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우리 사회

 

              

 

 

 

 

 

 

 

 

 

 

         인간의 삶은 보통 세 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규칙의 단계이고 둘째는 독립의 단계이며 셋째는 도덕적인 직관의 단계입니다.

         여기서 직관이란 자기의 윤리관에 비추어 행동여부를 결정하는 순간적인 지혜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어려서는 규칙에 얽매여서 "안돼" "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안된다"라는 말을 자주 들어오다가

         인간이 자라면서 그는 규칙에 얽매이는 대신에 스스로 행동의 원리를 알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유의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 전 부터 우리가 지켜오던 질서를 어기고 부자가 되었거나 출세를 했다면

         우리는 그를 보고 크게 비난할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관점에서 남을 평가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선행을 하며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고집을 부린다면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수준에서 그를 평가하고 비난하기가 쉽습니다.

 

 

         높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갑작스러운 환경이나 변화는 결코 유익하지 못합니다.

 

 

         매우 가난하던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거나 출세를 할 때

         또 잘 나가던 사람이 갑자기 환경이 나빠지면 그들에게는 여러가지 좋지 못한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

 

 

         세상에서 만족하게 살고 싶은 마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돈을 벌거나 공부를 하며 시끄러운 세상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강한 자는 언제나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해야 합니다.

         강한 자는 약한 자의 고통을 돌아보고 부자는 가난한 자를 도와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성숙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과거에 갖고 있던 원리나 규칙등을 거부한다고 해서 성숙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독선적이고 편협한 생각에서 벗어난 사람만이 남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성숙해진 사람만이 자신의 생각이나 사고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화목하게 지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이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지 스스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람 중에 링컨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링컨이 변호사들과 함께 법정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둥지에서 떨어진 가엾은 새끼 두 마리를 보고는 가던 발 길을 멈추고

        "나는 이 어린 새를 어미 품에 다시 돌려주지 않고는 마음 편히 잠을 이룰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강한 자라면 마땅히 약한 자의 단점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만일 편견에서 벗어난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그의 성숙은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세상은 우리에게 늘"인생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반쪽같은 진리의 배후에는 이기심이란 조정자가 숨어 있습니다.

 

 

        "세상을 즐기라, 그리고 다른 이들도 인생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 주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게는 너무도 필요한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요?

 

 

         성숙(成熟)이란 말은 열매가 충분히 여물었거나 생물이 다 자란 상태를 의미하는 것 입니다.

         그것은 어떤 현상이 충분히 발전하여 무르익은 상태를 가리키는 뜻입니다.

 

 

         성급하게 속성시킨 것은 그 뿌리가 약하여 바람이 불거나 환란이 찾아오면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성급하게 서둘러 이룩한 정치와 경제, 문화와 교육등은 그 바탕이 허술하기가 쉽고

         그 질이 문제가 되며 결국 우리가 이렇게 어려움을 맞게 된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기다림과 필연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성공을 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인간의 바탕을 다지는 과정들을 생략하지는 마십시요.

         인간의 바탕만 확실하면 그 사람은 결코 요동치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지루하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기초를 무시하고

         서둘러 눈에 보이는 집만을 지으려고 합니다.

 

         모양은 갖추었지만 능력이 없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기초작업을 생략한 사람들은 집을 먼저 지을 수는 있지만

         그 집은 비바람이 불어 닥칠 때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모두가 힘 있고 능력있는 한 사람보다는 양심있고 깨끗한 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도덕과 양심이 없는 사회는 진실이 없는 기계같은 사회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에 있는 수 많은 인사들이 그러합니다.

         과연 우리나라의 인사들은 기초공부는 제대로 하였을까...역사관은 올바르게 갖추었는지...

