야 비로서 꺼지게 마련이다.

                공인들의 언행이 사회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처럼 높은 사람들의 죄는 아름다운 사회를 혼탁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일반 사람보다도 그 책임을 더욱 무겁게

                만일에 부정을 저질렀을 때에는 죄를 가중하여 형벌함이 옳다.

                당신같은 사람들로 인해서 이 나라가 더욱 더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말해 주어야 할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툭하면 불기소, 심심하면 집행유예로 봐주는 것은

                이는 우리 국민들을 너무 우습게 여기는 처사이며 가진 자들만의 특혜이다.

                이것은 결국 권력을 잡으면 자기들 편리한 대로 얼마든지 법을 뜯어 고칠 수도 있다는 자기들의 오만이다.

 

                아름다운 세상이란 결코 힘 없는 자가 무시받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옹호받는 세상이다.

                힘 없는 사람들은 권력앞에서 이성을, 무력앞에서 권리를 더욱 갈망한다.

                그러나 민족적 기질이나 사회적 기질, 힘 있는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모든 것들을 자기들의 마음대로 밀어 부치는 것이다.

 

                결국 그 책임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있다.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오늘의 기성 정치인들을 변화시키기에는 저들의 마음이 너무 완고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미래를 내다 보면서 다음 세대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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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경계해야 할 사람

 

 

 

 

 

 

인간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어둠과 빛, 불의와 의를 따르는 사람이다.

 

두 종류의 사람들은 결코 화합할 수가 없다.

또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화합하기란 거의가 불가능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기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자기를 반대하는 자요 자기를 헤치는 자도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옳은 편에 선다고 분명하게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는 우리가 선택한 그 길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소수요, 고난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정의에 있어서는 결코 중간자의 입장을 취하는 방관자가 있을 수 없다.

이는 생명의 반대는 언제나 죽음이지 생명과 죽음에서 중간상태는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적이 있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럭저럭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 공허하게 가치없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죽어서 땅에 묻힌 사람은 그 무엇과도 충돌하지 않는 것처럼 움직임이 없는 사람에게는 적이 없다.

 

무엇인가 자주 부딪히고 충돌한다는 것은 자기가 어느 위치에서 분명히 존재하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떠한 사물이나 사람을 두고 적이라 칭할 때는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적은 내게 아첨하지도 않고 나의 좋은 점을 그대로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단점만을 끄집어 내어 확대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들도 때로는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자신의 단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적은 항상 우리가 편한 대로 놓아 두는 법이 없다.

적은 우리의 소중한 재산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빼앗아가 버린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 중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함께 한다.

하나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가 편히 잠잘 수 있도록 날마다 지켜준다.

주위의 시끄러운 것들을 물리치고 불빛을 낮춰주며 아무 것도 우리의 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은 우리가 편히 잠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방해한다.

그들은 잠들려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기 일쑤이고 한시도 방심할 틈을 주지 않고 항상 긴장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적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의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만일 진정한 친구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거든 그를 좇아가 보라.

누가 당신의 친구이고 누가 아닌지는 분명히 밝혀질 것이다.

 

당신의 단점을 찾아 내려는 사람

당신의 명예에 손상을 입히려는 사람

당신이 저지른 실수를 들춰내는 사람은 바로 당신의 대적이다.

 

당신의 행동 가운데 조그만 잘못이라도 과장하여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이 보고 분노를 느끼게 하는 사람

어떻게 하면 일이 잘 해결될 것을 알면서도 당신이 실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이 모두가 당신의 대적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의 대적들로 부터 이와 같은 비난을 받아 보았을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비난들을 단순한 우연으로

가끔씩 일어나는 일들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대적들을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대를 따라 변절하는 자들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일제 때에는 일제에 협력하고 해방이 되었을 때는 가장 애국자인 척 군사 독재에 협력하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갈등을 일으키는 자들을 가장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의 태도가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온갖 이기주의와 위선으로 지금도 악한 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

 

종교에서도 신처럼 생긴 것은 모두 신으로 알고 제 멋대로 신을 섬기고 있다.

어떤 신에 빌려서 안되면 또 다른 신으로 옮겨가서 계속 자신의 만족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는 흑인들은 항상 열등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의를 주장할 때에 거기에는 극심한 인간 갈등이 일어나고 대립과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남을 먼저 인정하기 보다는 언제나 남을 경쟁자로만 인식하며 불신하고 적대시한다.

 

거짓이 순전히 거짓으로 드러난 예는 거의 없다.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있으면 거짓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거짓은 대개 진리라는 옷, 그럴 듯하게 보이는 옷으로 위장하고 자기가 진실인 양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있어 대적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결코 소홀히 넘길 수 없는 존재, 소홀히 생각했다가는 큰 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운 존재라는 것을 알고

우리는 반드시 대적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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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호의 최종책임은 대통령 자신이다.

