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왜 필요한가?

 

 

 

 

 

 

                 지난 시절, 내가 힘 겹도록 배움에 사무치고 신학공부를 하던 때

                 학비가 없을 때면 나는 종종 큰 가방을 어깨에 둘러 메고

                 어느 농촌 마을로 들어가서 생활용품들을 팔아야만 했다.

 

                 매 학기가 돌아오면 남들은 한 학기씩을 잘도 올라가는데

                 나는 무슨 잘못이라도 한듯이 자주 한 학기씩을 쉬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 수 없지 뭐... 하면서 또 다시 산으로 들어가서 몇날이고 기분을 달래기도 하였다.

                 그것은 나를 한층 더 강화시켜주는 값진 공부였다.

 

                 가만히 그 때를 돌아보면 어느 새 무수히도 거쳐간 모든 교단들과의 인연...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모두 총회장급 교회들이었고 그 교회들은 지금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그런 인연이 있어서인지 훗날에 내가 결혼을 하던 때는

                 40대의 어느 젊은 주례사를 모시고 성대한 결혼식도 마쳤다.

 

                 밀려버린 학비는 아는 지인의 피아노를 저당잡혀야만 했고

                 칼빈이라는 별칭도 들어가며 수업을 받아야만 했으며

                 이해가 가지 않을 때면 나는 종종 질문세례를 퍼붓기도 하였다.

 

                 수업은 자주 중단 되기가 일쑤였고

                 교수들도 무척 곤혹스러운 듯 대충 넘겨버리는 눈치였다.

                 어떤 강사는 다음학기를 마무리도 짓지 못한 채 스스로 강단을 떠나야만 했다.

 

                 사람은 누구나가 자기 집안은 자기가 청소한다.

                 적어도 청소만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자기 집안을 누군가가 대신 나서서 쓸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어떠한 종류의 개혁이든지 먼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개혁을 서두르라.

 

                 특히나 한국교회와 국가는 먼저 개혁 되어야 할 대상이다.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건물이나 높은 종탑을 연상하기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당이지 교회는 아니다.

 

                 교회라는 말은 (Ecclesia 에클레시아) 라는 말로

                 흩어진 무리들이 두 사람 이상 그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타락되었다는 것은 건물이 썩은 것이 아니라

                 그 종교계가 부패했다는 의미이다.

 

                 보편적이기를 꺼려하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일 수가 없다.

                 교회가 강단에서 서슴없이 이념이나 조장하고

                 헌금을 강요하면서 사람들을 멋대로 구분짓는 것은

                 종교계가 더 이상 교회이기를 포기한 집단과도 같은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은 국가의 축소판이다. 국가란 개인의 상황을 보다 확대한 것이다.

                 국가란 (the body politic) 사람들의 모임이며

                 국가안전은 어떤 특정한 것이 아니라 그 정부의 도덕여하에 달려있다.

 

                 정의가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국민은 불의를 거부한다.

                 그것이 설령 권력이나 대통령이나 어디에서 나왔더라도 불의를 거부한다.

                 또한 우리는 쿠데타에서 나왔든지 정권야욕에서 나왔든지 독재를 거부한다.

 

                 만일 몸에 이상증세가 나타나면 우리는 몸전체를 관리하려고 부단히 힘쓸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도덕적 부패가 쌓이면 사회의 활동성은 파괴되고

                 이것은 오직 개혁으로만 가능하다.

 

                 로마 카톨릭이 중세를 주름잡았지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처럼

                 오늘날 사회주의에 속한 국가들이 점점 개방정책을 서두르며 민주화 되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구 세력들이 이를 막고 사회주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몸부림도 있다.

 

                 중국의 자유화물결이 무참하게 짓밟힌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오래가지를 못할 것이다.

                 자유가 귀하다는 의식을 알게된 이상 국민들의 열망을 그 누구도 막을 수는 없다.

 

                 개혁(改革)이란 단지 어떤 묵은 제도나 기구등을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하는 변혁만이 아니다.

                 그것은 좀더 나은 환경,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 자유롭게 살자고 하는 끝없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있다.

 

                 우리는 지금 모든 분야에서 개혁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에 대한 청렴결백은 매우 시급하다.

                 황금을 훔친 강도가 쌀을 훔친 도적을 재판해서는 안될 것이다.

                 세상의 큰 부정은 가난한 사람보다도 부자들이 통크게 사기를 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한국 교회와 국가가 개혁되어야 함을 느끼면서도 개혁이 늦는 것은

                 개혁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개혁을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가 자연앞에 나아가 겸손하게 무릎꿇고 개혁의 법칙을 배우라!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며 우리는 크게 놀라지만

                 거기에서는 탄성만 있을 뿐 썪은 냄새는 전혀 맡아볼 수가 없다.

 

                 북풍의 칼바람이 숲을 향해 무섭게 돌진하지만

                 그로 인해 나무들은 뿌리가 더욱 박히고 수액은 풍부하게 된다.

 

                 하늘의 전령사인 천둥과 번개도 가끔씩 우리를 향해 내리치지만

                 그로 인해 공기가 정화되고 대기의 병균들은 이내 사라지고 만다.

                 개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보라! 그 끝이 다가 오고 있다.

                 저들은 허망한 꿈을 꾸며 소득없는 승리를 위해 밤낮 애쓸 뿐이고

                 저들의 싸움은 죄만 더할 뿐 저들의 자랑거리는 웃음거리가 되며


                 저들의 승리는 일시적일 뿐 저들의 행복은 잠깐 사이에 지나가고

                 저들의 영광은 시들어가는 꽃과 같도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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