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선으로 바꾸라

 

 

 

 

유대인의 탈무드에 보면 선과 악이 세상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우화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구를 뒤덮은 대 홍수 때 온갖 동물이 노아의 방주(方舟)로 다가왔습니다.

이 때 선도 급히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선을 태워 주기를 거절했습니다.

"나는 쌍을 지어 오지 않는 자는 태워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선은 숲 속으로 들어가 제 쌍이 될 상대를 찾아왔습니다. 그 상대가 바로 악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선이 있는 곳에 악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은 선과 악의 본질적인 차이를 느끼고 인정합니다.

더욱이 모든 국가는 범죄자들에게 벌을 가하는 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과 악의 차이를 부인하는 국가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악을 선이라 하고 선을 악이라 한다면 그리고 미덕과 악덕을 부정한다면

흑암과 광명을 혼동하는 사람이 자신의 명확한 시각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그의 이성과 판단력을 우리는 한 번쯤 의심을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가 결국에는 죄에 대하여 정당한 징벌을 받게 된다고 해서 자신의 길을 인도해 주는 빛을 보지 못하고

벼랑에 떨어지는 사람처럼 그는 남들의 동정을 받을 가치조차 없을 것입니다.

 

모든 길에는 다 방향이 있습니다.

어딘지는 잘 모르지만 종착지를 향해서 길이 쭉 뻗어 있습니다.

모든 길들은 그 방향이 서로 다르며 한 길을 따라가면 갈수록 다른 길과는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모든 현재는 미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모든 행동, 모든 생각이 미래를 구성하는 요인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자신의 모든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우리의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른 길이 아니라면 빨리 되돌아 가고

불명예와 치욕과 파멸을 만나지 않으려거든 악의 길에는 첫발도 들여 놓지를 마십시오.

그러한 길은 반드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로부터 미국이라는 나라는 흑인 노예들을 부리던 나라입니다.

링컨 대통령에 의해서 흑인들이 해방을 얻기는 했지만 인종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과거에는 백인들이 흑인들과 함께

농구를 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오늘날의 미국 농구 스타들은 거의가 흑인이지만 그것은 1950년대 후 부터입니다.

요즈음도 여전히 인종차별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드러내 놓고 인종 차별적인 언행을 할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그랬다가는 법의 무서운 제재를 받아야만 합니다.

 

오늘날처럼 미국 사회가 이렇게 크게 변화된 주요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사람의 신념에 찬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틴 루터 킹 목사였습니다.

 

1964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30대의 흑인으로 흑인 민권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미국의 몽고메리시의 한 흑인 침례교회 목사로 부임해 갔을 때 그 도시에서 발생한

버스 승차 차별 철폐 운동에 지도자로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흑백인 차별 대우가 없어질 때까지 그 도시의 모든 흑인들이 버스 승차를 거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운동은 일 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그 동안 백인들로부터 수 없는 협박전화와 압력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한 번은 그의 집에 백인이 던진 폭탄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흥분한 흑인 군중들이 제각기 흉기를 들고 이곳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경찰들도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군중이었습니다.

이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조금만 건드리면 폭발할 것같은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에 킹 목사가 분연히 나타나 말했습니다.

" 여러분들 중에 흉기를 가지신 분이 계시면 그것이 원래 있던 곳에 가만히 갖다 두십시오.

우리는 보복적인 폭력으로써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우리는 폭력을 비폭력으로 맞아들여야 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는 백인 형제들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하든지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가 말한 것처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는 이것을 기준삼아 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는 증오를 사랑으로 맞아야만 합니다.

자, 여러분 이 찬란히 빛나는 확증을 가지고 이제는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주십시오"

 

킹 목사의 말이 끝나자 군중들은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응답했습니다.

폭력을 폭력으로 맞섰더라면 몽고메리의 흑인 민권 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폭력을 비폭력으로 대함으로 마침내 그는 찬란한 승이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근교 링컨 기념관에서 가진 <워싱턴 대행진 출발 기념식>에서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 아이 해버 드림)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중요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 바로 백년 전에 우리가 서 있는 이 상징적 그림자의 주인공인 한 위대한 미국인은 노예해방 선포문에 서명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1백년이 지난 오늘날 흑인들의 생활은 슬프게도 아직도 인종격리라는 쇠고랑과 인종차별이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의 검은 피부색 시민들에 관한한 미국이 약속어음을 부도냈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듭거듭 물리적 폭력에 영혼의 힘으로 맞서 싸우는 숭고한 고지위로 올라서야 합니다.