         인사로서 갖추어야 할 능력들은 충분한지...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를 논할 때마다 항상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을 누가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인사가 성숙한 사람들은 역사를 바라볼 때에도 분명하고 진실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일은 역사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진단하고 문제점들을 성찰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이유에서 나왔든지 간에 우리에게 일어난 역사만큼은 절대로 지워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지난 과거에 미국과 일본등에 의하여 혹독하리만큼 고난을 많이 받아온 민족입니다.

         저들이 우리에게 저지른 잘못들은 보지 못하고 우리에게 도와준 일만 기억한다면

         우리처럼 가련하고 어리석은 민족은 또 없을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1907년 7월 6일 비극적인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진출 방침에 따른 한일합병이 굳어지면서

         그 이듬해 한일합방이 강제적으로 체결되었습니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완전 식민지화로 강압적인 정치를 강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해 서울에 조선 총독부를 두어 입법, 사법, 행정을 전부 장악하여

         우리 민족은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1904년 한일 의정서가 교환된 바 이때부터 토지와 노무자가 징발되기 시작되었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마져 일본이 장악하자

         한국의 주권은 완전히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미국과 일본이 맺은 밀약을 보면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테프트 육군장관을 일본에 파견하여 포츠담 조약을 협의하며

         비밀 밀약을 성사시켰습니다.

 

         첫째로 일본은 필리핀에 대하여 하등의 침략 의도를 품지않고

         둘째로 극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미국과 영국 일본은 실질적인 동맹관계를 확보하며

         셋째로 노일전쟁의 원인이 된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는 내용입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한 강대국들의 정책앞에 우리 민족이 힘 없이 감래해야만 했던

         지난 날들의 굴욕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우리 민족은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는 잠시 착각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1945년 8월 15일을 우리나라가 해방된 날이라고 좋아하지만 그러나 이 날은 우리의 해방일이면서

         미,영,소,중에 의한 민족의 강제적 분단이 된 날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광복일도 2년 전인 1943년 11월에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에 의한 우리 민족의 독립을 결의하고

         1945년 7월에 스탈린과 또 다시 만나서 얄타회담에서 오늘의 남북 38선을 합의하게 된 것입니다.

         빼앗긴 자유와 얻어진 자유의 허구성을 역사의 한 장에서 어느 국민이 분노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 말에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들인다는 말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한국 전쟁은 마치 조폭(組暴)들이  모여 자기들의 이익을 먼저 따져보고 병주고 약주는 대리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은 일본에게 군사 무기를 요청하여 그 무기로 한국 전쟁을 겨우 마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고 그들과 손을 잡으며 자랑스러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박근혜 정부의 어느 총리 후보자는 교회의 강연등에 나와서 만일에 저들 국가가 없었다면

         우리 민족은 이 지구상에 영원히 사라져 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강변할 정도입니다.

         나아가 저들을 우리에게 보낸 준 것은 모두 다 하나남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간증이나 강연등은 주로 교인들의 신앙을 독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위한 복음입니다.

         그러나 그 강연의 성격과 내용들이 성경적이고 진실한 내용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이 교인들에게도 유익이 되며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해방이후 우리 민족은 남북으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면서 지금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우리의 사고 구조자체가 자연 흑백논리에 익숙해지고 예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돕고 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무척 각박에지고 말 것입니다.

 

         오늘 비록 고난과 어둠의 역사가 있다고 할 찌라도 우리는 더욱 더 하나가 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장차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질 우리나라는 고난을 헤치고 성숙해 간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흑과 백, 좌와 우가 서로 대립하며 양극으로 나뉘어져 있을 때는 그 어느 쪽에도 평화가 없습니다.

         흑 없이 백이 있을 수가 없고 좌 없이 우가 있을 리가 없습니다.

         둘이 합하여 조화를 이루어갈 때 거기에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희망주는 강연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망과 용기를 주라  (0) 2014.07.04
소라게가 주는 교훈  (0) 2014.06.26
책임 의식을 가집시다.  (0) 2014.06.09
뿌리를 보라  (0) 2014.05.22
오월을 생각하며  (0) 2014.05.0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