 

 

 

 

 

          우리는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놀라는 경험을 자주 갖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너무 갑자기 찾아온 기쁨이나

          갑자기 닥친 슬픔으로 놀라는 경우도 있다.

 

          기쁨이나 즐거움으로 놀라는 경우는 우리의 삶을 활기있고 생동력이 넘치게 하지만 슬픔이나 두려움으로

          놀라는 경우는 우리의 삶을 침울하고 어둡게 만든다.

 

          며칠 전 우리는 TV를 통해서 그 동안에 우리 사회를 큰 충격에 빠트렸던 전 세모 그룹의 회장 유병언의 죽음

          을 보며 또 한번 충격을 받아야만 했다.

 

          22일 경찰청 관계자는 유 전 회장으로 의심되는 사신을 발견하여 국립과학 수사연구원에 의뢰한 결과 DNA

          와 지문등이 유병언의 그것과 일치된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지난 6월 12일 전남 순천시 학구리 송치재 매실밭에서 심하게 부패되어 있던 변사체를 수습하고

          자신들은 그 동안 아무 것도 몰랐다는 듯이 유병언의 구속영장을 재발부하고 철저하게 국민들과 언론들을

          따돌려왔다.

 

          그것이 타살이든 자살이든 아니면 제3의 원인이든지 그의 죽음이 사실이라면 국가와 정부는 국민들앞에

          먼저 대국민 사과를 해야할 것이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는 세월호의 참사속에서 오로지 진실만을 찾기 위해 한 사람만을 쫒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와 정부는 세월호의 진범으로 유병언을 지목하였고 그에게 내건 현상금만해도 어마 어마 했다.

 

          박정부를 따르는 뉴라이트에서 조차 거액의 현상금을 내놓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밝히기 위해 구원파측에

          서도 거액의 현상금을 내건 상태였다.

 

          매일같이 종편 방송에서는 유병언을 처음부터 박정부와 함께 물 속에 빠트린 주범으로 기정 사실화하였고

          그를 날마다 도마 위에다 올려놓고 마음껏 난도질을 하였으며

          그와는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사람들을 모셔다가 그의 행적을 추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박근혜 정부의 관심은 진실규명보다는 당장에 떨어진 박 대통령의 지지율부터 끌어올려

          놓고 보자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리하여 박 대통령은 세월호의 최종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행동은 유병언에게로 쏠렸고

          그를 더욱 알리며 그를 잡는데에만 주력해 왔다.

 

          전국적인 반상회를 통하여 유병언 알리기에 적극 홍보를 하였는가 하면

          수 천명이 넘는 검경들과 군병력들은 탐지견을 앞세워 대대적인 군사작전을 방불케 했다.

 

          어떻게 그 긴 40일 동안을 국가와 정부는 아무도 모르게 국민들과 언론들을 따돌려 왔을까?

          처음부터 국가와 정부가 국과수로 보낸 시신이 유병언과 매우 흡사하다는 말만을 했더라도

          이렇게 국민들이 난리를 치고 국가에게 농락을 당했다는 허망함은 없었을 것이다.

 

          혹시나 국민들이 아직도 모르고 있는 시나리오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과연 세월호의 참사가 유병언 한 사람만의 책임일까?

 

          그는 이제 죽어 버렸고 공소권도 없는 마당에 이제 더 이상 세월호의 진실은 사라져 버린 것일까?

          아니다. 세월호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국가의 책임이 아직 더 남아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스스로 인정했듯이 어쩌면 세월호의 최종책임은 박근혜 대통령인지도 모른다.

          국가는 얼마든지 살릴 수도 있었던 생명들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대형참사를 키웠는 지도 모른다.

 

          그들의 말대로 세월호의 참사가 교통사고 였다 하더라도 1차 원인은 운전기사의 조종 미숙에 있고

          2차 원인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서도 아무런 조치도 못한 국가책임은 피할 수가 없다.

 

          저들이 집요하게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권은희 죽이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는 것만 봐도

          위기에 내 몰린 집권당과 조중동들이 현 사태의 여론을 무마시키고 다가오는 7.30 재보선에 영향력을 주며

          지난 날에 국정원이 저지른 대선 불법 선거까지도 정당화 시키려고 하는 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오늘날과 같이 집권당과 조중동들이 손을 잡고 일하는 한 그들과 싸워 정치를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을 비교하며 다른 사람의 행동이 자기 자신보다더 파렴치 하다고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자기기만에 빠지기가 쉽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같은 환경에 처해 있지도 않고 분명히 그들보다 더 낫지도 않다.

          또한 우리로서는 그들이 처한 환경을 정확히 안다거나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의 일을 참견하고 간섭하는 사람을 범죄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지나치게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무언가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종교의 목적은 서로를 분리시키고 개인의 이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종교는 만인의 형제애와 사랑을 가르치고 있다.