 

친구들이여, 이 순간의 어려움과 고뇌에서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나에게 꿈이 있다는 것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이 꿈은 미국의 꿈에 깊이 뿌리를 내린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이 나라가 일어나 '우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믿는다' 라는

국자적 신조의 진정한 뜻을 실천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불의와 억압의 열기로 뒤끓고 있는 사막의 주 미시시피 주 조차도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로 바뀔 날이 올 것이라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의 어린 자식 넷이 그들의 피부색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인격여부에 따라 판단을 받는 나라에서

살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오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어느 날 모든 골짜기들이 높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들이 낮아지며 거친 곳들이 들판이 되고

구부러진 땅들이 곧아지며 주의 영광이 드러나 모든 육신들이 주의 영광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남부로 가지고 돌아갈 신념입니다.

이 신념으로 우리는 절망의 산으로부터 희망의 돌을 깎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신념으로 우리는 우리나라의 시끄러운 불협화음을 형제애라는 아름다운 교향악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신념을 가지고 언젠가는 우리가 자유로워진다고 믿으면서 우리는 함께 일하고 함께 기도하고 함께 투쟁하며

감옥에도 같이 갈 수 있고 자유를 위해 함께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킹 목사의 꿈은 현실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는 비록 흉탄에 쓰러졌지만 신념에 찬 그의 메세지는 지금도 미국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수 없이 많은 백인들과 흑인들의 삶속에 살아있는 지도자처럼 희망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과연 국민들이 믿고 따를 수있는 지도자는 있습니까?

지난 수 십년 동안 대한민국은 기술개발과 경제발전이라는 끝도 없는 세계를 향해서 그토록 박차를 가했음에도

우리의 경제는 총체적인 난국에 빠져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물가는 자꾸만 치솟아 오르며 정부조차도 마땅한 대안책이 없는 듯

집값만 자꾸 저울질 하면서 서민들의 투기만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있는 것이 거의가 은행빚이거나 해외에서 빌려온 부채라고 생각할 때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우리 대한민국이 선진국이라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실업자들은 날로 늘어만 가고 노인들은 자신들도 백수라고 부르며 거리로 나오는데

정부는 기업이 살아나야 일자리가 늘어난다며 해괴망칙한 논리만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염치도 모르는 정치인들은 하루가 멀다않고 매일같이 권력싸움에만 몰두하고

가뜩이나 어려운 서민들의 삶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타난 세월호의 유가족들이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끝내는 거리를 나와서 정부에 대항하는 것도

못 마땅한 법과 처리에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세월호의 특별법이 수사권을 놓고서 정치인들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다가 얼마나 여론의 눈이 무섭고

국회등원이 필요했으면 이제와 이해 당사자인 유가족들을 제쳐두고 세월호 특별법을 전격 타결 하였을까요?

 

과연 누가 어떻게 세월호를 조사하며 성역없이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대통령도 성명을 통해 이번 세월호의 최종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고백한 바 그 책임을 어떻게 질 것이며

청와대는 과연 그것을 바라보며 어떻게 대응할까요?

 

아마도  십중팔구 금년 안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기는 어렵고 내년에도 힘들며 적당히 어느 선에서 타협하며

세월호의 문제는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될 때 야당 정치인들은 이번에도 역시 무능하다는 평을 들으며 힘에 굴복한 나머지 

세월호의 중요한 사건을 놓쳐버린 그 의무와 책임을 지게될 것입니다.

 

경제도 중요합니다, 기술 개발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이 사회 속에, 가정 속에, 국민들의 삶 속에 꺾여버린 신념을 다시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신념이 남아 있는 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불행한 사고를 만나도, 병에 걸렸어도

우리는 반드시 그 고난을 이겨내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킹 목사처럼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통일을 할 수 있다는 간절한 꿈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처럼 우리의 평화통일 문제가 너무 한 쪽으로만 쏠려있는 상황에서는 평화통일 추진문제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정당을 초월하여 범민족같은 시민단체가 주체되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우리의 긍정적인 삶은 어느 경박한 삶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고난의 역사를 통해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그리하여 현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울 지라도 부정과 손을 잡지 말고 더욱 더 정의롭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악은 체면이 없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구 날뜁니다.

폭력과 사기와 거짓, 부당한 압력과 착취, 그리고 권모술수를 가리지 않고 마구 휘두르지만

선은 언제나 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정의의 길을 가야 하기에 악과 선이 맞붙으면 언제나 선이 손해를 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두들겨 맞고 상처를 받으며 고난을 받을수록 더욱 빛나는 것은 선이요,

때리면 때릴 수록 힘이 빠지고 나빠지는 것은 악입니다.

 

악의 역사를 선으로 바꾸는 것,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있는 진정한 아름다운 세상만들기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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