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훈(家訓)

 

 

 

 

 

                            내가 처음 아내와 결혼식을 하던 날,

                            처남과 그의 친구들은 우리 부부에게 커다란 거울하나를 선물했다.

 

                            거울 속에는 "사랑과 행복"이라는 예쁜 글씨로

                            우리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해해 주었다.

 

                            나는 거울을 걸어놓고 한참 동안 들여다 보며

                            마치 동화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아내가 보는 앞에서 장난을 치듯이 크게 주문을 해보았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

                         

                            나의 마음 속에서 거울이 대답을 했다.

 

                           "이런 바보, 넌 그것도 모르니, 그건 당신의 여자이지..."

                           "그가 너무도 곱고 화려해서 눈부시기 때문이지..."

 

                            나는 항상 아내를 볼 때마다 생각을 하곤 한다.

                            내게 아내란 어떤 의미일까?

 

                            난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내에게 늘 고맙고

                            늘 미안하고 늘 사랑한다는 말 밖에는

                            아직까지는 아내에게 해 줄 말이 없다.

 

                            아내 모습이 더욱 더 애처롭고 사랑스러워 보일 때는

                            다시한번 나에게 다짐을 해 본다.

 

                            그리고는 결심하며 거울 속에다

                            나의 진심을 담아 "늘 웃자"라고 새겨놓았다.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들은 그래도 웃기다! 하면서

                            이제는 더욱 새로운 자세로

                            아내와 행복하게 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 거울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날마다 우리 집 현관 앞을 지키며

 

                            가족들이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기쁠때나 슬플때나 오늘날까지

                            우리 가족들에게 늘 힘이 되어 주고 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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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희망데이

 

 

 

 

                           11월 11일, 이 날은 빼빼로데이 날이다.

 

                           이날이 오면 모든 가게들마다 많은 고객들로 넘쳐나고

                           거리에서는 남녀 연인들이 모여서 사랑을 속삭인다.

 

                           기업인들에게는 이 날이 대목이요

                           상인들에게는 바쁜 날이며 

                           연인들에게는 사랑을 고백하는 날이다.

 

                           이러한 빼빼로 데이가 정말 상술일까? 아니면 나눔일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 사회가 아무리 유래니 나눔이니 말은 자주하지만
                           결국은 기업인들의 지나친 마케이팅이 만들어낸 상술이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오래 전 저와 아내가 신촌의 모 웨딩홀에서
                           11월 11일 오전 11시에 결혼식을 올린 날이었다.

 

                           이 날은 바깥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하늘에서 진눈개비가 내려와 
                           우리 부부의 앞날을 축복해 주던 바로 토요일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이 날을 희망데이!라고 불렀다.

                           서로가 마음 속에 날짜를 세듯

                           십일만 일천 일백 십일을 한결같이 함께 살자던 오늘은 바로 우리의 희망데이다.


                           사실상 우리의 희망데이는 이 날도 아닌

                           일년 365일 모두가 다 우리의 희망데이인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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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으로 알바를 경험하며

 

 

 

 

           사람이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고 홀로 선다는 것은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운 지 잘 모를 때가 많다.

           학부를 마치고도 10년, 그 전의 10년까지 이것 배우고 저것 채우면서 나는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게도 홀로 섰다.

 

           배움은 끝이 없고 지식은 한계가 없다는 말이 나는 보이지도 않는 힘에 따라 무언가에 이끌려

           자꾸만 젊음을 불태우며 남들의 일을 도맡아 왔다.

           20년이 지나도록 나는 참 눈물을 많이 흘렸었고 바람도 막아 주었으며 산전 수전을 다겪은 그야말로 꾼이었다.

 

           부모님께서 차례로 세상을 떠나시자 제일먼저 나는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들을 떠나 감히 홀로서기를 선언했다.

           그 동안 나를 위해 십시일반으로 함께 해준 많은 이들의 눈물과 도움으로 이 자리에까지 올 수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내게 약자를 대변하고 서민들을 보호하며 눌린 자들에게 희망을 줄것이라는 저들의 강한 믿음이 있었다.

 

           거리를 지날 때나 사람을 만날 때는 모든 세상이 다 내것처럼 느껴지고 혹시나 저집에는 무슨일이 생겼을까

           밤낮을 구분하지 않았다.

           가끔씩 식사도 대접받고 행사장에도 위촉받으며 어느 사이엔가 나도 모르게 지역인사가 되어 버렸다.

