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침도 모자람도 없이

 

 

 

 

                자연은 이 땅에서 태어나 얼마나 자유롭고 향기로운지

             우리는 자연을 대할 때마다 항상 고마움을 느낍니다.

 

             차갑고 지루하던 긴 장막이 걷히고 봄이 열리는 3월이 오면

             그 동안 잠을 자고 있었던 모든 생명은 깨어나고 힘차게 활동을 시작합니다.

 

            3월을 March 라고 하는데 이 말은 행진하다 움직이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3월의 개울가는 어느 새 모든 것이 녹아 내리고 바다를 향해 힘찬 전진을 시작하며

            어둡고 매말랐던 땅에는 새순들이 돋아나서 희망찬 내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길 가엔 개나리꽃, 뒷 산에는 진달래꽃,

            들 판에는 민들레꽃, 집 안에는 사랑꽃이

            섬진강 따라 매화꽃은 길게 줄을 잇고 남녁에서는 노란 산수화가 장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봄은 그 색깔과 아름다움과 개성으로 무궁무진한 꽃의 세계를 보여주며

            오늘도 말없이 상춘객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꽃에 만족하지 않고 알 수없는 수 많은 변덕으로 계속 물들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선조들은 알지 못했던 기묘한 꽃들을 구하여 눈부신 벚꽃과 가시넝쿨,

            신비한 외래종의 꽃들을 계속 불러 들이면서 우리의 생태계는 이제 점점 더 빛을 잃어가고만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형적인 변덕을 자꾸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옛말에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친 것이나 모자란 것이나 모두 좋지 않다는 말로 곧 중용(中庸)을 택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할 때에는 항상 불완전하여 우리가 아무리 불의를 피하려고 해봐도

            인간은 어쩔 수없이 약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법은 사소한 일, 하찮은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이 법의 원칙이며

            법정은 특히 무익하고 귀찮은 일들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독단적이고 무익하며 무가치한 일들에 대해서 자기 양심을 법정에 세워놓고

            무조건 고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큰 착각입니다.

 

            진실되고 고결한 양심은 유연하고 민감하며 예리하고 절대적이어야 하지만

            그 반면에 진리가 다 그러하듯이 그 스케일이 크고 넓고 관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연필로 그은 듯한 가는 선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들은 삶을 용기있게 그려나가는 희망도 필요합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특별한 장점이나 탁월함에 대해서 편집적(偏執的)인 애착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가 자기 함정에 빠져드는 덫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느 식물학자가 말하기를 "꽃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결점은 그 꽃이 가지고 있는 좋은 속성을

            너무 과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세계나 인간의 결점들도 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검토해야 하지 않을까요?

            망상에 의한 이상(理想)은 우리를 너무 지치게 하며 왜곡시키고 피폐(疲弊)하게 만듭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인들이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 기도나 묵상, 집회에 참석하고 말씀을 선포하는 것,

            금욕이나 직분을 감당함에 있어서 너무 과할 경우에는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지나친 것은 인간적인 의지가 만들어 낸 경배의 행위,

            성경에서 말하지도 않은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명분하에

            인간적인 과욕에서 나온 이상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그리하여 집회가 좀 더 화려하고 거창하며 아름답게 꾸며서 자기들만의 축제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신앙적인 열정은 원래가 단호하고 뜨거운 것이기에 이성을 차리기도 힘듭니다.

            그러한 열정이 박해와 억압을 낳고 순수하던 신앙의 정신마저 깨뜨리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이 착각의 노예가 되면 점점 더 치우치게 마련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기 보다는 설교들을 오직 청중을 모으는 데만 급급하면서

            스스로를 능력의 종이라고 자임하며 자기 PR이나 교회 자랑하기에만 열을 올리게 됩니다.

 

            나중에 자신에게 닥칠 결과를 생각지도 못하면서 무작정 약속하는 행위들도 지나친 것입니다.

            하나님앞에 약속한 그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을 때 그로 인한 죄책감은 또 얼마나 두려울까요?

 

            성경에 보면 예수 당시의 교회를 초대 교회(初代敎會)라고 부릅니다.

            초대 교회의 시작은 예수의 부활 승천 후 제자들이 120명의 무리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였는데

            순식간에 삼천명으로 불어났고 그 수는 날마다 증가하여 남자의 수만 오천여명에 달하였습니다.

