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됨을 위하여 

 

 

 

 


         예수께서 부활하신 새벽 무덤가에서 여인들이 천사를 만났을 때 천사는 여인들에게

         예수가 잡히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는 말씀을 상기시키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 고 하였다.

  

         역사적으로 갈릴리는 북 이스라엘의 가장 북쪽 지방으로 기원전 734년 부터 강대국에 의해 점령 당해왔다.
         앗수르에 의해 병합되어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오기 시작하였고         

         그 후 6세기 동안 갈릴리는 바벨론, 페르시아, 마게도냐, 애굽, 시리아가 차례로 점령하였으며         

         그 동안 끊임없이 여러 다양한 민족들이 이주해 와서 이 지역에서 살았던 곳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734년 부터 80년까지 한 번도 갈릴리 지방을 지배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점령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에서 볼 때 갈릴리는 수 없이 주인이 바뀌면서

            우리 민족과 같이 아픔이 많이 있고 고난을 많이 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사9:1-2에 보면 갈릴리를 "사망의 그늘진 땅"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마4:23에서는 예수가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셨는데 그 소문으로 인하여 많은 무리들이 예수를 좇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천사는 예수가 부활하던 날 여인들에게 나타나 예수의 부활소식을 보여주며        

        "그가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셨으니 거기서 너희가 볼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 갈릴리는 단순히 지리적인 장소만이 아니다. 의미적이요, 상징적인 장소이다.         

         그 곳은 온갖 질병과 악함으로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고 

         예수가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를 삼으셨던 곳이기도 하다.

 

         가난한 자와 고통 당하는 자가 있고 병든 자가 있는 곳,            

         그들을 위로하며 치료하고 희망을 전해 주어야 할 곳이 바로 갈릴리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좋은 나라는 온 국민이 하나가 되어 자유롭고 질서있게 사는 나라일 것이다.

         나라가 제 아무리 경제와 국방력이 튼튼하다 할 지라도 하나가 되지 못하면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없다.

 

         과거에는 국방이니 안보니 말할 때에 그것은 군인들이 잘 훈련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였으나         

         오늘날의 국방은 군인들만의 일이 아니요 국민 전체의 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민총화나 총력안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겨난 말이다.

 

         국가라 함은 모든 국민이 다 깊은 잠에 들지라도 늘 깨어서 국민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국민된 자는 누구나 납세의 의무, 교육의 의무, 병역의 의무를 성실히 지키는 것이 아닌가?

 

         지난 날 우리가 IMF시대에 국민들이 허리를 동이고 난국해법의 하나로 제시한 것이 고통분담이란 말이 있다.          노동자와 기업이 고통을 분담하고 정부와 국민이 고통을 분담하면 경제대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분담은 사실상 기독교의 정신을 말한다.            

         바울 사도는 롬12:15-16에서 "즐거워 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강조했다.

 

         예수께서도 어느 날 장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셨다.         

         아이들은 모여서 잔칫집 놀이와 초상집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아이가 피리를 불면 모두가 따라서 춤을 추고 한 아이가 곡을 하면 모두가 슬프게 곡을 해야 한다.

         그런데 몇 아이는 춤을 추지 않았고 몇 아이는 곡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잔치 분위기를 깨는 자들이요, 그 아이들은 슬픔을 나누지 않는 방관자들이다.         

         예수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사랑이란 고통을 나눌 수 있는 부모의 심정, 그것이 사랑이라고 하였다.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내려가는 정신적인 자세이다.         

         만일에 우리가 사랑한다면 고통을 나눌 수 있어야 하고 고통을 나눌 때에 거기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역순환을 하면 무관심이 이기주의를 낳고 이기주의는 무서운 재앙을 낳게 된다.           

         이러한 정신들이 우리 나라와 가정과 사회안에 널리 적용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2014년 4월 16일 8시 48분 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앞바다에서 승객 476명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갑자기 세월에 지쳤는지 그만 바다에 침몰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6.800톤 급이나 하는 이 거대한 배는 수학 여행을 가던 안산시 단원고 학생 325명과 선원 30명 등

         총 476명을 태우고 승용차 200대와 화물 등도 함께 있었다.

