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한국 대표의 쇼트트랙

 

 

 

 

 

 

 

먼저 나는 한국 쇼트트랙의 대표에 대해 그가 어떤 선수인지, 그가 어느 소속이든지,

어떠한 감정도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내가 처음 쇼트트랙을 알게 된 것은 90년 초 중랑구에 있는 어느 모교회로 재임했을 때이다.

그 동안에 나는 연희동에서 미아리로 매일 왕복을 오고가며 왕성하게 사역을 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아는 지인이 찾아와 어느 분이 나의 도움을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안타까운 내용을 듣게 되었다.

무엇이 그리도 급한 일일까? 하고 궁금하면서 찾아가보니

세상에 이런일이...내가 그토록 평소에도 만나보길 원했었고 존경하던 스승님을 그곳에서 뵐 줄이야...

 

평소에도 나의 지론은 언제나 준비된 자에게는 때가 되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물어 볼 새도 없이 그 분은 먼저 내게 도와달라며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었고

내 마음도 어느 새 눈 녹는 듯이 그 분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동안 내게 많은 배려를 베풀어준 미아리 교인들과 교회앞에는 얼마나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던지

나의 사역지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중랑구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분은 일찌기 법과대학을 마치고 군 법무장교와 시장들을 역임하고 뒤늦게 종교계에 뛰어드신 몇 안되는 분이었다.

인격적으로나 행정적으로도 매우 훌륭하지만 업무를 추진하는 면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나의 사역이 한창 바쁠 무렵 많은 사람들도 알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전 빙상 국가 대표이며 서울시 체육회에서 수고하시는 한 분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은 종종 물가로 나가 낚시를 즐기시며 내게 많은 물고기도 가져다 주셨다.

 

그 분의 자녀 중에는 2남1녀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자녀가 지금의 한국대표 쇼트트랙의 산실이 되는 셈이다.

그는 훗날 한체대를 나와 국가 대표가 되었으며 국가 대표의 코치로서 다년간 뛰어난 활약을 보이기도 했다.

 

매 주일 오후가 되면 우리는 가까운 운동장으로 나가 족구나 축구를 즐겼으며

기도원 어귀에서의 놀이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가 태릉과 목동을 오고가며 대표 시합을 가질 때면 우리는 단 걸음에 달려가 그의 이름을 외치면서

그를 응원하였고 거기에는 나는 한국 쇼트트랙의 간판인 모든 스타들을 미리 만나볼 수가 있었다.

 

한가지 여담이지만 김기훈 선수는 단국대를 나와 자신의 손목에 늘 묵주를 달며 열심히 얼음판을 휘저었고

이준호 선수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지만 늘 김기훈 선수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박세우 선수는 나의 신앙에 제자였으며 그의 부모가 경영하시는 사업장들 방문하여 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전이경 선수의 부모는 연희동 모근처에서 음식점을 경영하여 나의 가족들은 자주 그곳에서 모임을 갖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러한 일도 있었다.

그 날도 국가 대표의 선발 대회가 있었던 날 우리도 태릉 아이스 링크장을 찾아 열심히 응원하고 있었다.

바깥 날씨는 짬통같이 몹시도 무더웠지만 태릉만큼은 겨울처럼 몹시도 추웠다.

 

경기 시작전부터 차가 등장하여 열심히 빙판을 고르고 있었고 이윽고 등장하는 선수들의 파란 운동복과 빵모자는

하도 우스워서 나는 그만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대회가 시작되자 모든 선수들이 조를 이루어 트랙을 도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키며 자유롭게 달리고 있는 선수들의 모습은 거의 환상적이었다.

관중석에서도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우리는 박수와 탄성으로 열심히 그들을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매 경기가 진행될 때마다 선수들의 몸 싸움은 매우 불안해 보였고 코치진 간의 신경전들은 더욱 격렬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소속팀이 불리하다 치면 어김없이 게임이 중단되는가 하면 고함이 오고가며

심판진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전전 긍긍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코치진들은 관중들만 모르고 있는 그들만의 방식으로 등수를 바꾸기도 하였다.

 

한국인만이 있는 갖은 고집과 부정에 대한 댓가였다.

경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무언가 가슴에 남아있는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비단 나뿐 이었을까?

모든 경기가 다 그렇듯이 그것이 비단 한체대측과 비한체대측만의 문제일까?

대한 빙상 연맹에 누가 앉았으며 누구와 함께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대회의 성격도 얼마든지 달라지는 것이다.

 

삶이란 어쩌면 꿈을 찾는 여행이라고 할 수있다.

꿈이 사람에게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이 바뀌며 그의 행복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그의 꿈이 간절하면 할수록 언젠가는 그 꿈이 이루어 질 것이고 그 꿈이 사라지는 날 그의 삶도 끝장이 나고 만다.

 

왜 사람들이 이 나라에서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며 자살을 시도하는가?

그것은 이 나라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는 기관이라면 종교는 꿈을 안내해 주는 기관이고

국가는 국민들이 꿈을 키워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모든 기관이 이러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그 기관은 우리 사회에 존재할 아무런 필요가 없다.

사람이 공정하게 꿈을 펼치지 못하고 각종 파벌싸움이나 어떠한 목적으로 악용되고 만다면

제2, 제3의 안현수 선수는 또 나올 것이다.

 

우리는 지난 날의 이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야구천재로 유명했던 조성민 선수는 비록 가정문제로 최진실과 이혼을 하고 그녀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사람들은

그의 가정에 개입하여 그의 자식을 떼어 놓았으며 세인들의 무관심으로 그는 쓸쓸히 세상을 떠나가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여자배구의 간판인 김연경 선수는 아직도 국민들의 눈치만을 살피며 도움을 호소하고 있다.

 

너무도 염치가 없는 국가와 언론들...

2006년 당시 안현수 선수가 토리노에서 3관왕에 오르자 국가와 언론들은 침이 마르도록 그를 띄워 주더니

그가 무릅 부상과 파벌 싸움으로 다음 대회가 무산되고 급기야는 러시아로 전격 귀화를 하자 국가와 언론들은

그에 대하여 냉정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그의 숨겨진 고통들은 애써 감추면서 지도자 몇 사람의 교체만으로 문제를 덮어버렸다.

그리고는 그를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어놓고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막상 그가 이번의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 또 다시 선전을 하자 어느 새 빅토르안은 사라지고

그의 이름을 안현수로 잽싸게 바꿔 부르면서 염치없이 그가 자랑스러운 한국인임을  다시 내세우고 있다.

 

당신이여!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희망도 포기하는 삶이요

희망을 버리지 말라! 그것은 당신의 인생도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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