            이 무리들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전신(前身)을 이룹니다.

 

            이들은 로마 각처로 흩어져서 도시에 여러 교회를 세웠는데 이들이 보여준 나눔과 사랑의 실천은

            모든 교회의 모범이 됩니다.(행2장)

 

            그러나 다른 무리들 가운데에는 성경에 대한 열성이 너무 지나쳐서 이교도들을 자극하고 모욕을 주며

            공격하는 자들도 많았습니다.

            또한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상황인데도 자기의 몸을 던져 순교의 제물이 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시험이 다가올 때에 쉽게 쓰러지거나 자신의 신앙까지 부인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져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매우 극단적인 신앙인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 지도자들은 권력자들과 결탁하기에 바쁘고

            어떤 이들은 자기의 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인들이나 퇴역 장병들을 모아다가 대중들과 싸우며

            어떤 사람은 자기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채 자기의 몸을 내던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흔히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어떤 행위에 대한 그 사람의 동기는 선하였지만 결과는 악한 것으로 나타났을 때와

            또 하나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도 선한 행위를 두고 그 동기가 악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입니다.

 

            전자는 그 행위 자체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그 동기가 선하다고 한다면 그 잘못도 넘겨 버리기 일쑤이고

            후자는 그 동기가 악하다고 판단이 되면 온갖 방법으로 낙인을 찍어 가혹하게 정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는 비록 그 동기가 어떠했는 지는 모르지만 방법이 잘못되었고

            따라서 그 결과 또한 당연히 악하게 나온 것입니다.

            후자는 눈엣 가시처럼 자기가 힘이 있을 때에 재판하는 감정싸움은 아닐까요?

 

            우리는 매일같이 TV를 보며 국가가 지은 엄청난 불의에 대해 하루 속히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공동체안에서 그 원칙이나 훈련하는 방식, 규범들의 약점을 개혁시키겠다며 공연히 분주하고

            요란하게 떠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개혁자로서의 좋은 요건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부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응답해 줄 것인지,

            분쟁만 일으키는 개혁은 진정한 개혁이라고 할 수없습니다.

            억지로 꾸며낸 듯한 이러한 개혁들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에도 힘듭니다.

 

            진정한 개혁은 아름다운 꽃과 같아서 뜨거운 태양 아래 가만히 서 있어도 더욱 눈부시게 빛나고

            단지 눈에 보이는 변화와 개혁만을 추구하는 자는 태양이 내리쬘 때 곧 말라 버리는 꽃과도 같습니다.

 

            개혁(改革)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동산의 나무가 병든 것처럼 개혁은 그저 가지나 치고 주사나 몇대 놓는다고 해서 낫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혁신 (革新) 들은 언제 또 다시 불의가 재발될 런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땅의 모든 개혁자들이여! 개혁을 하시려거든 지금 당장 썪은 나무부터 잘라 버리십시오!

            주변의 가시넝쿨을 치우고 잡초를 뽑아내는 일 역시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 의무를 지나치게 하여 다른 의무에 방해가 되거나 다른 의무를 간과해 버리는 경우,

            육체의 건강이 허락하지 않는 범위까지 나가는 경우,

            현실적인 상황이나 조건이 맞지 않는데도 억지를 부려 행하려는 경우,

            이 모든 것들은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신중하고 겸손한 자는 두번 다시 지나친 우를 범하지 않습니다.

            비록 상대가 높은 지위나 성격으로 자신을 화나게 하고 비난할 수 없도록 만들어도 함부로 나서서

            그의 잘못을 비난하기 보다는 부드럽고도 정당하게 그 사람이 거부감을 갖지 못하도록 권면합니다.

 

            대부분의 논쟁은 비록 그것이 좋은 분위기에서 진지하게 논의가 된다 하더라도

            논쟁자들은 처음부터 그대로 자기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얘기가 오고 가도 결과적으로 쌍방은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감정만 더욱 나빠지고

            헤어지고 맙니다.

 

            자연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없이 호소하고 있습니다.

            진정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은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자연의 품속입니다.

            희망이 살아 숨쉬고 조화로움과 실재(實在)와 합리(合理)가 어우러지고 

            가식이 없는 진정성과 순수함이 살아 있을 때 아름다운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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