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이름 삼각산

 

 

 

 

 

 

 

                  지금도 서울 연희동에서 홍제동 방향으로 문화촌을 지나서 세검정을 통과하고 나면

                  저 멀리로 북악 터널이 나오고 그 위로는 경관도 매우 빼어난 북한산이 보입니다.

 

                  예로부터 북한산은 백운대를 가운데로 북쪽에는 인수봉, 남쪽에는 만경대가 자리하여

                  내게는 삼각산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립니다.

 

                  내가 신학생이던 시절, 그 때는 입장료도 없었고

                  내가 고민이 있을 때마다 종종 올라가 기도를 하던 삼각산...

 

                  지금은 목회자가 다 된 김신조 목사는 그 옛날 북한의 암살 지령을 받고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이 산을 오르려다 경찰의 불심 검문을 받고 투항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의 간증에서 " 왜 그렇게 이 산에는 개구리들이 많이 있느냐?"고 궁금하기도 했더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치고 삼각산을 모르고서는

                  기도한다는 명함조차도 아예 꺼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매주 화요일, 하루 해가 끝나고 밤이 오면 우리는 동료들과 아무리 피곤하고 과제가 많이 밀렸어도

                  랜턴을 들고 어김없이 이 산에 모였더랬습니다.

 

                  나는 기도 모임의 회장을 맡고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힘있게 끌어 주며 랜턴의 불을 밝히고

                  한 줄로 길게 늘어 서서 정상까지 올라가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왔습니다.

 

                  형제봉은 능력봉이라고 해서 정상까지 올라서면 서울시가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이고

                  어떤 날은 저 멀리 인천까지도 내려다 보입니다.

 

                  멀리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우리의 지친 몸은 저 멀리 날려 버리고

                  우리는 어느 새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희망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어떤 이들은 머리 위에 김장용 비닐봉투를 덮어쓰고

                  어떤 이들은 바위틈으로 숨어서 밤새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오소롯이 피어나는 그리움, 주님께 바쳐지는 영가

                  휘날리는 입김 속에 저 마다의 절규가 터졌습니다.

 

                  주여! 주여! 주여!

                  부르면 부를 수록 그것은 솟아나고 어둠의 그림자도 저 멀리 사라집니다.

 

                  따끈한 커피라도 있었으면...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고 우리는 흐르는 물줄기에 목을 적셔야만 했습니다.

 

                  서서히 동이 터 오면 우리들도 하나 둘씩 산 아래로 내려가서

                  예능인 교회에서 쉬었다가 첫 차에 올라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 내가 아내와 함께 기도를 하며 힘을 얻던 삼각산...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산을 찾아 마음껏 공기를 들이 마시고 행복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사람들은 무슨 고민이 많아 그렇게도 괴로워 하며

                  그렇게도 허무하게 목숨을 끊는단 말입니까?

 

                  삼각산은 오늘도 말 없이 우리를 내려다 보며 이렇게 꾸짖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인간의 생명(生命)은 살아가라는 하늘의 명령이고 자살의 반대는 살자라고 말입니다.

                            

 

                                                                                                                              이 그림은 메일 속의 YTN 사진입니다.

  

    사람은 누구나가 죽음이 다가오면 진실해 지기 마련입니다.

    좀 더 솔직해 지고 모든 주변을 정리하며 세상에 대한 미련도 갖지 않습니다.

 

    지난 4월 9일 3시 32분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북한산 형제봉 매표소 부근에서 숨진채 발견되었습니다.

    이번 그의 자살이 큰 충격을 주는것은 그가 단지 유명해서가 아니라

    자원외교 비리 의혹으로 검찰수사를 받다가 강한 의혹만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검찰의 무리한 수사에 따라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기 하나가 희생됨으로 다른 사람이 더 희생되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면서

    맑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언론에게 보도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이번 그의 자살을 두고 자기신변의 두려움이나 고통에 따른 괴로움의 표출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그렇다면 죽음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수있을까요?

 

    죽음은 단지 자신과의 마침이지 자신을 둘러싼 기대열망에 자살만이 능사인가라는 가치판단이 따릅니다.

    죽음에 맞서 그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용기있는 행동일 것같지만

 

    그러나 죽음보다 살아갈 일이 더욱 더 무섭고 두려워질 때

    어떻게든지 살아서 대처해 가는 것이 더욱 더 용기있는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강 가옆에 사는 사람이 어찌 물의 귀중함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물이란 사막의 오하시스요, 한 줄기 생명수입니다.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하며 동정을 보내기도 하고 그래도 자살만은 안된다고 말해 보지만

    이미 작정을 하고 목숨을 끊어버린 사람에게 그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왜 자살이 어리석은 것일까요?

    열심히 살지못한 순간의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열심히 사십시요.

    그것도 인간의 아름다운 사명(使命)입니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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