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에 대한 분노를 더욱 높여라

 

 

 

 

 

인간의 모든 신체및 정신적인 기능은 악에 대해 타고난 반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반감이 있다는 것은 그 기능이 매우 건강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감정의 가장 낮은 형태는 반감(反感)에서 시작하여 증오, 그 다음이 혐오이다.

이 단어들은 동물이 깃대나 털을 쭈뼛이 세우거나 격렬한 떨림으로 자기 방어를 취하

일종의 공포심을 뜻하는 말이다.

 

미움은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어떤 무기보다도 위험하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불과 같아서 신중히 사용되어야 한다.

 

물론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악 자체보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대부분이며 사람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실 악은 교묘한 형태들로 우리 안에 침투하고 있기 때문에 분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우리 사회 정의를 막고 있는 종북 문제나 정치싸움들을 보면 아무 소득도 없는 국력만 낭비할 뿐이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헌법정신과 국가 가치가 아름답고 최상의 목표로 삼고 있다고 할 지라도

그것을 누가 어떻게 어떤 의도로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 막 잡으면 막걸리가 되는 것이다.

 

한국인 중에 통일에 대한 마음들이 남북한이나 보수나 진보나 누구 하나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대와는 달리 통일이 언제 될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이뤄질 것인지

 

또 통일이 이뤄진다면 이후에는 어떤 문제가 따를 것인지 그리고 이 문제는 우리에게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이며

그것을 우리들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는 매우 불확실하기만 하다.

 

마치 안개가 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우리의 통일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사실을 바로 직시하라!

 

요즈음 북미간의 신경전처럼 미국은 북한을 길들이기에 안달이고

북한은 북한식 대로 핵카드로 맞서고 남한은 남한식 대로 외국과 연합하여 북한을 비난하고 있다.

 

박대통령의 말씀대로 통일은 대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북한주민이 탈출해서도 아니고

북한이 쉽게 붕괴되거나 남한이 흡수 통일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 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민족 통일을 염원하면서 전쟁을 통한 무력으로의 통일인가 아니면 협상으로서 평화 통일인가

그리고 1국가 1체제인가 1국가 2체제인가의 문제로 통일을 생각하게 된다.

 

한반도의 통일 논의는 언제 어떤 방법의 논의라고 하더라도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에 따른 역학관계와

남북 당사자간의 이해 관계와 주변 국가들의 실리관계가 가장 중요하다.

 

이 점에서 우리의 남북 통일은 모두에게 보탬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통일이 저해도 될 수있다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분단 자체가 우리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동서 냉전 속에서 강대국들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것이기에 우리의 통일문제는 이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오스트리아의 통일처럼 4강들의 경계를 불식시키지도 못했고

독일의 그것처럼 통일을 할 수있는  기본 조건도 성숙되지가 않았다.

 

1990년 서독이 통일을 흡수 통일하면서 장벽이 무너진 것은

동독인들은 이미 1973년 부터 서독의 TV나 언론 매체들을 쉽게 접하고 서독을 신뢰할 수 있었고

통일 이후에도 자신들의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확신이 있었기에 통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진위가 어떠하든지 우리는 철저하게 북한 출입을 가로 막고 TV를 차단하며

언론들은 매일같이 종북 논란을 쏟아내며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더욱이 종편방송들은 TV앞에서 말 잘듣는 탈북민들을 불러다가 북한의 부정적인 모습들만 보여주고 있고

논객들은 연일 국정원의 입장만을 그대로 전달하며 추측성 보도만을 그대로 내보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북한 사회가 너무 폐쇄적이고 살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북한을 길들이기 위해

그들의 돈줄을 차단하고 심리적인 압박을 더욱 높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든지 통일을 한다고 해서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우리 안에 벌어지는 끝없는 갈등과 치안유지는 계속 늘어나고 말 것이다.

 

하나의 주장을 놓고서도 누가 옳은지 말싸움을 한다면 언제나 힘있는 쪽이 유리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아닌 것이 진실이 될 수 없고 무력에 의해 얻어진 승리는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어떠한 악이라도 미워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인격을 타락시키고 생활을 파괴하며 슬픔과 고통을 낳게하는 무엇이라도 미워해야만 한다.

 

제 멋대로 행하도록 방관되는 사회에서는 불의를 저지르는데 대담하다.

그러나 이기심이라는 불의를 많은 사람들이 증오한다면 이기적인 사람은 스스로 떠나가고 말 것이다.

 

패역하고 어그러진 사회에서 악에 대한 반감은 인간의 자아를 정화시켜주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악에 대한 증오심은 도덕성을 한층 더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이유든지 이러한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다면 이는 꺼져 버린 불과 같다.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의 적도 만들지 못하고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훨씬 더 오래 전에 죽었어야 될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악한 일을 꾸짖고 이 세상을 보면서 불의를 미워하고 책망할 일이 얼마나 많은 지도 것이다.

한 평생을 살면서 남에게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한 번도 꾸짖어 보지 못한 사람은 얼마나 비겁한가?

 

그것이 비록 자신에게는 관심없고 조용히 살겠다는 뜻이었다면

차라리 그의 무덤을 어느 깊은 산 중이나 지하에다 만들어 주는 것이 낫다.

 

정의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기름진 설교강단에서 배부른 설교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를 부르짖었던 셰례요한처럼 되는 것이 아름답다.

 

대중들의 감정은 높은 도덕적 근거보다는 공정하고 진지하기가 어렵다.

언론들이 이를 어느 정도 교정을 시키고는 있지만 우리의 언론또한 양심을 저버린지 오래이다.

 

격렬한 폭력을 수반하는 대중들의 분노와 편견, 탐욕등에 영합하려는 언론들이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다.

그러나 부정과 불의를 고발하며 공정하고 올바른 기사를 싣는 언론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언론이 있다면 그 언론이야 말로 우리 사회를 지켜주며 안내해 주는 견고한 망대(望臺)가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중들이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 보다 과감하게 소리를 높여야 할 때이다.

불의에 대한 분노의 결여는 그 것만큼이나 더 경종을 울려야 하는 심각한 문제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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