           할 일은 많고 몸은 하난데 1년이 다가도록 집과 떨어져서 냄비에 밥을 끓여먹으며 오직 내일만 고민하고 있었다.

 

           이 따금씩 들려오는 사람들의 싸움소리, 술에 만취되어 찾아온 행인들의 넋두리로 나는 잠시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날로 늘어만 가고있는 아이들의 교육비는 힘겨운 나의 일상을 더욱 목조르고 있었다.

 

           만일에 부모님께서 살아계시고 나를 보시면 무어라고 하셨을까... 무슨 대책은 없을까...

           아내는 아내대로, 나는 나대로 시간을 만들어서 알바라도 열심히 하는 것이 자식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않을까...

 

           어느날 우연히 보게 된 한 정보지를 통해서 어느 빵공장을 알게 되었다.

           마침 이곳에서도 가깝고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기에 나는 20분을 걸어갔다.

 

           그러나 인간 만사의 모든 일이 다 새옹지마(塞翁之馬)인 것처럼 우리의 일은 한치 앞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만 거기에서 보람된 일들과 겪지 말아야할 불행한 많은 일들을 경험할 수가 있었다.

 

           넓은 공장안에는 빵을 굽는 냄새가 온 천지를 진동하며 나를 유혹하였고 

           사람들은 모두가 기계와 한 짝을 이루어서 쉬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길다란 콤바인위에는 하나 둘씩 하얗고 주먹만한 빵모양이 열을 맞춰 계속 나오고

           저쪽 끝에서는 누군가가 자꾸 빨리 하라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한참 후 한 젊은 여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무슨 일로 왔느냐"며 내가 대답해 주자 나를 사무실로 안내해 주었다.

           시간당 4,000원 야간은 5,000원 식사는 모두 각자들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했다.

           그러나 대신 회사가 큰 맘먹고 음식을 주문하면 다같이 둘러앉아 나누어 먹는다고 하였다.

 

           아래로 내려와서 직원들의 동태를 한번 살펴보니 모두가 20 명으로 조선족들도 섞여 있었다.

           한명은 여성이고 다섯명은 남성이었다.

           장애인들도 두명있었는데 그들은 모두가 고등학교를 갓졸업한 얼마 지나지않은 청년들이었다.

           사장은 나보다도 훨씬 나이가 어렸었고 장인어른과 나머지는 모두가 주부들이 일을하고 있었다.

 

           먼저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건강진단서는 다음에 갖다주기로 하면서 바로 근무는 시작되었다.

           이 얼마나 바라던 새로운 경험이며 흥분되는 일인지 가족들은 알고나 있을까...

 

           이렇게도 맛있고 많은 빵들이 다 내 손을 거쳐서 다른 사람에게도 대신 전해질 수있다니 내겐 하나의 보람이었다.

           더욱 더 내가 놀라고 신기했던 것은 TV에서만 보던 소스 주머니짜는 방법을 여기에서 처음 배운 것이다.

           손잡이의 위치를 나에게 맞도록 팔을Ⅹ로 비틀어서 모든 모양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데에 나는 신기했다.

 

           모든 빵들이 순서에 따라 밀가루 한포대가 뚝딱하며 사라지고 불과 몇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정확하게 빵이 되어 나왔다.

           빵이 구워지면 누구랄 것도 없이 먼저 달려나와 빵하나를 먹어보라며 더러는 설탕과 소스를 뿌려주며 출출함을 달랬었다.

 

           이 곳의 빵들이 주로 어느 곳으로 가는지 어느 날은 학교로, 어느 날은 PC방으로 날마다 기사가 찾아왔다.

           모두가 한몸처럼 화이팅하며 누가 누가 잘하나 내기도 하면서 정신없이 일을 하니 금방 하루 해가 저물었다.

                                                                                                                                                                 (계속)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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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주택가에서 생긴 일

 

 

 

 

 

              내 어릴 적 국민학교를 다니던 어느 여름방학식 날

              종례 식이 끝나자 나는 기분이 너무 좋아 청소당번도 뿌리치고 집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넓은 도로를 지나서 내가 좁은 주택가로 막 들어섰을 때에

              갑자기 어느 집 대문 안에서 한 마리의 개가 나를 향해 무섭게 짖어대고 있었다.

 

              마치도 그 개는 내가 자신을 넘보기라도 했다는 냥

              입 밖으로는 거품을 흘리고 대문 아래로는 주둥아리를 내밀고서

              나를 향해 무섭게 짖어대고 있었다.