 

          형제애와 사랑은 이웃의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가정과는 반대된다.

          그런데 모든 경우에 있어서 분명한 일반적인 원칙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일에 전체의 유익을 증진시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불간섭이라는 구실아래 자신의 몸을 사리지 말아야 할 것이며 악을 단절시키려는 노력

          이나 진리를 옹호하고 고통을 위로하며 희망을 선포하는 일에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관심(關心)이 어떤 것에 끌리는 마음이라면

          간섭(干涉)은 남의 일에 부당하게 개입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이웃 가정의 비밀을 꼬치 꼬치 캐내길 좋아하며

          정부의 복잡한 문제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상상하고 단정을 내려 버린다.

 

          그런 사람은 마치 자신이 조사관인 것처럼 행세하며 주위의 일들을 모르는 것이 없다.

          이웃 간의 불화의 씨는 그런 사람이 뿌리고 다니며 사람들은 그로 인해서 화가 나게 마련이다.

 

          거기에다가 남의 일을 호기심으로 알아낸 사실들은 틀림없이 어떤 고자 장이에 의해서 한 가정의 비밀은

          우스운 얘기거리가 되고 만다.

 

          대개 이러한 사람들은 할 일없이 쏘 다니는 사람이요 수다장이 여인들 같고 권력과 결탁한 자들이다.

 

          사실 오늘날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가 개조 운동도 정작 개조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국가 개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박근혜 정부가 국가 개조를 한다고 큰 소리치며 2기 내각을 서둘렀지만 그 동안에 비리에 연루되었던

          자신의 사람들이 줄줄이 몸을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의 국가 개조는 한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새 출발이란 지난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전제로 한다.

          부정직하고 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 출발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러한 전제 조건을 충족시키고 나서 곪을 대로 곪아 버린 정경유착을 끊고

          국가 개조를 서둘러 추진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의 대다수가 의심하고 있는 각종 사안에 대해서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길만이 무너져 버린 박근혜 정부가 신뢰를 다시 회복하고 새롭게 거듭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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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장마와 인사청문회

 

 

 

 

 

해마다 7월이 오면 장마가 몰려오고 장마가 물러가면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

더위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사람들의 얼굴에는 금새 짜증으로 바뀌고 모두가 더위에 지친 표정들이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삼복 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층들의 미숙한 국정운영은 더위를 한층 가중시키고 있다.

 

가뭄이란 곧 상실과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가 풍성하게 온다면 그 비는 곡식이 넘실거리는 들판에 희망을 주고 사람들의 가슴에는 축복을 선사한다.

 

축복이란 무엇일까?

왜 많은 사람들이 능력이 있으면서도 성공을 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무언가 뛰어나게 하는 그것이 결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멀리서 다가오는 먹구름처럼 사람이 수고하는 노력이나 갈구도 없이

커다란 이익만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참사가 일어난 지도 어느덧 100일이 가까워 오고 있다.

언론들의 시선은 세월호에서 점점 멀어지고만 있고 사람들도 짜증이 났는지 더 이상 말이 없다.

 

유가족들의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셨는지...

 

세월호로 촉발된 박근혜 정부 1기 내각이 물러나자

2기 내각이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벌써부터 심각한 인사난맥을 보이고 있다.

 

도대체 누가 지명을 했고 어떠한 인물들이 나왔는지 그리고 국민들은 왜 반대를 하고

정부와 여당 의원들은 더 이상 신상털기만은 안된다고 저리도 펄펄 뛰는 것일까?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그들 밑에서 그가 저술한 사설이나 칼럼등을 읽으며 자라왔다.

어쩌면 우리의 잘못된 역사관들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어느 교육부장관 후보자는 한술 더 떠 제자들의 논문을 가로채서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삼았다니

도대체 이 나라의 지도자 수준들은 어느 정도일까?

 

그러면서도 날마다 줄기차게 하는 말은 "관행"이었다는 말로만 엉뚱한 핑계를 대고 있다.

어릴 적 내가 학교에서 시험을 볼 때면 "링컨은 죽었어도 컨닝은 살아 있다"는 말이 있었다.

 

컨닝을 하기도 많이 했었고 들키기고 했으며 후회도 많이 했다.

학생들이 수능을 볼 때 모두가 컨닝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관행이란 한 마디로 컨닝과도 같은 것이다.

관행(慣行)은 과거부터 있었던 것을 관례에 따라 그대로 행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불법인 줄은 그들은 알고나 있었을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더니 이번 청문회를 통해서 사람들은 얼마나 공감을 하고 있을까?

 

사실 언론들이 사람들을 메뉴 위에 올려 놓고 기분대로 요리를 만들지만.

