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우리 나라에도 소개된 <로베로 장군>이란 영화를 아십니까?

 

            나치에 저항했던 저항 운동가들이 감옥에서 처형당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저항 운동에 참가한 일이 없는데도 잘못 잡혀온 사람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너무 억울하게 처형당한다고 생각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나는 저항 운동을 한 일이 없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억울하게 죽음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이 때에 옆에 서 있는 한 저항 운동가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_ 그것이 잘못이다.

           당신이 아무 것도 안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

 

           전쟁은 오 년이나 계속 되었고 수 백만명의 사람들이 무참하게 피를 흘렸으며 조국과 민족이 멸망 직전에 놓여 있는데

           도대체 당신은 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죄_ 자기의 안전과 평안만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나라에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 오늘의 주제입니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8시 48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앞바다에서

           승객 476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무슨 일을 만났는지 그만 바다에 침몰하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6.800톤 급이나 하는 이 거대한 세월호는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시 단원고 2학년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476명과 함께 승용차 180대 외에도 화물 등이 실어있었습니다.

 

          고귀한 생명 174명만을 간신히 구조한 채로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들의 무전기로 미리 빠져 나갔으며

          나머지의 생사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가족들의 가슴만 타버렸습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가짜뉴스나 스팸문자로 돈 벌 궁리만 하는 사람들...

          그런 모습들을 그저 속수무책으로 TV앞에서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은 과연 어떨까요?...

          만일에 누군가가 우리에게 책임자가 누구냐가 묻는다면 당신은 누구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까?

 

          히틀러는 엄청난 권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면서 수 백만 유대인들의 운명을 좌우지 했습니다.

 

          레닌, 모택동, 김일성등은 수 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생사권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무서운 독재자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지도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박정희 대통령은 어떠했을까요?

 

          지도력이라고 하는 것은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며 사람들이 원하는 바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도자란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는 자가 아닙니다.

 

          1993년 1월호 "이코노미스트" 지의 사설에서는 흥미로운 질문 하나를 게재하였습니다.

 

         "지금 당신은 당신의 나라에 대통령, 수상, 혹은 국무총리의 리더쉽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리고는 그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을 했습니다.

 

         "만일에 당신이 만족하고 있다면 당신은 아마도 소수의 집단에 속할 것입니다." 라면서...

 

          우리에게 있어서 국가란 무엇이며 지도자란 어떤 의미입니까?        

          국가라 함은 모든 국민들이 다 깊은 잠에 들지라도 늘 깨어서 국민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란 자신의 백성들이나 자기의 부하들을 위하여 스스로 나서고 희생하는 자입니다.

 

          그러한 국가, 그러한 지도자라면 사람들은 아낌없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등장한 자기의 스승 예수가 붙잡히게 되자 공포와 불안에 질려 도망을 갔던 그의 제자들이나         

          세월호가 바다에 침몰하게 되자 자기들만 살겠다고 먼저 빠져 나오는 선장과 선원들이나         

          마땅히 구조해야 할 사람들이 혹시나 자신들도 물에 빠져 죽지는 않을까 전전 긍긍을 하고 있는사람들이나         

          과연 무엇이 다르다 말할까요?

 

          희망은 어떤 과학적인 근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오는 것도 아닙니다.         

          정부의 성명처럼 경제적인 번영과 군사적인 우세나 과학적인 장비가 희망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그런 것들은 이 상황에서 어떠한 희망을 줄 수없는 것들로 판명되었습니다.        

 

          오직 국민들이 어려울 때마다 나타나 오징어 배를 동원하고 잠수부로 투입하는가 하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따뜻한 위로가  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면서        

        

          밤낮 실종자들을 구조하며 그들을 위해 숨어 봉사하는 손길 속에 희망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장차 유가족들이나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도 큰 힘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 나라에 왜 정부가 존재하고 지도자가 필요하며 종교계들이 존재하다고 보십니까?        

          그것은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 대하여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입니다.

 

          누구나 말하기는 쉬워도 실천으로 옮기기란 어려운 것이 삶입니다.         

          그리하여 국민들은 스스로 할 수 없기에 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선봉장으로 지도자를 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상황 속에서 우리의 지도자들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어느 누가 유가족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었습니까?

 

          오로지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져서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나 늘어놓고

          어떤 지도자는 자신의 기념거리를 삼기 위해 사진이나 찍고 

          어떤 지도자는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장소에서 식사를 하면서 과연 지도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나 하나를 놓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것은 정말 화가 나고 무책임하고 비겁하기 짝이 없는 수치였습니다.         

          한 생각을 내 쫓는 유일한 길은 더 강력한 생각으로 바꾸어 놓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들은 이러한 상황속에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북한의 상황들을 연신 알리기에 열을 올리며

          또 다시 국민들을 자극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선거가 중요하고 한미 공조가 중요해도 분명치도 않는 내용들을 우리국민들은 왜 알아야 하고

          그것이 지금의 구조상황보다도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까? 당신들은 감정도 없습니까?         