 

              그때에 나는 그 개가 얼마나 무섭던지 가던 길도 멈추고

              한 발로는 땅을 쿵쿵 두드리고 한 손으로는 돌을 집어 위협하면서

              개를 향해 조용히 하라고 말을 했다.

 

              한참 후에 그 집안에서 한 어른이 나왔는데 그는 나를 부르더니

              나의 머리를 주먹진 꿀밤으로 한대 쥐어박고서는 다짜고짜로 나를 그의 정원으로 끌고 갔다.

 

              그 때에 그는 나를 당장에 무릎꿇리우고 두 손은 높이 들게 하면서 벌을 주웠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하였을까?

              나는 정말 그 개가 너무도 무섭고 조용히 하라고 한 것밖에는 없는데...

 

              나의 얼굴에서는 자꾸만 땀이 흘러내렸고

              그동안 잘 참고 있었던 그것도 그만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때에 나는 혹시라도 누가 볼세라 몸을 자꾸 비틀며

              그 모습이 얼마나 창피하고 당황했던지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주인은 다시 나를 불러 세우고는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다음부터는 개를 보면 그냥 지나가라고...

              다음번에도 또 들키면 내 부모님과 학교에도 통보한다면서

 

              별일도 아닌 듯이 그는 내게 땀을 씻고 가라면서 물을 틀어 주고서는

              집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때에 나는 마치 죄수가 감옥 생활을 마치고 자유를 찾은 신분처럼

              그의 대문을 걷어 차고 밖으로 나왔다.

 

              오늘같이 기쁜 날 나는 힘 없이 고개를 떨구면서

              길 가의 또랑 물에 돌을 던지며 분풀이를 하면서 늦게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이 같은 모습들이 우리에게 처해진 남북한의 모습은 아닐까...

              이곳은 우리 땅이니 양측의 누구라도 함부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한쪽에서는 연일 방송에 나와 북한에 대해 열을 올리고

              어느 보수단체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단지를 만들어 북한으로 날려 보내고

              북한에서는 우리를 향해 더 이상 자기들을 자극시키지 말라면서 또다시 경고를 보내왔다.

 

              마치도 남의 집 개가 짖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말고 어떠한 군사훈련이나 무분별한 전단지나

              무시나 압박도 하지 말고 오로지 네 갈길이나 똑바로 가라면서...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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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가장 아름다운 결혼식

 

 

 

 

                   오래 전 나의 가장 아끼는 한 동료가 결혼식을 채 일주일 남겨놓고서

                   그의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졌다는 한통의 비보를 들었습니다.


                   황급히 차를 몰고 땅끝 마을까지 거기서도 한참 배를 타고서

                   드디어 어느 섬에서 장례를 무사히 치루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그의 아내곁으로 가 버린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어찌된 일일까 모두가 망연자실 한 채 또 다시 장례식을 치루어야만 했지요.

 

                   모두가 지쳐있고 동료의 몸도 맘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건만 

                   세상은 왜 그렇게 야속한지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바라본 채 할말도 잃어 버렸습니다.

 

                   장례식이 어떻게 끝났는지 마을 이장님이 부둣가로 나와서 상경하는 일행들을 배웅하며

                   모두가 욕봤다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다음날 결혼식이 연기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결혼식은 그냥 그대로 교회에서, 사회는 내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교회안에는 며칠 전부터 카펫트와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하고

                   부서별로 총동원을 내려 학생들도 불렀습니다.


                   예식이 다가 오자 아무도 모르게 촛불을 밝혀 놓고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자리에 앉았습니다.


                   예식이 시작되고 신랑이 웃으면서 뒤쪽에서 걸어오자

                   갑자기 교회안에는 터질듯한 박수소리와 함께 함성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천사같은 신부가 드레스를 입고 천천히 입장할 때는

                   모두가 일어나서 나도 그만 따라서 체통을 내려놓고 엉엉 울어야만 했습니다.

 

                   이들이 대체 누구인지 오랜시간 나와 함께하며

                   어려운 형편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서로가 의지하며 남에게 희망을 주던 사람...


                   신랑은 그 천부적인 목소리로 언제 어디서나 노래와 재능을 선사해 주었었고

                   주간에는 복지 단체에서 야간에는 신학교에서 주경야독을 하였으며

                   신부는 천하 절색미녀로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재능많은 교사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선하고 아름다운 커플이 무슨 사연과 고난들이 많아서

                   그토록 많은 하객들이 모였으며 사람들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을까요?



                   축가 시간에는 귀여운 아이들이 꽃단장을 하고서 빵긋빵긋 웃으며 재롱을 떨고 나갔습니다.

