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나타난 안철수 현상과 새 것의 교훈

 

 

 

 

요즘 우리 사회에 돌아가는 정치 현실을 보면 안철수 현상에 대한 화두가 매우 뜨겁다.

모든 언론들은 매스콤을 동원하여 온갖 추측과 과장으로 정치판을 뒤 흔들고 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언론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할 때 나라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대신 작고 가는 소리, 정의로운 소리가 등장하여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고 선택된 소수의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예민한 감각을 지닌 정의로운 사람만이 들을 수있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그 소리는 그 시대 때마다 사람들에게 무시되어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이렇게 작고 가는 소리가 그 시대를 심판하고 미래의 비젼을 보여주며 역사를 주도해 왔다.

그 시대를 지배하던 큰 소리들은 역사의 바다에 침몰되고 작고 가는 소리가 그 역사를 지배하며

그 역사의 방향이 된 것이다.

 

우리 인간은 매우 불행한 존재이다.

인간들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서 불평하며 갖가지 험담을 늘어 놓는다.

그러나 그 잘못은 대개 우리들 자신에게 있다. 우리의 삶에 대한 의욕이 너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욕이 있었다면 아무리 삶이 단순하고 보편적이라 하더라도 삶의 의욕이 이처럼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의욕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에 아무리 화려한 잔치에도 더 이상 만족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상상에 의해 갖게 되는 만족은 항상 변덕스럽고 불안정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주지 못할 때 쉽게 싫증을 낸다.

그리하여 새로움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상황속의 새로운 추구가 아니라

언제나 내적인 새로운 자각에 의해서 추구해야만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허망하고 과장된 기대감과 정치적인 복잡한 추측,

그리고 밝고 유익한 일을 지나치게 생각하여 오히려 어두운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리에게 유익하거나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기대와 추측이 무너지고 말았을 때 사람들에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새 것이란 막연히 지난 날의 싫증과 지루함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것들을 찾고 동경하다가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감수성은 죽어버리고  만다.

 

외형은 자꾸 변화하지만 그 내면은 언제나 한결같다.

변화 무쌍한 우주의 상황속에는 처음부터 동일한 힘과 법칙이 작용하여 같은 현상을 계속 창조해 내는 것이다.

 

우리의 영혼 세계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그의 특별한 힘이나 악이나 지혜나 어리석음, 또는 그 생각이나 행동이 평범하지 않고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를 지나치게 의식할 필요는 없다.

오직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라! 그는 과연 진실하고 신뢰할만한 인물인가?

 

우리는 잠깐 여기에서 새 것을 향한 피곤한 발걸음을 멈추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해오던 그 길로 계속 나간다면 과연 우리를 진정으로 만족시켜 줄 수 있을까?

헛된 망상을 부등켜 안고 계속 이대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인가?

 

거기에서 우리가 만족과 희망을 찾는 한 우리들은 더 이상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가 없다.

설사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미래는 과거와 다를 바 없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너무도 잘못된 길에서 행복과 만족을 구하고 있다.

우리의 눈은 그 동안에 잘못된 방향을 바라보며 우리의 입은 지금도 새로운 것만을 찾고 있다.

우리는 오늘도 무언가를 기대하며 새로운 것을 찾고 있지만 우리들 자신안에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새 것이란 바로 구겨진 종이와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종이를 손에 쥐고 구겨서 새 것처럼 빳빳하게 다시 쓸 수가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정치란 구부러진 나무와 같이 인간은 모두 구부러진 마음을 갖고 태어났다.

만일에 정원사가 한 나무라도 구부러진 것을 본다면 정원사는 그것을 곧게 하려고 노력을 할 것이다.

만일 손으로 그것을 펼수 없다면 줄로 묶든지 막대기를 받쳐서 나무가 곧게 자랄 수 있게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어느 시대나 새로운 것을 찾아 헛되게 인생을 낭비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성경에 보면 솔로몬은 자신의 생애에서 많은 부분을 새로운 것을 추구하며 살아간 사람이다.

그가 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도 크고 많은 책들을 지었으며

백제 의자왕의 삼천 궁녀처럼 그에게도 후비가 700이요 빈장(嬪嬙)이 300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실망에 찬 한숨과 허무감뿐이었다.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도 이러한 사람들의 실망과 허무감은 많았다.

1961년 5월 16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반란을 일으키며 정권을 차지하였다.

5.16에 따른 개인이나 집단들에게는 각종 상을 수여했으며 1970년 4월 22일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하였다.

 

우리나라는 70년대 부터 경제 성장을 서둘러 왔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놀랍게 성장한 모습으로 갖추었다.

그러나 서둘러 이룩한 경제 성장은 많은 모순과 문제를 내포하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외채는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서둘렀기 때문에 기초를 확실히 다지고 천천히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대충대충 쌓아 올린 것이다.

지금의 4대강이 그러하다. 장기적인 안목이 없이 즉흥적으로 처리하는 행정은 얼마 안되어 헐어 버리기 일쑤이고

포장한 지 얼마 안되는 길은 또 파헤치기를 밥먹듯이 한다.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정책은 조령모개(朝令暮改)식으로 자꾸 바뀌어 학생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문제를 근본부터 착실히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적당히 땜질하듯 해결하여 왔기에 또다시 문제는 터지게 마련이다

 

오랜 세월동안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에 기만 당해 왔으면서도 그 본성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상대적으로 새로운 것, 새로운 기계, 새로운 교통, 새로운 집, 새로운 가구, 새로운 음식등과 같이

용도에 있어서도 새로운 것은 많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우리의 삶에 권태를 바로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우리가 모두 눈을 뜨고 자세하게 들여다 보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이고 거기가 거기이다.

 

그렇다면 안철수 의원이 말하는 새정치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가 흔히 창업을 이야기 할 때 일자리와 같이 기술을 익히고 훈련을 많이 쌓아야 성공을 거둘 수가 있다.

막대한 투자금을 들여 사업을 번창시킬 수도 있지만 그것은 위험하며 부도를 맞을 수도 있다.

 

아무런 정치 경험도 없는 그가 무슨 정치를 해왔길래 무엇을 믿고 새정치를 하겠다는 말인가?

그가 추구하는 새정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 단순하게 새로운 양비론을 펼치며 정치를 하겠다는 뜻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모아 정치를 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이 그가 말하는 새정치의 진정한 모습인가?

 

우리 말에 "누리"란 말은 세상이라는 뜻으로 "새누리"는 새로운 세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새누리당이 바른 길을 가지 않고 온갖 더럽고 추한 길로 계속 나간다면

그 당은 역겨운 냄새와 같이 누린내가 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찾아 열정과 근심과 갈망으로 자신을 괴롭힌다는 사실은

지난 날의 삶이 너무도 공허하고 불만도 컸었다는 반증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똑같은 것을 가지고도 자주 새로운 것을 부각시키며 남들과는 다르게 차별화를 시도해 왔다.

그러나 새 것이라고 무조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새 것이란 대개 미숙하고 불안정하며 실수도 내포하고 있다.

자꾸만 일을 만들고 분열되기 보다는 서로 융합하고 보완하여 모두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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