          신뢰는 공포를 정복하고 사랑은 증오를 정복하며 적극적인 행동은 과거의 실패를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우리는 분명한 역사인식을 가지고

          정신을 바싹 차리고 이 절망을 뚫고 나가며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어야 할 것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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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됨을 위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신 새벽 무덤가에서 여인들이 천사를 만났을 때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가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갈릴리는 북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지방으로 기원전 734년 부터 강대국에 의해 점령 당해왔다.
         앗수르에 의해 병합되어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였고         

         그 후 6세기 동안 갈릴리는 바벨론, 페르시아, 마게도냐, 애굽, 시리아가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그 동안 끊임없이 여러 다양한 민족들이 이주해 와서 이 지역에서 살았던 곳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734년 부터 80년까지 한 번도 갈릴리 지방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서 볼 때 갈릴리는 수 없이 주인이 바뀌면서

            우리 민족과 같이 아픔이 많이 있고 고난을 많이 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사9:1-2에 보면 갈릴리를 "사망의 그늘진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마4:23에서는 예수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셨는데 그 소문으로 인하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천사는 예수가 부활하던 날 여인들에게 나타나 예수의 부활소식을 보여주며        

        "그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너희가 볼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갈릴리는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만이 아니다. 의미적이요,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 곳은 온갖 질병과 악함으로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고 

         예수가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를 삼으셨던 곳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와 고통 당하는 자가 있고 병든 자가 있는 곳,            

         그들을 위로하며 치료하고 희망을 전해 주어야 할 곳이 바로 갈릴리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좋은 나라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자유롭고 질서있게 사는 나라일 것이다.

         나라가 제 아무리 경제와 국방력이 튼튼하다 할 지라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없다.

 

         과거에는 국방이니 안보니 말할 때에 그것은 군인들이 잘 훈련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였으나         

         오늘날의 국방은 군인들만의 일이 아니요 국민 전체의 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총화나 총력안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말이다.

 

         국가라 함은 모든 국민이 다 깊은 잠에 들지라도 늘 깨어서 국민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국민된 자는 누구나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지키는 것이 아닌가?

 

         지난 날 우리가 IMF시대에 국민들이 허리를 동이고 난국해법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 고통분담이란 말이 있다.          노동자와 기업이 고통을 분담하고 정부와 국민이 고통을 분담하면 경제대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분담은 사실상 기독교의 정신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롬12:15-16에서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강조했다.

 

         예수께서도 어느 날 장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셨다.         

         아이들은 모여서 잔칫집 놀이와 초상집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피리를 불면 모두가 따라서 춤을 추고 한 아이가 곡을 하면 모두가 슬프게 곡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몇 아이는 춤을 추지 않았고 몇 아이는 곡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잔치 분위기를 깨는 자들이요, 그 아이들은 슬픔을 나누지 않는 방관자들이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란 고통을 나눌 수 있는 부모의 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였다.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내려가는 정신적인 자세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랑한다면 고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고통을 나눌 때에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역순환을 하면 무관심이 이기주의를 낳고 이기주의는 무서운 재앙을 낳게 된다.           

         이러한 정신들이 우리 나라와 가정과 사회안에 널리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2014년 4월 16일 8시 48분 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앞바다에서 승객 476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갑자기 세월에 지쳤는지 그만 바다에 침몰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6.800톤 급이나 하는 이 거대한 배는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시 단원고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승용차 200대와 화물 등도 함께 있었다.

 

         고귀한 생명 174명만을 구조한 채로 학생들의 생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국민들은 TV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부모들의 가슴은 자꾸만 타들어 갔다.

 

            얼마나 학생들이 바닷 속에서 무서워 하며 떨고 있을까?

         그리고 또 누구를 원망하며 기도를 하고 있을까? 


         이러한 와중에서도 거짓 스팸문자를 보내어 돈 벌 궁리나 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대로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들일까?

 

         흔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모양만 갖추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양과 질에 있어서도 어떠한 동요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강하고 튼튼해야 한다. 

        

         사랑은 신자의 신앙 상태를 말해주고 이웃됨을 반영하는 표증이다.

 

         우리 나라 안에는 별의 별 사람이 존재한다.           

         사기꾼, 전과자, 성폭력범, 술주정뱅이들, 대구사람, 부산사람, 호남사람, 서울사람,

         이 당 저 당, 기독교인 불교인, 천주교인, 잘난체 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을 넓은 아량을 가지고 포용해야 하나가 될 수 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하나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며 사랑없이는 사소한 불화와 이견(異見)으로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남을 이해하게 되고 양보할 수가 있으며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두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과부와도 같다. 

          

         이 세상에서 볼 때 과부는 아무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며 마땅한 대책도 없는 무기력한 자이다.         

         이렇게 형편없고 과부같은 우리가 간청한다고 해서 그 간청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면 큰 오산이다.

  

         대통령을 원망하고 대책반을 부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실망뿐이다.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하여 다 써보지만 문제는 더욱 더 어려워져 갈 뿐이다.

  

         이럴 때에 우리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청은 강청으로 바꾸고 강청은 기도로 바꾸어서 하늘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고난의 바닷 속에 살고 있다.         

         자동차는 많아지고 살기는 좋아졌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답답함은 덩욱 더 증가만 되고 있다.         

         토끼같은 자식들은 또 어떻게 키우며 무얼먹여야 할지...앞 날이 캄캄하기만 하다.

 

         위기는 곧 기회요,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듯이 지금 우리는 좋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했더라면...

         

         다음 번에는 이와 같은 위기가 찾아오면 두번의 실수는 없을 것이다.         

         위기가 찾아오면 모든 생각과 교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와 민족에게 큰 위기가 찾아오면국가의 지도자와 모든 성직자들은 국민들앞에 나아가

         무릎꿇고 지난 날들의 잘못을 통회하고 용서부터 구해야 할 것이다.

  

         삼분오열로 찢기워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그 분에게 매달려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떠나갔던 국민들의 마음은 돌아오고 하늘도 감동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가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셨으며

         장사된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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