                   분위기는 어느 새 울음바다에서 웃음바다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신랑 신부의 얼굴에도 어느 새 웃음꽃이 피어나고 주례자도 덩달아 신바람이 났습니다.

                   카메라맨들도 신이 났던지 그들을 향해 사정없이 후레쉬를 터뜨렸고

                   영상과 음향 맡은 직원들도 정신을 잃어버리고 마음대로 였습니다.

 

                   순서도 뒤죽박죽 모든 것은 사회자인 내 맘대로 였습니다.

                   신랑신부를 세워놓고는 사랑만큼이나 뽀뽀를 해보라고 사랑이 식었다고 다시 반복시키며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행복들은 그들에게만 주고 싶었습니다.

 

                   그 때에 누군가는 감동이 되었던지 즉석에서 거액을 꺼내

                   모든 하객들을 위해서 식사를 배풀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가 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잃어버린 가족들의 슬픔은 크겠지만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인생입니다.


                   남편은 아내없이는 못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아내도 남편없이는 못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린 아이는 자기부모가 떠났을 때 자기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자라고 어른이 되면 그토록 자기가 의지했었던 부모얼굴조차도 기억하지를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도 없지만 그가 없으면 그리워할 사람은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사라지고 나면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고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의 생각이지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명망있는 정치인이나 지도자들이 없어져도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고

                   나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쉽게 헤어지거나 변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넘어지면 세워주고 약하면 힘이 되어주며 외로우면 기꺼이 의지할 수있는 따스한 사람입니다.

 

                   내가 보고 싶고 그리운 선생님!

                   비록 우리의 만남들이 세상의 인연따라 왔다 갔다하는 만남이지만 나는 계획하고 당신은 진행시키면서

                   그때 우리는 조금은 서툴렀지만 그래도 우리는그때가 너무도 행복했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누군가를 위하여 어디선가 활동을 하시겠지요.

                   아이들도 보고싶구요...

                   부디 행복하시기를...어떤 사람, 어떤 일을 만날 지라도 사회에 큰 빛이 되시기를...

 

 

                   망우동을 바라보며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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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향기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이웃을 잃어버린 것이다.

                아파트로 한번 방문을 하게되면 꼭 경비원으로 부터 온갖 제약을 받는다.

                엘리베이터 안에 누군가가 타고 있을 때에도 "안녕하세요!"하며 인사를 건넬때면

               "이 자가 왜 그럴까"하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본다.

 

                너와 나의 관계가 단절될 때 우리는 항상 남을 의심하게 되고 갈등만 더욱 쌓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기에 너는 더욱 필요하다.

 

                나는 사람이 좋다. 아니 사람 냄새가 좋다.

                억지로 뿌리고 풍겨나는 그런 사람 냄새말고

                보잘 것 없더라도 저절로 느껴지고 꾸밈이없는 그런 냄새가 나는 언제나 좋다.

 

                모든 만물에는 각기 고유한 냄새가 있다.

                풀냄새,흙냄새,과일냄새,채소냄새,음식냄새,생선냄새,화장품냄새,썪는 냄새들도 있다.

 

                좋은 냄새는 나의 기분을 더욱 좋게 만든다.

                좋은 냄새는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언제나 내게 힘을 준다.

 

                그런가 하면 악취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고 기분을 더욱 상하게 한다.

                남들은 내가 오지랖이 넓다며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자꾸만 가만히 있으라고 주문하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나의 의지로도 꺾을 수없는 신념이리라...

 

                냄새는 동화작용을 잘한다.

                맨 처음 사람에게 굉장히 불쾌한 냄새가 난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함께 그와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 새 그 냄새는 향기로 뒤바뀐다.


                농촌의 거름냄새가 처음에는 고약하지만 조금만 지나가면 달콤해 지는 것도 다 이런 동화작용 때문이다.

 

                요즘 내게도 언제부터인지 이상한 습관하나가 생겨났다.

                밤만 되면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길래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아내는 그런 내 속을 뻔히 뚫어보며 "또 이밤에 어딜 그렇게 자주 나가십니까?"하고서

                퉁명스럽게 물어보지만 나의 대답은 역시나 똑같다.

                 사람들이 그립고 세상냄새를 알고 싶고 아직은 생각할 것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하룻밤 사이 십 킬로씩, 길을 걷고 구경하고, 노래도 부르고 기도도 하면서,

                오늘은 동쪽으로 내일은 서쪽으로...

