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는 공정하고 투명할 때 인정된다

 

어느 날 한 학급에서 학생들이 모여 반장선거를 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예상외로 전혀 엉뚱한 학생이 나와 뽑히고 말았다.

그 이유는 바로 학생들은 자기보다도 나은 아이가 반장으로 뽑히는 것을 원치않았던 것이다.

결국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나온 꼴이 되고 말았다.

 

지난 나의 대학원 시절에도 누군가 내게 찾아와 임원 한 자리를 맡아 달라며 내게 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아직은 나보다도 어린 나이로 배운 것도 많았고 의욕또한 충만했다.

"나는 아직은 그럴 위치가 있지 못하다"며 가볍게 사양을 하자 그는 못내 아쉬운 듯 다른 사람을 찾아 돌아섰다.

 

며칠이 지나자 그는 당당하게 임원회장에 선출되어 내게 또 다시 나타났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원망과 조소(嘲笑)가 함께 섞여 나를 무시하는 듯 "한번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고생도 끝나 졸업시즌이 돌아오자 교내에는 그 간에 불거진 교수문제와 학생임원들의 지나친 권력화가 논란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들은 청문회에 서게 되었고 학생들의 무서운 비난을 피할 수가 없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수라는 것은 최고의 권위를 갖게 된지 오래이다.

 

다수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반역자이며

소수들이 겪기 쉬운 어떠한 불리함도 다수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다수결의 원칙"이라는 공평의 법칙이 있다.

다수 의견이 항상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방법보다 합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도 이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다수들이 원한다고 해서 무엇이든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으로 불 가능한 일까지 이 법에다 적용할 수는 없다.

 

이를 테면 합법화의 논리로 인간을 속이거나 약점을 이용하여 광고나 불법대출, 대리모 출산, 사행성 산업, 성 합법화,

성차별, 장시간 노동이나 부당한 대우, 불공정한 경쟁이 바로 그것이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가게에서 품질이나 중량을 속여 강매를 하였다면 이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정될 수없는 무가치한 일이다.

또한 공무원들이 직권남용이나 뇌물을 받아 부당한 이득이나 노동조합의 부정개입, 공정보도를 하는 언론이 사주(使嗾)를 받아

날조된 사실을 왜곡보도 한다면 이는 사회적으로도 파괴행위이며 분명히 비난받아야 할 무가치한 일이다.

 

다수를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그렇다고 과대 평가해서도 안될 것이다.

 

그것은 다수들 속에는 언제나 앞뒤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나서는 이들이 많고

소신도 없이 분위기에 휩쓸려 함께 동화되어간 자들도 많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겁한 침묵은 만족스러운 동의의 표시이고 다른 사람의 주장을 흉내내는 것은 그도 그 사람을 추종한다는 의미이다.

 

선,악이란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과악은 추종자가 많건 적건 상관없이 변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경계를 확실히 하라.

 

사회가 발전하고 단체가 많아지며 조직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책임또한 많아지는 법이다.

만일에 조직이 어떠한 사건을 저질렀을때 문제를 가볍게 보고 넘겨서는 안된다.

 

악이란 병균과도 같아서 어느 곳에 병이 생겼을때 그곳만 아픈 것이 아니라

그 곳을 둘러싼 모든 부분들이 고통받고 급기야는 더 큰 병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자신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해 반성하지는 못할망정 이를 옹호하고 자기 전체가 다 그런 것이 아니라며

오히려 상대에게 비난을 퍼붓는 것은 조직으로서의 가져야할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다.

 

냉정한 비판만이 잘못된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자기를 냉철하게 비판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과 그 실수는 더 큰 습관으로 굳어지고 말 것이다.

 

잘못이라는 책임은 어쩌면 소수보다도 다수에게 더 엄격해야하고 모든 책임의 원인들도 지도자에게는 더 무겁게 물어야 할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옛말처럼 자기 사람이라고 감싸주고 불법이 묵인되고 인정이 고착화되면

영원히 이 나라의 정의는 실현할 수 없다.

 

그것은 그 누구도 해결해 줄 수없는 자신들만이 풀어야 할 과업과도 같은 것이다.

먼저 자기 안의 부정과 부패부터 뿌리 뽑고 정의를 외치며 질서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을까.

 

조직이 활력을 잃으면 그 조직은 존재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남들을 무시하고 자기 조직만이 제일이라는 집단 이기주의는 깡패의 소굴과도 같은 곳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조직들은 나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침체와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이들은 나라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자부심을 준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 자체가 활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국민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보다는 자신들의 안위와 경쟁에만 혈안이 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OECD에 가입되어 자랑스럽게 국위를 떨치고 세계 여러나라를 누비며 다양하게 활동을 펼치고 있는 국가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아직도 자살률과 폭력과 시위와 범죄가 끊이지 아니하고 불평등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가?

 

그것은 아직도 저들이 사회에 눈을 감고 제대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언론과 종교계, 그 가운데 교회는 세상의 양심으로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입맛따라 입장들이 바뀌고

정권의 눈치나 살피면서 언론과 종교인들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기에 사회가 병들고 있는 것이다.

언론에 비쳐지는 수 많은 사건을 보더라도 언제나 주범들은 이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 주역들이 바로 지도자들이다.

 

정의가 죽으면 불의가 살아나고 온갖 거짓 꾼들이 판을 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며 모든 조직들이 정의를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경쟁에만 혈안이지 사회정의에는 외면을 해왔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거리를 나오고 노동자들이 시위하며 대학생들이 소리높여 부르짖는 것은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정의를 부르짖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무척 어려운 법이다.

거리로 나가 행동하지는 못할망정 밤낮 집안에 앉아 부르짖기만을 계속한다면 나라의 정의는 어디에서 찾겠는가?

 

우리가 악들을 감시하고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을 더욱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관련이 없는 일이라면 곧잘 짜증을 부리기 일쑤이고

좀 더 한가롭고 조용한 전원생활을 즐기려는 것이 모두의 소원이다.

 

우리는 흔히 좋은 제도나 조직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좋은 사회를 이룩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제도나 조직도 사람이 달라지지 아니하면 아무리 좋은 방법도 악용될 수가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들은 사람을 위한 것이지 사람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다.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그 어떠한 것보다도 존귀함이 분명하다.

사람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죽이려는 조직은 어떤 의미에서 정의로운 조직은 아닐 것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아끼며 사람이 살기좋은 세상이야말로 모두가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겠는가.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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