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처럼 이슬처럼

                



              사려가 깊은 사람이라면 사람의 내면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우리는 내면의 영역보다는 감각적인 영역에 너무 익숙하여 그것이 완전히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자로 부터 생겨난 개념을 계속해서 후자에 전이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물질은 그 크기로 판단하고 기계는 그 장치로 판단해서 그 세계에서 사용하는 이러한 표준들을

              내면의 영역에까지 대입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종종 힘있는 단체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 본질은 잊어버리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양심보다 다수의 의견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여론을 매우 중시하며 어떤 입장을 결정하기전에 세태가 나아가는 방향을 주의깊게 살펴본다.

 

              힘과 승리가 정의의 편인 것은 정의가 다수이기 때문도 아니고 시대의 교묘한 전략이나 권력도 아니다.

              비록 소수이고 부족하지만 정의의 사람들은 거부할 수없는 무언의 정의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면의 진정한 힘은 그 크기가 아니라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가치, 확신과 열심에 달려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양보다 질이 우선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일,당,백과 같이 훈련되고 용감한 몇사람이 훈련되지 않은 거대한 집단과 싸워서 이기기도 한다.

 

              종교에서도 비록 교회가 적은 숫자로그들이 가진 믿음과 신앙으로

              큰 교회보다 더 많은 일도 할 수있을 것이다.


              세상에서 잘난 체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영향력을 무시하지만 이것은 견고한 진(陣)을 부수는 것과도 같다.

              모두가 지난 국정원의 대선 개입을 비난하고 있는 이 때에

              정부와 보수단체들은 사과는 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천주교 사제단의 시국미사를 비난하고 나섰다.

 

              누가 어느 종교, 어느 성경안에서 저들은 종북이니 멀리하고, 복수하라고 말하던가.

              그것이 종교이며 복음이고, 그들이 참 지도자라고 말하던가.


              하나님은 일찌기 그런 사람들에게 교회의 정통성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 예가 없다.

              사람이 착각에 빠지면 점점 더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심정, 과연 주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일까?


              더욱 더 기가 막힌 것은 문제를 지적할 때마다 저들은 아무렇게나 긍정을 들먹인다.

              긍정(肯定)이란 사람이 수긍(首肯)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서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가장 거룩한 척, 종교를 빙자한 그릇 행동이나 교리를 앞세워서 편을 갈라놓는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우리의 복음을 가로막는 사탄의 무리와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강한 위협이나 저항할 수없는 폭풍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소리없이 내리는 이슬과도 같은 것이다.


              아침 이슬은 하늘과 땅 사이에 확실한 관계가 맺어질 때만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하늘과 땅이 조화를 이루어갈 때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구하여지는 것이다.

             

              이슬은 비록 그 자체가 연약하지만 모이면 강력한 힘을 나타낸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식물에 생기와 활력을 넣어주며 자신의 공로는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지도자는 무슨일이나 자기를 미워하고 죽이려는 원수들까지라도 사랑하고 관용해 주는 것이다.

              시간과 정력과 사명을 다하고도 당연한 것뿐이라고 자신은 연기처럼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것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우리는 가끔씩 사회에서 교회가 왜 앞장서서 정치적인 문제에 관여하느냐고 질문할 때가 있다.

         그러나 정치가 거짓과 불의라는 두 뿔을 가진 마귀라고 생각할 때 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다시한번 알게 된다.

         교회가 정치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그 정치 속에 깃들인 거짓과 불의를 몰아내고 싸워야 한다.

 

         거짓과 불의로 무장한 세력들은 지금도 우리의 삶에 온갖 영향을 주고 있는데

         교회가 그것을 바라보며 방관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교회로서 진정한 책임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을 통한 마귀의 발악들이 극대화되고 있다.

         정통성과 도덕성을 상실한 권력은 온갖 거짓과 불의를 자행하고 그것을 교묘하게 은폐하며

         폭력으로 그 거짓을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풍조가 정치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지금 거짓과 불의는 모든 사회에 파급되어 이 사회가 정의를 외면하고 도덕성을 상실해가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정치가 부패하면 사회전반이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사람에게 병이 생기면 한 곳만 아픈 것이 아니라 전체가 열이 나고 앓게 되는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문제는 모두 병에 걸려 몸살을 앓고 있는 환자와도 같다.

         이 사회가 자꾸 아우성치고 열이 나고 있는 것은 그래도 이 나쁜 대적과 싸우려는 세력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에 지금과 같이 우리가 진통을 겪으면서도 이 악에 대항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벌써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몸살을 앓고 있기는 해도 아직은 죽을 병에 걸린 것은 아니다.

악에 대항하는 모든 세력들이 힘을 모아 이 악을 몰아낼 때 비로소 이 사회는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회복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한국에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그것을 결코 부러워 하지말라.

         교회가 많다는 것은 그 만큼 교회가 할 일도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교인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 만큼 한국사회가 변화되어간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들이 오늘의 상황에서 한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어본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옳을까

         마귀가 자꾸 날 뛸때 구경만하고 도외주었다고 말을 할까

         차라리 현실을 외면하고 잊어버리고 살 수있게 교인들을 미혹시켜 무감각하게 만들었다고 대답할까

 

         국가가 비대해지면 반드시 국가주의로 가게되고 국가주의는 국민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게 마련이다.

         그 동안 지향해온 구미문화는 일본과는 다르게 거대주의였다.

 

         기업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국가도 다른 나라보다 크지 않으면 안되었고 정당도 군대도 모두 강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교회도 성장주의에 사로잡혀 대형교회가 교회의 최고 목표처럼 너무 큰 것만을 좋아하게 된 것이다.

 

         우리 한국교회도 이 원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무조건 크지 않으면 교회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이 좁은 나라에서 자기교회의 교인들을 늘리기 위해 다른 교인을 데려오거나

         전문적인 강사나 전도인을 초빙하여 사람들을 포섭해 오기도 한다.

 

         혹시나 교회가 갱신이 늦는 것은 갱신되어야 할 교회지도자가 갱신을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로는 교회개혁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정치인들처럼 자기에게 방해가 되면

         가차없이 이단이나 불순한 자로 내 몰아 사회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동안 교회가 너무 몸이 비대하여 거동이 불편했다면 이제는 조금 덜 먹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몸을 가볍게 해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묶인 자에게 해방을, 눈먼 자에게 광명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목자로 양 아흔 아홉마리를 들에 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 것이다.

 

         생명은 하나이다. 이 하나의 생명을 위해 전체가 복종하는 그것이 바로 구원의 정수이다.

         작은 하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교회, 단체, 국가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교회건물은 하나의 필요이지 조건은 아니다. 교회의 의식도 하나의 순서이지 절대가 아니다.

         신라시대에 그렇게 많던 불교가 몰락한 것도, 고려시대의 사찰도, 금강산의 암자도 많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교회가 정의나 진실, 예수를 잃어버리고 사람보다는 권력자의 편에 설 때 그 교회는 죽고 만다.

         교회의 생명은 십자가의 사랑과 희생에 있다.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 교회 자체가 바로 예수의 몸이다.

 

 

         가슴이 따스한 사람 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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