 

                길을 걷다가 보면 반드시 누군가 내게로 접근하며 길을 물어보기도 한다. 

                마침 나도 그 쪽으로 가는 길이었다면서 대뜸 맞춰주고는 함께 걷는 것이 서로간의 목적도 된다.

 

                한번은 어느 고급 양복차림에 키는 건장하고 양손에는 각기 휴대폰을 가진 중년신사를 만났다. 

                한 눈에도 그가 대리기사임을 금방 눈치 챌 수가 있었다.

 

               "요즘 돈벌이 어떠세요? 힘은 들지 않으세요?"하고 물어보면

                알만한 나이들의 세계에서는 소통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어엿한 중소업체의 사장으로 그만 업체가 부도를 맞아 아내와 헤어졌고

                그래도 죽지 못해 이렇게라도 살아간다고 말을 했다.


                거리에서는 이런 중년 신사외에도 아직도 많은 대리기사들이 경쟁을 하고있었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이들을 먹여 살릴 수있는 힘이 겨우 술문화였었다니 조금은 놀랐고 씁쓸해하며

               "아저씨! 화이팅해요"하고 격려도 해 주었다.


                연예인들도 만났다. 술 집의 아가씨들도...

                어떤 사람은 나를 언제 보았다고 내게 차비좀 빌려달라고 애원을 하였다.

 

                어느 지하철역 부근에 간신히 다다르자 온갖 악취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바닥에서는 누가 그렇게 해놓았는지 뿌연 토사물들이 길가에 흐트러져 있었고 

 

                그 옆쪽에는 한 젊은 아가씨가 짧은 치마를 입고서 길 가에 누워있었고

                그 몇 미터 주변에는 많은 쓰레기들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잠시 후 요란한 기계차가 내 옆으로 서더니 하나 둘씩 사람들이 뛰어 내리면서 황급히 수거함을 들고서

                저 멀리 사라졌다.


                이윽고 환경 미화원들도 나타나 한편에서는 쓸고 한 편에서는 쓰레기들을 집어올리면서

                잽싸게 정리해 놓고서는 차량 뒤에 올라타 이내 사라졌다.



                새벽4시, 초조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서 황급히 샤워하며 또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은 어떤 사람, 또 어떤 얘기로...잠은 틈틈이...

                구수한 누룽갱이, 반찬은 없어도 좋다.

                맨밥이면 어떠랴. 시름도 잊고 고됨도 내려놓으면 마음만은 이미 행복인 것을...

                오늘도 가까이에서 사랑스런 그녀의 향기가 내게 힘을 북돋아 준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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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우장산공원이 아직 개발되기 전에 맨 꼭대기 해피가

 

                  어머니의 당부

 

                      포근한 엄마 품처럼 8월의 여름풀밭은 늘 향기롭고 평온하다.

 

                      그 위에 배를 깔고 살포시 누워있으면

                      그리운 나의 어머니가 찾아와 팥죽을 쑤어 놓고는

                      빨리와서 밥 먹지 뭘 하느냐고 지금도 내 귓가에서 맴도는 듯하다.

 

                      어머니는 가끔씩 내가 속을 썩힐 때면

                     "너도 이 다음에 커서 꼭 너같은 자식한번 낳아보라"며

                      내게 자주 화를 내시고는 하셨다.

 

                      그 때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지만

                      아마도 그것은 가장(家長)을 대신해서 자식에게 거는 기대만은 무한하신 사랑이리라...

 

                      어머니와 아버지는 늘 집안 일로 자주 다투셨고

                      필경은 그래서 그 신경쇄약으로 병을 앓고 일찍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치를 살펴가며 학교에서 배워온 노래로

                      어머니의 기분을 달래주었다.

 

                     "우리 엄마 이름은 여보이구요 우리 아빠 이름은 당신이래요

                      그래도 우리들은 부르지 못해 엄마 아빠 둘이서만 부른답니다"

 

                      그래도 엄마 마음이 아직 덜 풀리실 때는 동작을 더욱 크게 하면서

 

                     "책상위에 오뚝이 우습구나야 수영하다 아래로 떨어졌어요

                      안 아픈척 하는 꼴 우습구나야"

 

                      어찌나 내가 개골스럽게 잘도 재롱피우고 노래했던지

                      엄마는 어김없이 폭소를 크게 터뜨리시며 나를 꼬옥 안아주셨다.

 

                      지금도 나는 어느 자리에 가든지 남을 의식하지도 않은 채

                      먼저 율동으로 청중을 사로잡고 분위기를 이어간다.