 

         고귀한 생명 174명만을 구조한 채로 학생들의 생사가 어떻게 되었는지

         국민들은 TV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부모들의 가슴은 자꾸만 타들어 갔다.

 

            얼마나 학생들이 바닷 속에서 무서워 하며 떨고 있을까?

         그리고 또 누구를 원망하며 기도를 하고 있을까? 


         이러한 와중에서도 거짓 스팸문자를 보내어 돈 벌 궁리나 하고 있는 사람이나         

         그대로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들일까?

 

         흔히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모양만 갖추고 있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양과 질에 있어서도 어떠한 동요에 의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강하고 튼튼해야 한다. 

        

         사랑은 신자의 신앙 상태를 말해주고 이웃됨을 반영하는 표증이다.

 

         우리 나라 안에는 별의 별 사람이 존재한다.           

         사기꾼, 전과자, 성폭력범, 술주정뱅이들, 대구사람, 부산사람, 호남사람, 서울사람,

         이 당 저 당, 기독교인 불교인, 천주교인, 잘난체 하는 사람들...

 

         우리는 이 모든 사람들을 넓은 아량을 가지고 포용해야 하나가 될 수 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사랑이란 하나되는 것이다"고 하였다.

 

         우리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며 사랑없이는 사소한 불화와 이견(異見)으로도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 남을 이해하게 되고 양보할 수가 있으며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모두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간청하는 과부와도 같다. 

          

         이 세상에서 볼 때 과부는 아무 권력도 없고 배경도 없으며 마땅한 대책도 없는 무기력한 자이다.         

         이렇게 형편없고 과부같은 우리가 간청한다고 해서 그 간청이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보면 큰 오산이다.

  

         대통령을 원망하고 대책반을 부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기다리라는 실망뿐이다.         

         이 방법 저 방법을 동원하여 다 써보지만 문제는 더욱 더 어려워져 갈 뿐이다.

  

         이럴 때에 우리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간청은 강청으로 바꾸고 강청은 기도로 바꾸어서 하늘을 움직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우리들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고난의 바닷 속에 살고 있다.         

         자동차는 많아지고 살기는 좋아졌다고 말하는데 우리의 답답함은 덩욱 더 증가만 되고 있다.         

         토끼같은 자식들은 또 어떻게 키우며 무얼먹여야 할지...앞 날이 캄캄하기만 하다.

 

         위기는 곧 기회요, 전화위복이란 말도 있듯이 지금 우리는 좋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럴 때는 저렇게 했더라면...

         

         다음 번에는 이와 같은 위기가 찾아오면 두번의 실수는 없을 것이다.         

         위기가 찾아오면 모든 생각과 교만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국가와 민족에게 큰 위기가 찾아오면국가의 지도자와 모든 성직자들은 국민들앞에 나아가

         무릎꿇고 지난 날들의 잘못을 통회하고 용서부터 구해야 할 것이다.

  

         삼분오열로 찢기워진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그 분에게 매달려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그리할 때 떠나갔던 국민들의 마음은 돌아오고 하늘도 감동하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예수가 이 땅에 오셨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셨으며

         장사된 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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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YTN 참조 >

    

 

 

                  아! 무심하다. 세월호(歲月號)

     

                인생은 마치 바다를 항해하는 세월호란 말인가?

 

                우리는 지금 한 치도 알 수없는 안개와 같은 깊은 바다를 항해하고 있다.

                앞에는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또 아래에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다.               

               마치 선원들이 긴 항해를 마치고 무사히 항구에만 도착 하기를 학수고대하는 것처럼

 

                우리들도 인생의 항구에 까지 무사히 도달하기만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인생의 바다에서 물결은 조수의 밀물과 썰물같이

                세월호는 정녕 고달프고 변화무쌍한 우리의 인생인가?

                모든 배에는 각기 그 이름을 갖고 있다.