한국에서 가장 부패한 것중 하나가 바로 언론계이다.

 

과연 우리 사회 안에서 언론인처럼 돈받지 않고 기사를 쓴 언론인이 몇이나 되고

압력이나 눈치에 굴하지 않고 여과없이 한국 사회를 고발하는 양심있는 기자가 몇이나 될까?

 

세상의 어두운 면, 정치의 비리와 부정, 부패를 외면하려고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그 일이 왜 생겼으며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말고 그 일의 당사자가 자신인 것처럼 행동하며 끝까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무관심 할수록  이득을 보는 집단과 계층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은 당연히 기존의 구조와 질서속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이들은 자연히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

 

급격한 경제 성장의 그늘에서 우리는 질서와 원칙과 같은 도덕들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땀 흘려 벌기보다는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사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것이 무슨 일이든지 투기든지 표절이든지 뇌물이든지

비리든지 세금 탈루든지 어떠한 불법도 서슴치 않는다.

손해가 되어도 지켜야할 도덕들은 우리 사회안에서는 의미를 상실한지 오래이다.

 

이번에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만해도 그렇다.

제대를 불과 3개월 앞둔 병장이 무슨 이유에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조금만 참지 왜 그랬을까만 계속 추궁한다면 문제는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이 아무리 억울한 일이 생겨도 그래도 참아야지 뭐 별 수 있느냐는 식으로

그냥 쉽게 넘겨 버린다면 군대에서의 총기 난사 사건은 또 다시 재발하고 만다.

 

"개는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은 좋은 의미의 말이기는 하지만

반면에 개가 짖는데도 왜 짖는지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국가를 이끌어갈 국정 담당자들을 국민에 의해서 선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무책임하게 저질 인사를 뽑아놓으면 이 나라는 그들의 손에 또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그를 택한 정부나 그를 허락해 준 사람들 모두가 저질 국민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자인하는 꼴이다.

이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잇몸으로 라도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인사문제 만큼은 무슨일이 잇어도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오죽하면 우리 사회안에 T.K 니 P.K 니 친박이니 낙하산이니 하는 소리가 다 나오겠는가?

심지어는 세상의 인사들은 모두다 그 곳에만 살고 있는 것처럼 해도 해도 너무할 때가 많다.

 

부산에 가면 모든 남자들을 부산 사나이로 인정하는 것처럼

강원도에 가면 모든 남자들은 동작들도 빠르고 전라도에 가면 모든 남자들이 정도 많으며

충청도에 가면 모든 남자들이 양심있게 보인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유독히 부산 사람들만 보이고 키우지 못해 안달일까?

인사가 만사라고 늘 외치던 김영삼 대통령도 측근을 선호하고 학계인사를 중용하며 지역안배를 중시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라는 말과 같이 진정한 인사정책은 끼워넣기식, 봐주기식이 아니라

일하는 자들의 자세부터가 먼저 달라져야 할 것이다.

 

역대 정권이 거창하게 구호는 많았지만 왜 이 나라에서는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왜 우리 나라에서는 지역 강조나 이념이 거론되어야만이 대통령이 될까?

이러한 정치풍토는 이제 그만 사라져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이 개혁이 시급한 상황에서는 국가와 정치인들이 보다 멀리 내다 보고

시민사회의 참여를 높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인 안목을 위해서는 적절한 힘의 균형이 필요하다.

여 와 야 사이의 단순한 힘의 대결을 벗어나서 좋은 정책과 좋은 인물로 경쟁을 해야 할 것이다.

 

인사는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제 아무리 그릇이 명품이라 할 지라도 그릇이 불결하면 좋은 음식을 담을 수가 없다.

 

모든 이름있는 도공들은 자신이 만든 도자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일류 도공과 삼류 도공의 차이는 삼류 도공은 자기가 만든 작품이 아까워서 모두다 시장에 내다 팔지만

일류 도공은 그 작품이 아무리 아까워도 완벽한 작품이 나올 때까지 수 십번 수 백번이라도 깨뜨려 버린다.

 

우리는 어떤 그릇이 되어야 할까?

우리는 때로 사람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필요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많은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좋은 그릇도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늘 깨끗하게 관리하는 그릇이 되어야 한다.

 

서양 격언에 이르기를 "일만 하고 쉬지 않으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나 동물은 모두 새 힘을 얻기 위하여 규칙적으로 쉴 필요가 있다.

 

휴가를 너무 소비적이고 퇴폐적으로 보내고 만다면 그것은 휴가를 갖는 진정한 재충전이 아니다.

우리 몸이 아프거나 병이 든다면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기에 평소부터 꾸준히 자기 몸을 돌아보고

가족들과 함께 좋은 곳에서 시원하게 여름을 보낸다면 그것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7월도 없을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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