                      손은 머리 위로 반짝 반빡 마음은 앞으로 짝짝 짝짝짝짝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한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지금껏 음악 공부한번 제대로 하진 못했어도 그래도 어린 동요부터 성인 노래까지

                      성가지휘도 10년 넘도록 했다.

 

                      나는 음치(音治)다. 음을 내 맘대로 다스린다.

                      노래는 좀 못하면 어떠랴. 음악에도 다 길이 있고 해학이 있다.

                      체면을 내려놓고 걱정도 내려놓고 즐겁고 더욱 행복하게...

 

                      아마도 그것은 나도 모르게 어릴 적부터 보고 배우며 길들여진

                      너는 이 다음에 커서 잘 하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깊은 당부이리라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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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가 그리워 집니다.

 

 

 

 

                                                  어떤 사람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기도 합니다.

 

                                                  성격과 기질에 따라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도 제 각기 다릅니다.

 

                                                  그렇지만 맘이 통하는 사람과의 격의 없는 대화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가장 좋은 윤활유가 됩니다.

 

                                                  진솔한 친구는 편합니다.

                                                  어떠한 이야기도 받아준다는 믿음이 가는 존재입니다.

 

                                                  서로를 잘 이해하고 심한 농담거리도

                                                  웃음으로 받아줍니다.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운동선수로 난 문학도로

                                                  고교시절로 하여 우린 친구가 되었습니다.

 

                                                  서로들만이 아는 비밀들을 하나씩 간직하고

                                                  여기 저기 들로 산으로 참 구경도 많이 했습니다.

 

                                                  밤 늦은 시각에도 만나자면

                                                  가볍게 뛰어나가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가끔은 의견이 충동할 때도 있었지만

                                                  바탕엔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습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친구였는데

                                                  지금은 오래 전 불의의 사고로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해마다 연말이면

                                                  더욱 더 그리워지는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도 알 수없는

                                                  미로같은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문제를 풀어 나가듯

                                                  하루하루에 충실할 뿐입니다.

 

                                                  생각만으로도 힘이 되어주는 친구가

                                                  우리의 고통을 덜어줍니다.

 

                                                  가슴에 쌓인 복잡다단함을 받아줄 수있는 친구는

                                                  지금의 우리에게 새로운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친구가 그리워 집니다.

                                                  친구를 만나고 싶습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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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과 추억이 있는 연희동            <정보자료>

 

 

 

            내 어릴 적 부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산을 깎아 마을을 이루던 곳

            지금도 서울 연희동에 가보면 저 멀리로 산 하나가 우뚝 서있고 그 꼭대기로 작은 군부대 하나가 보인다.

            밤에는 반짝반짝 조명이 돌아가고 낮에는 군인들이 쉴사이없이 산을 오르내리며

          아래로는 아직도 작은 물탱크 하나가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그 위를 조금만 더 올라가면 행복을 가득담은 옥천샘이 나타나고

            좌측맨 아래로는 서대문구청이, 중앙 한가운데로는 방공호가 이제는 자연사 박물관이 되어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는 수많은 약장수들이  찾아와 "자 비암이 왔어요. 이 약 한번 먹어봐" 하면서

            매주에 꼬박꼬박 원숭이들을 풀어놓고 약을 팔며 재주를 부리던 장소였었다.

 

            지금은 모든 집들이 다 떠나가고 산(山)만이 외롭게 남아 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사람들에게 희노애락을 안겨주던 내게는 꿈많은 동네였다.

 

            그 때일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노라면 이곳은 이따금씩 날라오는 잉꼬새로 모든 아이들에게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이 곳에서 만들어지는 온갖 놀이들은 어느새 이 동네 저 동네로 전국에 유행되기도 했다

 

            어디선가 한 마리 잉꼬새가 날아와 전신주에 앉아 뾰롱뾰롱하며 울고 있으면 동네사람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며

            어떤 사람들은 대나무를 가져와 끝에 나일론 끈을 매달아 잉꼬새를 잡기도 했다.

            노랗고 하얗고 파란 잉꼬새는 시력이 좋지않아 자주 참새들과 섞이며 잘도 날아다닌다.

 

            한 번은 우리 집 개나리밭으로 잉꼬새 한마리가 앉았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잽싸게 잉꼬새를 잡아서

소쿠리에 넣고 창문가에 매달아 두었다. 

 

            그런데 몇 날이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모기를 잡는다며 그것을 이리저리 마구 뿌려대는 바람에

            잉꼬새는 몇일을 견뎌내지 못하고서 그만 꿈나라로 떠나고 말았다.