                또 처음 항해를 시작하는 자기의 항구와 항해하는 목적지를 갖고 있다.

 

                하나의 배가 처음 건조(建造)되면 자세한 검열을 받고 배로써 갖추어야 할 모든 적응력을 확인한다.

                배가 낡아 가면 갈수록 그 가치는 성능이 떨어지고 위험도 그 만큼 높아지게 마련이다.

 

                모든 배에게는 각양 다른 적재량도 갖고 있다.

                100톤 급의 작은 배는 6000톤 급의 배만큼 많이 실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작은 배는 큰 배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좁고 험한 항로들을 마음껏 다닐 수 있다.               

                배가 접촉하는 물의 양이 많으면 많을 수록 배가 쓰러질 위험도는 훨씬 더 높아진다.

 

               

                그 배에 무엇이 실렸는 지 우리는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세상을 더욱 더 아름답게 해 줄만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일감을 더욱 안겨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빵을 더욱 채워주며                

                바다 건너 아프리카에도 희망을 안겨 줄 것이다.


                만일에 배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유지하지 않으면 항해도 할 수없고 조정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배에 화물이 없으면 배의 균형을 잡기위해 모래나 자갈, 물 등으로 평형을 만들어야 한다.

 

                이것을 우리는 바닥짐, 평형수라고도 하는데 배는 그 균형감각이 매우 중요하다.               

                균형감각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때 배는 기울어져서 바로 침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균형감각은 사람에게도 너무나 중요하다.

                우리의 욕심이 너무 없게 보여서도 안되지만 너무 비만해서는 더욱 더 위험하다.

 

                배의 항구는 휴식과도 같은 존재이다.

                배가 항해하면서 너무 무리하지 않도록 충분히 휴식하고 보충을 하며 점검하는 곳이 항구다.

 

                어떤 배들은 항해할 준비조차 못하고서 나갔다가 침몰해 버리기도 하며

                어떤 배들은 암초에 부딪쳐서 거친 물살에 흔들리며 산산 조각이 나기도 한다.

 

                그 동안 우리의 인생들도 얼마나 바다에서 부딪치며 파선을 하였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술과 도박, 주식이라는 바다에 빠져서 인생이 파탄나 버렸는가?

 

                지금도 팽목항에서는 고인들의 유품을 고이 간직하며 날마다 슬픔을 달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사랑하는 자식이 평소에 아끼던 물건, 비록 때가 묻고 낡았지만

                가엾은 어머니는 그 물건을 볼 때마다 떠나간 자식생각에 그만 눈물을 글썽이고 만다.

 

                아무리 무뚝뚝한 아버지라도 그것들을 보시고는 끝내 그 위에다 눈물로 대신하며

                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면서 울부짖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다고 이미 떠나간 자식들은 돌아올 줄 모른다.

 

                인간의 양심은 마치 배의 키와도 같이 노련한 선장이라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정해진 항로를 따라 무사히 안전하게 항해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 사람의 부주의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는 지 분명히 목도 하고 있다.

 

                지난 날 우리 역사에서도 군부 독재가 나타나 권력의 세월호를 빼앗고서

                나라안에는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죽어 나갔는지 모른다. 

 

              

                군사문화가 시작되자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유신을 통한 끝없는 인권탄압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현재에도 고스란히 남아서 지금도 그 세력들은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모든 사건들을 은폐하며 온갖 수단과 방법들을 동원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라의 키를 잡은 사람들은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겸손하게 나라를 이끌어야 할 것이다.

 

                선장은 신뢰있는 사람으로 신뢰는 항상 양심이라는 선원을 데리고 다닌다.

                양심의 선원들은 예리한 그 시각으로 어떠한 망원경도 없이 선장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

 

                그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먼저 육지를 발견하고 암초와 같은 장애물들도 먼저 찾아낼 것이다.

 

 

                우리가 더욱 더 신뢰하는 선장과 함께 항해를 할 수만 있다면

                그 배는 우리들의 정해진 행복의 목적지까지 안심하고 무사하게 데려다 줄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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