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천년을 앞둔 지난 여름날 서울의 200명 교우들과 함께 어느 농촌 봉사 현장에서 (현지 아침 출정식을 앞두고)

                    책임 의식을 가집시다

 

 

 

 

 

                 이 세상은 슬픔이 많은 세상입니다.

 

              어린 아기는 고통의 울음소리와 함께 인생을 시작하며

              이것은 장차 인간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고통이 많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꿈이 많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난이 따라야 하고

              책임의 비중이 커 갈수록 그가 느끼는 압박감또한 크기 마련입니다.

 

              책임 의식없이 일에 뛰어 든 사람은 사사로운 목적만을 생각하게 되고

              위기 때가 오면 사람은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로 책임을 돌립니다.


              그러나 자기의 책임을 무겁게 느껴야 할 자들,

              이를 테면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나 재판관, 지도자들은 함부로 나서기를 꺼려합니다.

 

              그렇다면 자기앞에 책임이 주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날은 직위의 본질이 전락하여 이름만 남아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직위는 하나의 약속이며 직업은 책임을 의미합니다.

 

              성직이라고 해서 그가 반드시 거룩한 봉사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직이란 원래가 진리를 바르게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진리란 대개 상징된 사물과 그 상징이 일치하는 것입니다.

              진리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고 무엇을 위하여 죽을 것인지 해답은 거기에 나와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 현상을 올바르게 해석할 때 진리가 되고

              역사는 있는 사실을 성실하게 기록할 때 진리가 되며

              종교는 자기가 믿고 있는 신께 부복(俯伏)할 때에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분명하게 제시되어야 합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사사로움이나 모순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등대가 희미하게 비추거나 불이 꺼지거나 거짓된 빛을 발한다면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은 파선하고 말 것입니다.

 

              지도자란 양심이 깨끗해야 합니다.

              만일 지도자가 어떤 상상력이나 이성에 호소한다면 사람들은 영원히 구름과 그림자만 쫒아 다니게 될 것이고

              지도자가 양심에 호소하면 그 양심은 즉시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 국가를 이루는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적인 의무를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시민으로서 함께 살아가야 하고 또한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특히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은 항상 남을 불쌍히 여겨야만 합니다.

 

              자비가 다른 사람들에게 등불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가슴 속에서는 빛나는 별이 되어야만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직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그 일을 얼마나 책임있게 수행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책임에 휘말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때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그는 너무도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도움을 주어야 할 곳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누군가는 말하기를 세상의 10%가 있어서는 안될 사람이고 70%는 있으나 마나한 사람이며

              20%는 꼭 있어야 할 사람으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곳으로 세 사람이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난 그 사람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이 사람은 성전에서 일을 마치고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못 본척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을 만지면 자신이 불결해 질 것이라고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 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로 한 레위인이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도 그 사람을 보고는 다른 길로 피해서 그 곳을 빠져 나갔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그 모습이 너무도 무서워 보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남아 있는 병폐입니다.

              한국 교회가 주일 성수를 강조하고 말씀을 듣게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이 변화되지 못하고 습관적인 종교생활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세 번째로 한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다가 강도 만난 이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사마리아인들은 혼혈민족이었으며 유대인들과는 사이가 매우 나빴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과 음식을 먹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보며 뜨거운 연민의 정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를 싸매어 주고 주막으로 데려가서 정성껏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는 주막을 떠나면서도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환자를 부탁했습니다.

              돈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꼭 갚겠노라며 약속을 하고 그는 길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념이나 종교가 다르다고 이웃이 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어떤 제도나 조직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국가의 지도자가 4.19나 5.18의 기념정신을 외면한다면

              어느 누가 국가의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국가의 지도자가 저들의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지 않는다면

              어느 국민이 지도자의 손을 반갑게 잡아 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재난을 당한 이웃이나 북한의 동포들을 볼 때

              자기의 입장이 아닌 피해를 당한 자들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에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책인즉명(責人則明)이란 말과 같이 자기 허물을 덮어 놓고 남의 허물만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가 얼마든지 할 수도 있었던 일을 불가항력으로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그 책임을 지지않겠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그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우리가 돌보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 그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관심이 있으면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얼마든지 도와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아이가 길을 잃고 슬프게 울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아이가 미아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길 가에 한 사람이 가련하게 누워 있습니다.

              그의 생사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우리는 바쁘다는 이유로 그를 외면 해서는 안됩니다.

 

             사람과 사람을 서로 이웃되게 하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진정한 이웃이란 동정하는 마음과 친절한 마음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서로가 함께 살 수가 없고 같은 직장이나 조직이나 친구도 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우리에게 책임있는 사람이 너무도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어느 곳을 둘러 보아도 그러한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정치계나 경제계, 교육계, 언론계, 종교계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를 선택한 나머지 우리의 정신세계는 몰락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맡겨진 책임들은 대부분이 어려운 일인 지도 모릅니다.

             그 일은 전투요 경쟁이고 피흘림입니다. 그렇지만 열심히 일하십시오.

 

             문 앞에서 고민하는 것은 출입문이 닫혀 지거나 영원히 기회가 없어질 지도 모릅니다.

             일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멀리 떠나야 하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좀 더 일찍 일어나고 불의와는 끝까지 싸워 이기십시오.

             진정한 장수의 달력에는 내일이란 없습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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