 

            잉꼬새를 만져보면 깩깩하며 손을 물어뜯기도 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그의 깃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아무나 올라갈 수도, 다가갈 수도 없지만

            오래 전 군 부대의 공사가 시작되면서 마을에서도 돈을 벌 수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연희동의 산 5번지 마을...

            군용트럭이 쉴사이없이 마을까지 벽돌을 싣고 내려다 놓으면 주민들은 경쟁하며 군부대까지 벽돌을 날라다 주었다.

            공중에서는 헬리콥터가 부지런히 장비들을 매달아 나르고 땅위에서는 주민들이 쉬지 않고 벽돌을 지고 날랐다.

            작은 것은 한 장에 10원, 커다란 것은 50원, 빨간 것은 30원, 깨어진 것은 반으로 깎아주기도 했다.

 

            어린 코 흘리게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살갗이 벗겨지고 벽돌은 굴러가며 희생자들도 많았다.

            아주머니들은 수건으로 또아리를 만들고 아저씨들은 나무를 잘라 등지게를 만들고

            아이들도 벽돌을 가슴으로 안으며 부지런히 돈을 벌었다.

 

            사람들은 산을 오르고 힘이 들때에는 바위턱에 앉아 땀을 식혔고 어떤 사람들은 약수터에서 등목을 하였으며

            어떤 사람들은 풀 숲에 벽돌을 감춰놓고 자꾸자꾸 경쟁을 하기도 했다.

 

            산 위에 올라서서 일이 끝나고 나면 마치도 모든 것을 다 가진냥 세상이 내 눈안에 들어왔다.

            산 길이는 굽이굽이 수십 킬로미터나 되었고 서울의 모든 시가지들은 나의 발밑에서 아무 것도 아니었으며

            나의 머리는 핑핑돌며 잡시 어지러웠다가 시원하게 불어오는 맞바람도 결코 싫지가 않았다.

 

             아직도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나와 신나게 놀고있는데 어떤 아이들은 딱지가 없어 구경만 하고 있고

             어떤 아이는 구슬치기로, 어떤 아이들은 다방구를 하며 놀고 있었다.

             가게에서는 일도 돈으로 바꿔주기도 한다는데 나도 그렇게 놀아야 하나...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벌어본  2.500원

             그런데 난 차마 그 돈을 거머쥐고서도 한 푼을 써 보지도 못했다.

 

             어머니는 일찌기 빵장수 나가시고 아버지는 중동에 나가시며 써야 할 것들도 많을텐데...

             마치도 죄인처럼 고민하다가 이 돈은 내 것이 아닌것처럼 어머니에게 돈을 슬쩍 드렸더니

             어머니께서는 나를 바라보시고는 그만 아연실색하시면서 노발대발하시면서 빗자루 꺼내들고 회초리 꺾어들고

 

            "이 눔의 자식!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누가 널더러 돈을 벌어오라고" 하시면서 분이 다 풀리도록

             내게 회초리를 퍼붓고는 나는 그 자리에서 뭐가 뭔지도 모른채  괜히 혼쭐이 나서 그만 엉엉울기만 하였다.

             그 날 처음으로 내 앞에서 하루 온종일 울고 계시는 어머니의 눈물을 바라보며

             얼마나 죄송한지 그 모습은 지금도 차마 잊을 수가 없다.

 

                                                                                                            해피의 연희동 변천과정 ①중에서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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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교시절의 이성친구

 

 

 

 

오래 전 나의 고교시절에 짖궂도록 이성이 그리워

 

학교를 통학할 때마다 버스안에서 이성들의 가방을 들어주며

 

은근히 가방 속에다 메모 한장을 적어넣고 한번 사귀고 싶다면서 고백하던 그 시절이 있었다

 

 

 

검정교복과 푸른교복은 춘하추동 언제나 입고 다녀야만 했던 제복이었다.

 

 

 

교복을 입고 마음을 졸여가며 혹시나 선도부원들에게 붙들릴까

 

학교교정에 들어서면 그제서야 안도의 한 숨 길게 내 뿜고 주어진 자율학습도 잊은 채 나는 글쓰기에만 바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걷다보면 거리에서는 하나둘씩 남녀 학생들이 어울려 걸어가는 모습은

 

언제나 내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오면 남,녀둘이 빨간우산 하나에 함께 걷고

 

눈이 오는 날에는 남,녀둘이 빵집에 앉에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은 내게는 너무나도 질투의 대상이었다.

 

 

가끔씩 그 모습이 떠 오를 때면 밖으로 나가 아무 이성이나 붙잡고 말을 건네보고도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않아 가슴만 두근두근 망설일 때도 많았다.

 

 

 

언제부터인지 내게는 펜팔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한 때는 "여고생활"이라는 잡지가 나와 여고생들로부터 많은 인기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잡지를 구입하여 이성에게 편지도 보내보고

가요책, 문화책 할 것없이 뒷장의 주소란을 골라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어떻게 무슨말로다 나의 심정을 표현할까...

 

마땅한 편지지도 없던 그 시절에 틈틈히 수집하던 예쁜 껌종이들은 나만의 향기로운 편지지였다.

 

 

 

수노아, 민들레, 라일락, 꽃편지등과 같은 예쁜 껌 종이들은 오늘날과는 다르게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수집을 해볼만한 향기로움이 있었다.

 

 

예쁜 껌종이들을 한장 한장 길게 풀로 붙여 편지지로 만들기에는 제격이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느 남학생이" 하면서 구구 절절  한통의 편지를 보내기 위해 밤을 새워 읽어보고 또 써 보고

 

창밖은 이미 날이 밝았는데 버려진 껌종이는 어느 새 휴지통을 가득 메웠다.

 

 

 

뜻밖의 이성에게 온 답장들은 혼자서만 보기에는 너무 아쉬워 학교 친구들에게도 자랑하려다가

그만 선생님께 들켜서 전체가 보는 앞에서 낭독했어야만 했던 일들은 지금도 생각해 보면 너무나 쪽팔려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날 이후로도 이러한 답장을 기다리는 설레임은 계속 되었다.

내가 그렇게 다른 곳에 더 관심을 갖지만 않았더라도...

 

 

 

서울의 천호동 어느 여학생은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고 날라리란 이미지만 잔뜩 심겨준 채 연락이 두절되었고

 

경기도의 금촌 어느 여학생은 그녀 형부의 적극적인 협조와 관심에도 불구하고 내겐 짐이 되어 자연스레 헤어졌으며

 

강원도의 속초 어느 여학생은 학기중에 유학을 떠난다며 작별하였고

 

 

경상도의 경산 어느 여학생은 부모님이 과수원을 하던 장애인으로

 

마음에 들지 않거든 찢어도 좋다며 자기의 상반신 모습의 사진 한장을 보내왔다.

 

그가 궁금하던 차 여름 휴강을 맞아 한번 찾아가 보았으나 찾을 수없어 하룻 밤을 그만 터미널에서 지새우고 돌아왔다

 

 

 

나의 재학시절 펜팔은 이성이 절실했던 호기심많던 사람들에게 교제의 한 방법이었다.

 

오늘날과 같이 개인정보가 노출되어 이용 당하기 전만해도 펜팔은

 

모든 사람들에게 설레임을 안겨주고 다리를 놓아주는 교제의 한 방법이었다

 

 

 

펜팔은 주로 유료와 무료로 나뉘어 유료는 국내펜팔과 외국펜팔을 대상으로 편지만을 주고받으며 이루어졌다.

 

여성은 무료이고 남성은 우체국에 도착된 여성의 우편물을 찾아가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상대로부터 연락이 오지 않을 때는 올 때까지 상대를 바꾸어 주기도 했다.

 

 

 

유료펜팔이 확산되면서 결혼과 재혼만을 전문으로하는 각종 업체들도 줄을 지어 등장했다.

 

 

 

우리 사회의 불 건전한 교제와 퇴폐적인 만남이 성행하게 된 것은 가정에 컴퓨터가 보급되면서 부터이다.

지금은 어디를 가나 모텔 산업이 확산되고 성(性)문화가 발달되어 자유롭게 펜팔을 할 수가 없지만

그것은 돈과 상업주의에 빠져 잘못된 性의식과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사람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건전하고 순수한 만남의 교제는 오히려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어 교제를 통해서 많은 위로와 힘이 된다.

 

 

과거엔 주로 가요책이나 스포츠, 일간지, 어느 단체에서 발행된 정기간행물들을 통해서

 

회원을 확보하고 회원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며 순수한 만남에서 친교가 이루어졌으며

 

홀로 된 사람들에게는 정보와 다리를 연결시켜주는 중매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련히 사라지고 추억이 된 펜팔문화

 

가끔씩 내가 마음을 잃고 혼란스러워 할 때 의지할 수있는 친구는 지금 너무도 소중하다

 

친구가 보고싶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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